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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십계명 #신성모독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妄靈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妄靈되게 부르는 者를 罪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You shall not take the name of JEHOVAH your God in vain, for JEHOVAH will not hold him guiltless who takes his name in vain.
Non assumes nomen JEHOVAH Dei tui in vanum : nec enim habebit insontem JEHOVAH eum qui assumpserit nomen JEHOVAH Dei sui frustra.
Οὐ λήμψῃ τὸ ὄνομα ΙΕΗΩΟΥΑ τοῦ Θεοῦ σου ἐπὶ ματαίῳ· οὐ γὰρ μὴ καθαρίσῃ ΙΕΗΩΟΥΑ ὁ Θεός σου τὸν λαμβάνοντα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ἐπὶ ματαίῳ.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다는 것은 이교도들처럼 대놓고 하나님 그리스도를 저주하거나 욕한다거나 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기반의 국가들과 교회들과 사람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그저 하나의 농담이나 문화 정도로 취급되어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기독교 사상이 저변에 깔려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사회와 문화와 삶 등에 기독교적인 성향들이 배어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적 사상을 좋은 것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하찮은 것이나 안좋은 것에도 쓸데없이 적용한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God damn’이란 욕은 실제로 신앙적으로 패역한 자를 향한 권위있는 저주로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마음에 안드는 원수 같은 상대를 향한 개인적인 일상의 욕으로 사용한다. 예기치 않게 안좋은 일을 당하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Jesus Christ!’라며 한탄을 한다. 누군가가 재채기를 할 때는 'God bless you’라고 해줘야 한다. 지존하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런식으로 가볍고 하찮게 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다. 이런 망령된 호칭은 이미 미국의 문화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산당처럼 없앨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그래서 누구든지 미국의 문화를 추종하거나 미국에서 살고자 하는 교인들은 이런 망령된 문화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므로 소돔에서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된 롯과 같이 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신 후에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것이라고 악담을 하자 그들을 향해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마귀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이는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뱐대로 생각해보면 불의한 일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 포장하는 것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망령된 범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거짓이나 불의함이 없으신 절대선이신데 그런 분을 불의하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성령 모독죄로서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절대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이다. 교회에서 불의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이를 성경적으로 지적하는 성도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나 그 불의를 이런저런 다른 불의함으로 덮고서는 주님의 은혜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교회 목사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선한 지도자를 악하다 하여 설교를 빙자한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것과 악한 지도자를 선하다 하여 그의 악행을 칭송하며 숭배하듯이 추켜 올리는 모든 행태가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그런 목사들은 자기들의 평생의 목회 사역으로 교회에 약간의 유익은 주었을지는 몰라도 정작 자기 구원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헛고생을 햔 것이다. 그런 목사들은 결국 성령께로부터 용서받지 못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울며 불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아무런 분별력없이 단지 자기들의 정치이념에 부합한다고 해서 자기한테 까불면 하나님도 죽인다고 하는 목사와 북한 주민 2천만 명을 하나씩 끌어안고 자살해서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목사를 그저 맹종하는 자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망령되게 일컫는 죄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경을 의도적으로 자의적으로 지속적으로 왜곡해서 가르치는 것도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록자들을 통해서 친히 기록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말씀이므로 누구든지 원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의도대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목사가 자기 목회 상황에 유리한대로 아전인수 격으로 왜곡 해석하는 것은 결국 성령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어서 그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을 하나님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거짓되고 망령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의적인 성경 왜곡은 결국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죄악을 합리화하게 만들게 된다. 