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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체는 본기(제왕들의 역사 기록)-세가(제후들의 역사)-연표-지(제도 등)-열전(충신, 열녀 등)으로 구성된 역사 서술 술 방식을 의미합니다(편찬 순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삼국사기를 예를 들어 보죠
삼국사기는 본기(고구려본기-백제본기-신라본기)-연표-(잡)지-열전으로 구성 서술하였습니다.
그 틀을 맛보기로 보여드릴게요.
고구려본기는 동명성왕~보장왕까지를 순서대로 기록하였습니다. 동명성왕의 기록과 유리왕 기록을 어떻게 하였는지 맛보기로 일부를 보여드릴게요.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3년 봄 3월,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중략)--------카페지기가 줄인 겁니다.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유리명왕>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의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2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하 생략)---------------------
고구려본기가 끝나면 백제본기(온조왕~의자왕), 신라본기....가 계속이어집니다.
연표
(BC와 AD의 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삽입한 것임)
연표 (상)
해동에 국가가 형성된 것은 오래 전 이었다. 그러나 기자가 주 왕실에서 봉작을 받고, 위만이 한 나라 초기에 제호를 참칭한 이후로 시대가 멀고 기록이 소략하여, 실로 그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삼국이 정립하여 대치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전해진 기록이 아주 많았다. 신라는 56대 왕 992년 동안 이어졌으며, 고구려는 28대 왕 705년 동안 이어졌고, 백제는 31대 왕 678년 동안 이어졌다. 이제 그 시말을 살필 수 있으므로 삼국의 연표를 작성하기로 한다.[당의 가언충이 "고구려는 한대부터 국가를 형성하여 지금까지 900년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 서력 | 간지 | 중 국 | 신 라 | 고구려 | 백 제 |
| AD51 | 신해 | 건무 27년 | 유리이사금28년 | 모본왕 4년 | 다루왕 24년 |
| AD52 | 임자 | 건무 28년 | 유리이사금29년 | 모본왕 5년 | 다루왕 25년 |
| AD53 | 계축 | 건무 29년 | 유리이사금30년 | 모본왕 6년 | 다루왕 26년 |
모본왕 사망.
국조왕 궁 즉위 원년
| AD54 | 갑인 | 건무 30년 | 유리이사금31년 | 국조왕 2년 | 다루왕 27년 |
----------(이하 생략)---------------------
연월일순으로 계속이어집니다.
잡지(雜志)
제 1. 제사, 음악
○신라의 종묘 제도에 의하면, 제 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 22대 지증왕 때에 이르러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 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5묘를 제정하였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가 된다고 하여, 그리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를 만들었다. 제 37대 선덕왕 때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또한 제사 예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국내의 명산대천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천지신명에까지 지내지 않은 것은 아마 [왕제]에 "천자는 7묘이며, 제후는 5묘이니, 두 소(昭) 두 목(穆)과 태조의 사당을 합하여 5묘이다"라고 한 것과 또한 [왕제]에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므로 함부로 예에 벗어나지 않고 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사직단 및 사당 높이, 사직단 주위의 담과 사당 문의 안팎 위치, 신위 순서의 높고 낮은 것, 제물 진설과 오르내리는 절차, 술잔, 제기, 제육, 축문 등에 대한 예법은 추측이 불가능하므로 그 대략의 내용만을 기록할 뿐이다.
○ 1년에 여섯 번씩 5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날짜는, 정월 2일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과 15일이었다. 12월 인(寅)일에는 신성 북문에서 팔자(八?)에 제사를 지내는데 풍년에는 큰 소를 잡았으며, 흉년에는 작은 소를 잡았다.
입춘 후 해(亥)일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에 제사 지내고, 입하 후 해(亥)일에 신성 북문에서 중농에 제사 지내고, 입추 후 해(亥)일에 산원에서 후농에 제사 지내고, 입춘 후 축(丑)일에 견수곡 어구에서 풍백(風佰)에게 제사 지내고, 입하 후 신(申)일에 탁저에서 우사(雨師)에게 제사 지내고, 입추 후 진(辰)일에 본피유촌에서 영성(靈星)에 제사를 지냈었다.[여러 예전들을 상고하건대 선농에만 제사를 지냈고, 중농과 후농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다.]
○3산 5악 이하 명산 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된다.
○대사는 세 산에 지냈는데, 첫째 나력산[습비부], 둘째 골화산[절야화군], 셋째 혈례산[대성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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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복색, 거마, 기물, 가옥 등 제도와 관련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열전
권41~43 김 유신
권4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 김양, 흑치상지, 장보고, 사다함
권4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와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제상, 귀산, 온달
권46 강수, 최치원, 설총
권4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계두, 김영윤, 관창, 김흠운, 열기, 비녕자, 죽죽 필부, 계백
권48 상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 선생, 검군, 김생, 솔거, 효녀 지은, 설씨, 도미
권49 창조리, 연개소문
권50 궁예, 견훤
<김유신>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 12대조 수로는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귀봉에 올라가 가락의 구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에 이르렀다. 구차휴라고도 하는 구해는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네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부친 서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문에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이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이 그의 자인지를 알 수 없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처음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을 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었을 때, 만명과 함께 가려 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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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