교회를 이용해서 세속적인 부귀영화와 권력을 취하려 하고, 세습과 간음을 저지르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뻔뻔한 목사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모든 목사와 신학교수들은 성경을 풀이할 때는 항상 성령 모독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가 잘못 해석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겸허히 정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성령의 빛을 받고 은사를 맛 본 후에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신앙생활의 초반이나 중반이나 말미에나 배교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성령모독 죄에 해당한다. 그런 배교자들은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절대로 얻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회심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나 멸망에 대한 경각심이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하늘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는 참람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교자들은 배교한 이후부터 평생동안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적자가 되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런 배교의 과정은 대체로 긴 기간동안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배교하는 당사자조차 깨닫지 못하고 어느 순간 배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배교자들은 주로 목사와 신학교수들에게서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목회 초중반 사역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그저 교회 자체만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나브로 불의를 행하다가 말미에는 돌이킬 수 없는 배교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신학 초중반에는 오로지 성경의 진리만을 충만하게 탐구하였을지라도 학자와 교수로서의 실적을 위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이념과 사상들을 접하다가 결국에는 진리를 저버리고 성령 없는 인문학 성경학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가 잠시 거하고 있는 사회에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주지 않고 이기적이고 불의한 행태로 사회로부터 비난과 지탄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 또한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다. 우는 자들과 더불어 울지 않고 도리어 웃고 떠들며 조롱하고, 웃는 자들과 더불어 웃지 않고 슬피 울며 악담을 하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짓이다. 세월호에서 3백여 명의 아이들이 학살당했을 때 모든 한국 교회는 그 아이들과 유가족 부모들을 저주하고 비방하고 조롱하였다. 어느 교회도 그들의 억울함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살인마들을 두둔하기에 급급하였다. 오늘날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조심해야 하는 이 때에 오로지 교회만은 자기들의 모임 예배만 중요하게 여겨서 일부러 집단감염의 위험을 자초하여 주변에 해악을 끼치기도 하였다.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 교회가 속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행위만 이기적으로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세상에 복음의 빛도 발하지 않고 복음의 맛도 내지 않고 복음의 향기도 발하지 않는 백해무익하고 무용지물인 한국 교회는 결국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영광만 가리고 먹칠 할 뿐이다. 그런 악한 교회는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성도 중 누군가가 뜻하지 않은 고난이나 환난이나 역경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쭙잖은 성경지식으로 주님께 죄를 지어서 벌받는 것이라고 함부로 정죄하는 것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망령되게 일컫는 죄이다. 욥의 세 친구들의 말들이 그 자체로는 구구절절 맞을지는 몰라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의롭다 인정하신 욥을 함부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먼저 해야 했던 것은 그가 마음을 추스릴 수 있도록 품어주고 참아주는 것이었어야 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앙의 모범도 성령의 열매도 내지 않는 자가 세상에서 갑작스럽게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복을 내리셨다고 속단하는 것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과,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보이는 피조물의 형상으로 칭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힌 하나님은 오로지 성경에 기록 된 그 하나님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십계명 #안식일
8 安息日을 記憶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Remember the Sabbath day, to keep it holy.
Memento ut diem sabbati sanctifices.
Μνήσθητι τὴν ἡμέραν τῶν σαββάτων ἁγιάζειν αὐτήν·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行할 것이나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Sex diebus operaberis, et facies omnia opera tua.
ἓξ ἡμέρας ἐργᾷ καὶ ποιήσεις πάντα τὰ ἔργα σου,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安息日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男종이나 네 女종이나 네 家畜이나 네 門안에 머무는 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JEHOVAH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you, or your son, or your daughter, your male servant, or your female servant, or your livestock, or the sojourner who is within your gates.
Septimo autem die sabbatum JEHOVAH Dei tui est : non facies omne opus in eo, tu, et filius tuus et filia tua, servus tuus et ancilla tua, jumentum tuum, et advena qui est intra portas tuas.
τῇ δὲ ἡμέρᾳ τῇ ἑβδόμῃ σάββατα ΙΕΗΩΟΥΑ τῷ Θεῷ σου· οὐ ποιήσεις ἐν αὐτῇ πᾶν ἔργον, σὺ καὶ ὁ υἱός σου καὶ ἡ θυγάτηρ σου, ὁ παῖς σου καὶ ἡ παιδίσκη σου, ὁ βοῦς σου καὶ τὸ ὑποζύγιόν σου καὶ πᾶν κτῆνός σου, καὶ ὁ προσήλυτος ὁ παροικῶν ἐν σοί.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安息日을 福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For in six days JEHOVAH made heaven and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and rested on the seventh day. Therefore JEHOVAH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
Sex enim diebus fecit JEHOVAH cælum et terram, et mare, et omnia quæ in eis sunt, et requievit in die septimo : idcirco benedixit JEHOVAH diei sabbati, et sanctificavit eum.
ἐν γὰρ ἓξ ἡμέραις ἐποίησεν ΙΕΗΩΟΥΑ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καὶ πάντα τὰ ἐν αὐτοῖς, καὶ κατέπαυσεν τῇ ἡμέρᾳ τῇ ἑβδόμῃ· διὰ τοῦτο εὐλόγησεν ΙΕΗΩΟΥΑ τὴν ἡμέραν τὴν ἑβδόμην καὶ ἡγίασεν αὐτήν.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에 쉬셔서 그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모세의 때에 이 계명이 명시되었을지라도 안식일은 아담부터 지켜온, 율법보다 앞선 계명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거룩한 계명을 훼손하려는 자들은 아담으로부터 모세 전까지는 조상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안식일 계명을 구약시대에만 한정된 의식법으로 치부하어 오늘날에는 폐지된 것인 마냥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거짓 주장을 펼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안식일 계명은 태초부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모든 인간들이 지켜야 할 영원한 도덕법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7일, 즉 토요일이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을 기념하고 유대교의 안식일과 섞이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을 주일로 삼아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례를 행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주류인 안식일을 거부하고 다른 날을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 자체가 사도들을 포함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손실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존 유대문화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에는 일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도리어 안식일에 일하고 주일에 안식함으로써 그만큼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재산상으로나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그 손실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무슨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아님에도 많은 교인들은 자기 편의와 추가적인 유익의 유무에 따라 지키기도 하고 안지키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이 오늘날 보편화 된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에 기인한다. 그리스도 이후 300여년 간 학대와 핍박을 받아온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게 된다. 유대 나라는 일찌기 예수님 이후 60여 년 후에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했으므로 더이상 유대교의 안식일을 고수할 이유가 없어져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로마의 국교로 그리스도교가 지정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준수하는 주일을 로마의 공휴일로 지정하게 되었고 그 로마력이 역사적으로 유럽의 열강들에 의해 세계로 전파됨에 따라 지금은 거의 전 세계가 그 체계를 따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이 마음놓고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이렇게 섭리해 오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어그러짐 없이 기계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1,2,3으로 이뤄진 숫자 6을 소위 완전수라 부르며 6에 기반한 수의 체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이란 숫자는 어떤 규칙도 없고 이렇다할 특징도 없어서 사람의 본성으로는 모난 돌처럼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었다면 굳이 7이란 숫자에 기반한 요일체계를 제정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사람의 본성에 편안한 6이란 숫자에 기반한 체계를 만들어 제정했었을 것이다.
주일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례를 시행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아직 부분적으로만 거룩하기 때문에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의 지배를 함께 받기 때문이다. 이 육신의 연약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성도들과 연대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치가 고정된 건물로서의 교회와 주일이라는 지정된 요일의 공식 예배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원론적인 의미만 갸지고 일정한 장소를 제공하는 건물이라는 교회의 요소를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의 두 요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온전한 교회는 육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와 영혼과 같은 신자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무용론자들과 가나안주의자들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평상시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등 대규모의 국가적 재난 상황시에는 모이는 예배를 제한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 전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초반에는 교회가 굳이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모이는 예배를 강행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이런 행위는 진정한 신앙도 아닐뿐더러 자기의 종교적 만족만을 추구하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과,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위해서 고기 먹을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가르침은 이 코로나 시국 초반의 교회 예배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런 이기적인 교회와는 달리 이웃을 위해서 모여서 예배드릴 권리를 내려놓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이는 분명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온라인 예배는 재난과 같은 한시적 상황에 허용되는 부차적인 방편일 뿐이지 절대로 평상시에도 인정할만한 예배 형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조차 자기 편의대로 합리화하게 되므로 상황이 정상화 되어도 온라인 예배의 편의성을 버리지 못해서 이를 고착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지금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은 정상화 이후에 함께 모이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온라인 예배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를 더불어 고민해야 한다.
개인사업이나 영업에 종사하는 교인들 중에는 주일에도 자기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 자기 편한 시간대의 예배만 잠깐 드리고 사업하러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주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자기 일상을 중단하고 모든 시간을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그런 주일에까지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것은 물질적 유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므로 참되게 주일을 지켰다고 볼 수 없다. 비록 그가 자기 시간에 맞는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그런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온전히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으로 주일에는 자기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배와 이윤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 주일에는 아르바이트 등의 대체 인력을 쓰고 자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교묘한 눈속임 꼼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사업주 신자의 모든 피고용인들에게도 안식할 것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므로 우리는 어쨌건 주일과 이윤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만 참된 신으로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 외의 돈이라는 다른 신을 우상으로 섬길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자녀를 둔 학부모 교인들은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교회보다 자녀의 학업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험기간에는 주일예배보다 주일에 운영하는 학원 및 과외 보강을 보내기도 하고, 중학생 때까지는 교회에 잘 보내다가 고등학생 때부터는 공부 때문에 교회를 보내지 않기도 하며 고3이 되면 교회와 담을 쌓게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녀의 진학에 필요한 경력을 위한 행사가 주일에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주일 대신 그 행사에 보내기도 한다. 태권도 단증 취득을 위해 주일에 있는 국기원 단증 심사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이다. 자녀가 외부의 이름있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단체의 행사에 참여시키기 위해 주일을 빼먹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모든 것은 학부모 교인들이 주일을 거룩한 안식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자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는 세속적인 것들을 신앙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게 하는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의 환심과 관심을 끌기 위해 주일에 예배 이외의 잡다한 이벤트와 행사를 하는 것 또한 주일을 거룩한 안식일로 지키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와 환경과 문화와 상황이 변해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교회학교 행사가 있는 주일에는 교사들은 행사 준비에 신경쓰느라 정작 예배에는 신경을 쓰지도 집중을 하지도 못한다. 아이들은 서둘러 예배가 끝나고 행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을 위한 행사는 주일을 제외한 다른 6일에 해야 하며 주일만큼은 오로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비단 교회학교 뿐만 아니라 주일에 바자회를 열거나 어떤 물건을 매매하거나 하는 것도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다.
교인들이 성도의 교제와 단합을 이유로 주일에 단체로 유흥을 즐기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이다. 그런 모임은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 구성원이 교인인 세상 유희 모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급적 주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와 말씀과 기도모임을 구성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머물러 경건하게 주일을 보낼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야 하며 교인들은 교회의 주일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한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안식일 계명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는 경찰, 군인, 소방직, 의료직 등 공공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이다.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비번인 날이나 시간을 활용해서 꼭 그 일시가 주일이 아니더라도 그 날을 안식일처럼 보내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모임과 예배 환경의 제약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의로운 심령이 상한 롯과 같이 신앙이 상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신자들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급적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직종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대신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노고로 우리가 편안히 예배드릴 수 있음을 알고 저들에게 감사하며 저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전 세계의 날짜와 요일 체계는 주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주일을 쉬는 날로 하는 주 7일제로 확립이 되었으나, 노동과 휴식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계명의 원리를 절묘하게 피해나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6일 동안에는 각자의 일을 힘써서 행하라 하셨으나 세상은 가급적 적게 일하고 많은 소득을 얻으려 한다. 그러다보니 주 6일을 일하던 사람들이 주 1일을 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 5일만 일하고 2일을 쉬기를 바라게 되어 사회 정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주 5일 일하고 2일 쉬는 것에 당연해진 사람들이 주 4일 일하고 3일 쉬는 제도를 원하고 있고 아마도 수 년 내에 이 제도가 정착되게 될 것이다. 덜 일하고 많이 버는 것이 사람들 눈에 좋아보이더라도 이는 분명히 6일 일하고 하루 안식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 풍조에 대응해야 할 성경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마련해야 하는 방안은 물리적이고 육적인 방식으로 사회제도를 막으려 하거나 반대해서는 안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불이익과 피해와 손해를 감수하는 방안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업주 성도는 인건비가 더 들더라도 자원하는 직원들에 한해서 토요일에도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하고,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의 성도는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출근해서 근무하는 신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 이외의 다른 절기는 필요하지 않다. 오늘날 교회가 중요한 절기라고 칭하며 우상숭배 하듯이 지키며 섬기는 성탄절과 부활절 또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미신적인 절기에 불과하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신 날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으셨으나 사람들은 로마신의 축일을 따서 예수님의 성탄일로 제멋대로 지정해 버렸다. 또한 우리는 주일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매주 기뎜하는 것인데 굳이 이방 종교의 봄의 축일을 부활절이라 하여 음란하게 섬긴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날과 부활하신 날을 왜 굳이 이방 종교의 우상을 기념하는 날에 지정하는 것인가.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다른 잡다한 기독교 절기들을 폐지하고 오로지 매주 돌아오는 주일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매주 돌아오는 주일은 우리에게 겉모습은 볼품 없으나 신령한 양식인 만나와도 같다.
나름 주일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은 율법적인 잣대로 삼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과,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와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신적인 생각과, 주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불편과 해를 끼쳐도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성도는 마땅히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 드려야 하나 육신의 연약함과 제약 등으로 인해서 대표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바로 저주와 화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그리스도를 무자비한 신으로 여기고 자기의 공로를 세우려는 잘못된 신앙에 기반한 것이다. 교회에 주차공간이 부족한데도 굳이 자동차를 가져와서 동네 주변에 불법주차를 해놓고서도 예배중이라 차빼달라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거나 예배 끝나고 빼겠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십계명 #부모
12 네 父母를 恭敬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生命이 길리라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that your days may be long in the land that JEHOVAH your God is giving you.
Honora patrem tuum et matrem tuam, ut sis longævus super terram, quam JEHOVAH Deus tuus dabit tibi.
Τίμα τὸν πατέρα σου καὶ τὴν μητέρα, ἵνα εὖ σοι γένηται, καὶ ἵνα μακροχρόνιος γένῃ ἐπὶ τῆς γῆς τῆς ἀγαθῆς ἧς ΙΕΗΩΟΥΑ ὁ Θεός σου δίδωσίν σοι.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가장 행하기 어려운 것이 부모공경이다. 어려서는 부모의 보살핌이 당연한 것이고 장성해서 기운과 능력이 한창일 때는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업적과 성과와 성공은 내가 잘나서 이룬 것이고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는 것은 부모가 못난 탓이다. 매일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면서도 맛있는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상 앞에서 투정 부리기 일쑤다. 발표회나 졸업식이나 군대 면회에 부모님이 못오시기라도 하면 십 수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고 마음의 앙금으로 남는다. 사소한 것으로 빈정이 상하게 되면 수 년 간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지내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자기의 불평과 불만과 원망은 언제나 당연하고 떳떳하다. 나는 구원 받아 천국 가더라도 부모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건 안받건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부모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공경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성도들이 그렇게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모습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어떻게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신자의 완악함을 꺾으셔서 부모를 사랑하게 하고 공경하게 하신다. 그런 하나님의 방법 중의 하나는 신자를 치셔서 연약하게 하시는 것이다. 신자가 자랑으로 삼는 것, 즉 재물이나 건강이나 지위 등을 어느 정도 제거하셔서 신자를 낮아지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신자가 자기 신앙을 되돌아보게 되고 불현듯 그동안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순간 그동안 부모에게 완악했던 신자의 돌과 같이 단단한 심령은 기적처럼 신비하게 살과 같이 부드럽게 되어 부모를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그래서 그 신자는 과거에 투정 부리던 엄마의 밥상을 그리워하고 맛있어하게 되고 발표회나 졸업식이나 군대 면회에 부모가 오지 못했다는 앙금이 사라지게 되며 간섭과 잔소리로만 들리던 부모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된다.
그렇게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부모를 공경하게 되면 내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바뀌게 된다. 부모를 공경하기 전에는 내 이해관계에 따라 살갑게 대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해 왔다면 부모를 공경한 다음부터는 친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으로도 진정으로 대하게 되고 퉁명스럽게 대했던 사람에게는 내 불편한 마음을 억제하고 가능한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전에는 노인들의 굼뜬 행동을 혐오하고 비웃었다면 이제는 그런 노인들을 보면 저절로 도와주려고 나서게 된다. 예전에는 교회 어르신들의 완고함에 혈기로 맞대응 했었다면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내 의견을 표명한다. 설령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도 분노하지 않고 잠잠히 때를 기다리게 된다. 이 모든 인간 관계의 회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부모 공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게 되었다고 해서 이 계명에서 제외되거나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면죄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계시지 않아도 자기 인생에는 얼마든지 많은 윗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없는 사람은 자기와 가까운 웃어른을 부모처럼 여기고 공경하면 된다. 그래서 다른 윗사람들과 아랫사람들과 동년배들에게도 존중과 배려로 대하면 이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조금 맛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 그리스도를 거역한다는 것은 주님보다 내가 더 의롭다고 하는 것이므로 주님이 아닌 나 자신을 다른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육체에 불과한 내가 영이신 하나님보다 뛰어난 신이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1-4계명 전체를 거역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부모에게 패역한 자는 장로들의 판결을 거쳐 백성들이 돌을 던져 죽이도록 했으며,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공양하지 않으려는 고르반 제도를 엄중히 책망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신자라 하면서 자기 집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였다.
#진화론
이런 부모의 자기 헌신적인 자녀 사랑은 진화론 따위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진화론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부모의 자녀 사랑은 종족을 유지하는데 불필요하거나 방해되는 잉여 감정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녀에 대한 헌신이나 자녀를 잃었을 때의 고통과 슬픔은 도리어 부모의 생명을 깎아먹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론적으로는 부모의 자녀 사랑이라는 감정이 점점 더 배제되어야만 타당하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동서금을 막론하고 부모의 자녀 사랑이라는 감정이 배제된 적은 없다. 이 감정은 단순히 자녀를 낳아 기르는데 따르는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라고도 볼 수 없다. 심각한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 자녀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전재산과 모든 일상을 바치고 빚까지 질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사랑을 과연 진화론 따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녀교육
한편 그리스도인 부모는 보편적으로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자녀 사랑의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물론 보편적인 부모의 자녀 사랑도 인간에게 있어 가장 숭고한 사랑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렇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육적인 인간의 사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된 심령을 가진 그리스도인 부모는 육적인 사랑의 수준에 그치지 말고 그 사랑의 기원과 소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자녀를 부모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기신 존재라고 여기며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신자라 하더라도 쟈녀 양육에 있어서는 다른 부모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세상의 가치만을 바라보며 키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앙의 가치는 저버리게 된다. 그런 교인 부모는 형식적으로는 자녀들을 매주 교회에 데려오고 신앙 교육을 시키는 것처럼 보여도 자녀에게 학교 시험이나 이름있는 외부 기관 행사 등이 생기게 되면 주일 정도는 가볍게 패스하게 한다. 그런 타협적인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면서 하나님께는 자녀들이 바른 신앙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 교인 부모에게서 자라난 자녀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통상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부모의 타협하는 신앙을 물려받게 된다. 그런 자녀들이 결국 교회와 신앙을 떠나게 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녀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있는 것이다.
#장애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 또는 질병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자녀를 낳은 부모는 백이면 백 그 자녀를 포기하지도 유기하지도 않고 하루라도 더 그 아이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전 재산과 부모 자신의 일생을 허비하기도 한다. 재산이 떨어지면 무리하게 빚을 내기도 하고 자녀를 돌보느라 부모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도 괘념치 않는다. 통상적인 부모는 자녀들이 자기들보다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모보다 일찍 죽은 자녀는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장애와 질병이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소원은 자녀들보다 단 하루를 더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먼저 죽으면 그 자녀가 누구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슴에 묻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런 소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장애와 질병을 가진 자녀를 둔 신자 부모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는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나 형벌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그 부모라면 이 자녀는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자녀를 돌보고 키우는 것은 재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그런 고통을 부모에게 주시면서까지 장애/질병 자녀를 맡기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인정 받고 있다는 것이며 반드시 그 고통에 대한 상급을 후하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자 부모의 자녀가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녀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 인정되므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귀한 진주와 보화와 같은 한 영혼을 전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추후 상급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유아세례
성도 부모들의 어린 자녀에게 시행하는 유아세례는 물론 성경에 명시되지는 않았더라도 중세 시대 신앙개혁과 더불어 신학적으로 충분히 타당성 있게 정립되었다. 유아세례에 대한 성경의 근거야 그렇다 쳐도 어찌해서 신앙개혁 시절에서야 정립될 필요가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오늘날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유아 사망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신앙개혁의 모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칭함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인데, 성도 부모의 어려서 죽은 유아들에 대해서는 이 보편 진리를 적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유아들은 전부 구원을 받거나 못받거나일 것인데, 후자라고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이나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후자일 경우 성도 부모들은 어려서 자녀를 잃은 슬픔과 더불어 그 자녀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신앙개혁가들은 그런 성도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타당하므로 그들의 어려서 죽은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과 언약에 의거하여 주님의 백성에 포함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답정너처럼 억지로 끼워맞추는 교리가 아니라 철저히 성경에 기반한 교리이다. 아마도 당시의 많은 성도 부모들은 어려서 자녀를 잃는 육적인 슬픔 가운데서도 이 유아세례 교리로 말미암아 그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을 것이라는 소망과 위로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영아 사망률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유아세례를 주더라도 부모에게 그런 엄숙한 의미를 교육하지는 않고 부모들도 그저 하나의 의례적인 절차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교회와 부모와 자녀를 위해서라도 유아세례의 참되고 엄숙한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 공경에 대한 최대 난제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지 않거나 부당하게 차별하거나 심지어 학대하는 부모에게 과연 성도인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일것이다. 원론적으로나 이상적으로는 그런 패역한 부모에게라도 공경을 하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리 성도라 하더라도 여전히 불완전한 가운데 있고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당한 온갖 부당한 대우 때문에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부모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신앙으로 원수와 같은 부모를 용서한 성도들의 사례를 가급적 많이 수집해서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20211005
#신명기 #Deuteronomy 33:1-2
모세의 축복
1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신명기를 기록한 이스라엘의 수령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극존칭을 써서 부른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수령들이 제아무리 이스라엘 중에서 탁월한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세에 비하면 자기들은 조족지혈에 불과하고 스스로를 모세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자들로 여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수령들의 모세에 대한 존경심은 단지 인간적인 관계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기반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수령들은 모세가 유언처럼 남긴 말씀들을 그저 죽음을 앞둔 존경하는 어른의 덕담 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그 말씀들이 전부 토씨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모세의 유언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선한 마음은 여호와의 영께서 그들 각자에게 은밀히 불러 일으키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보다 앞선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글들을 어떻게든 보존하고 번역하며 가르치려 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단지 그 신앙의 위인들을 인간적으로 존경하는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남겼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 위인들을 보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존경은 자칫하면 교묘한 우상숭배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신앙의 위인들이 남긴 수많은 가르침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세는 여호와께로부터 가나안 땅에는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고 산에 올라가 죽을 준비를 하라는 냉엄한 명령을 받았어도 여호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고 도리어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축복을 내린다.
2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모세는 주 여호와께서 얼마나 크고 광대하신지를 고백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여러 산들에서 흑운과 폭풍과 번개 등으로 나타나신 것을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애굽을 빠져나온 광야의 이스라엘은 20세 이상의 장정들만 60만 여 명이었으므로 전체 인원은 2백 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나 그 대규모의 인원 중에서 여호와를 참되게 믿는 성도는 1만 여 명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강림하셨다고 하지 않고 단지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다고 고백한 것 같다. 물론 여호와의 강림하심은 일만 성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목격했을 것이지만 성도들은 자기들의 육신의 눈으로 목격한 것을 통해서 영으로도 여호와를 목격하였던 반면에, 나머지 백성들은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목격했을 뿐이었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심령이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자들은 자기들을 두렵게 하는 어떤 소리만 들었을 뿐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던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사람이나 저사람이나 구분하지 않고 육신의 귀에 들리고 눈에 읽혀지더라도 오로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복음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과도 같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길가에서는 새들에게 먹히고 돌밭에서는 뿌리가 타들어가며 가시덤불에서는 더 자라지 못하는 반면에 좋은 땅에서는 수십배의 결실을 맺는 것과 같다. 같은 복음과 같은 성령을 받아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혼이 가난하고 미적지근해지는 반면에 서머나/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것으로도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다.
2백만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와의 성도가 단 1만 명이라는 것은 그만큼 외적으로는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넘쳐나더라도 정작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이 얼마나 극소수인가를 드러내준다. 열 개 지파로 구성된 북 이스라엘의 아합 시대에는 엘리야를 포함한 단 7천여 명만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여호와를 섬겼을 뿐이었다. 유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시대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비천한 백성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자기들의 죄악으로 바벨론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였었다. 산술적으로만 따진다고 하면 오늘날 전체 한국 교회들중에서 단 5리 정도만 서머나/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고 나머지 9할 9푼 5리의 교회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질 사탄의 회당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전체 기독교인들 중에서 단지 5리의 신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흰 옷을 입고 걸을 자격이 있는 참된 성도들이며 나머지 9할 9푼 5리의 교인들은 주님께로부터 알지 못한다는 정죄를 받아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울며 불며 이를 갈게 될 가라지 및 쭉정이 신자들에 불과하다. 2백명 정도 되는 교회에서는 구원받을만한 성도가 단 한 명에 불과하고 그 밑으로는 아예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는 교인들 99.5%가 지옥에 떨어진다는 무시무시한 증거이다.
여호와께서 일만 성도들을 위해 오른손에 드신 번쩍이는 불은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성령으로도 볼 수 있고 그들을 지키시는 구원의 모든 섭리와 방편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성도들에게 성경과 성령을 주셔서 그들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한편, 성도들이 중생한 이후에 복음과 성령을 따라 살면서 당하게 되는 온갖 환난과 핍박과 고난들을 견고히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도록 모든 상황을 섭리하신다. 반면에 성도 이외의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단호하게 정죄하시고 교회와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이 땅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엄정한 공의로 징벌하시고 심판하신다. 교회와 성도들을 멸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결집한 붉은 용의 군대는 하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진멸되고 교회와 성도들은 이로 인해 보살핌을 받는다. 하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른손에 들고 계신 쇠몽둥이는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대적자들을 쳐부수는 용도로 쓰인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오른손에 들고 계신 번쩍이는 전신갑주의 형태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조금 나눠주셔서 우리가 세상에서 성경과 성령으로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 이기도록 하셨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전신갑주는 처음에는 볼품없고 미약해 보여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강력하고 튼튼하게 발달되는 것이므로 이를 얼마나 갈고 닦느냐는 오로지 성도들에게 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