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
(시 39:5,6)
1. 들어가는 말
1) 인생은 풀과 같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어도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곧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가나이다.』(시 90:10)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기술하신 하나님! 옳은 말씀이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이면서 왜 그렇게 바둥대며 살았는지 후회되는 것이 우리네다. 이제라도 말씀 듣고 말씀을 믿고 영생을 얻어 영원히 사는 길을 모색해야 옳지 않을까?!
이어서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 같나이다.』(시 90:4)는 우리를 시편 84:10과 베드로후서 3:8로 바로 돌려놓는다. 이번에 『천 년』은 하루(『어제』)에 비교될 뿐만 아니라 또한 『밤의 한 경점』에 비교되고 있다(4절). 신약에서는 밤을 네 경점으로 구분하지만, 구약에서 유대인은 밤을 세 경점으로 구분했다(판 7:19, 막 6:48).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를 각각이 천 년인 네 경점으로, 신약 시대를 각각이 천 년인 세 경점으로 구성해놓으신다. 그 구절은 문자 그대로 취급해야 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로 쓸어가시나니... 풀처럼 되나이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세 가지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욥기에서 이와 동일한 주제를 열두 가지로 설명한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욥기>).
1. 인생은 잠과 같다(『사람이 깨어났을 때의 꿈과 같이』, (시 73:20). 여러분은 눕고 그 다음 일어난다. 여러분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제로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아홉 시간을 자도 방금 누웠던 것처럼 느끼며, 또 때로는 삼십 분만 잠들어도 상쾌해진다.
2. 인생은 홍수와 같다. 창세기 6장은 문자적인 실례가 되지만, 여기서 그 의미는 사람이 기반을 닦기도 전에 발판을 잃고 쓸려가 죽는다는 것이다.
3. 인생은 풀과 같다. 시몬 베드로와 이사야도 그렇게 말했다(벧전 1:24, 사 40:6). 『풀은 아침에 피어나... 저녁에는 꺾이고 마르나니』(시 90:6).
2) 『헛되도다(vanity, “헛됨”)』
『전도자가 말하노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킹제임스성경>의 『헛되도다』라는 말은 두 가지 것을 나타낸다. 첫째로는 쓸모 없고 무익한 것을 나타내며, 둘째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딤후 3:1-2), 즉 “허영심”과 관련된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위해 행한 일들은 시체를 위해 한 일들이므로(골 3:3)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다 타버릴 것이다(고전 3장). 경험으로 얻은 법칙이 있는데, 바로 1611년에서 1982년까지 <킹제임스성경>의 모든 판본은 기독대학의 모든 교수들과 졸업자들이 추천한 온갖 현대 역본의 모든 판본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NASV와 비교하여 그러하다.
2절은 솔로몬이 다루게 될 첫 번째 철학을 알리는 신호다. 그것은 바로 “비관론”이다(숙명론은 나중에 이 장 15절에서 나타날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고 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라면(시 39:5), 최대한 비관적이 된 것이다. 현대의 설교자들 모두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의 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로버트 슐러는 자기가 사역자로서 성공한(1천만 달러를 버는 사역을 하게 된) 비결이 그저, 자기 메시지 속에 “죄인”이나 “죄인들”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슐러는, 돈을 긁어들이는 비결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좋게 여기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딤후 3:1-2). 그렇다. 바로 로마서 1,2,3장, 데살로니가후서 1,2장, 스파냐 3장, 이사야 41-48장, 예레미야 23장, 마태복음 23장, 요한복음 8장, 디모데후서 3장, 디모데전서 4장, 유다서, 베드로후서 2장, 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17장, 시편 52편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부정하기만 하면 “형편이 좋아질” 거라는 얘기다. 유다가 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거금을 모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연방 학교제도에 속한 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텔레비전 시청자들과 모든 라디오 청취자들에게도 그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4가지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1. 물질은 영원하다.
2. 인류는 우연히 자연발생했다.
3. 새로운 출생을 하거나, 또는 심판하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4. 모든 세계 종교에 순응할 수 있는 “중성 신”만이 있다.
2. 전개되는 말
시 39:5-6,
【 5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사람마다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다니며 진실로 그들이 헛되이 분주하니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가질지 알지 못하나이다.】(킹제임스성경)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은 그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에 있더라도 여전히 완전하게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럼 성경 말씀을 보면서 살펴보자!
1. 구령자였던 바울 (롬 7:18).
그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올바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은 그의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바울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롬 7:18)
1)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18절).
바울은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주의를 요한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도 들어와 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곧 내 육신 안에는,)』 하고 즉시 부연 설명을 달아 놓는 주의를 잊지 않는다.
『내 안에』. 나의 어떤 안에 말인가? 『곧 내 육신 안에』. 옳지!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죄가 바로 당신의 육신 안에 거하고 있다. 죄는 당신 자신이 아니지만, 당신의 『육신 안에』 거하면서 거기서 활동하며 당신의 육신을 관장하고 있다. 그런즉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은 거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그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존재다. 이것이 성경의 인간관이다. 『내 안에 (곧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이것은 인간의 육신이 단지 “좋지 않다.”는 평가를 넘어서 인간의 육신 안에 선한 요소라고는 단 한 가지도 들어 있지 않다고 보는 전면적 인간 부정이다. 인간에 대하여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성경의 인간관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육신에 대하여, 그러한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성경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으니 긍정적으로 볼래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육신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죄뿐이다. 그 육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런 육신을 지닌 인간을 도저히 긍정적으로 대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대인관(對人觀)이다.
2)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의지는 분명 나에게 있다.
“그러나,” 이 “그러나”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기 원하지만, 당신의 육신 속에 들어 있는 죄는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갈팡질팡할 뿐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마 26:41). 당신 속에는 이처럼 갈등하는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진짜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당신이다. 세상 사람들은 가짜 당신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가르치고 진짜 당신을 무시하도록 유도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여기에 속지 말라. 어떻게 하면 속지 않는가?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주님께서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같은 절에서 무어라고 명령하시는지를 잘 들어 보라.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 26:41).
2. 의를 전파했던 노아 (창 6:8).
1) "주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더라. 9 이것이 노아의 내력이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6:8-9)
노아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은혜다. 모든 은혜를 십자가와 연관시킬 수는 없다. 9절의 "완전함"(온전함)도 죄없는 상태의 완벽함은 아니다. 이 경우는 악한 세상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개념이다.
2)계 22: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
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고린도후서에 기록해 놓았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고후 8:9).
그래서 성경은 이 위대하고 최종적인 마지막 경고로 끝을 맺는다. 이 경고는 여러분이 이 하늘의 도성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여러분이 값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것을 소유하셨고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 영원한 영광을 누리실 만큼,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내려오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저주와 미움 가운데 이 땅을 거니셨다가, 여러분의 위치에서 범죄자가 당하는 죽음을 맛보셨기에, “여러분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해 부요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헤른후투에서는, 야경꾼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밤중에 매시간마다 “고함”을 질렀다(1933년까지). 야경꾼들은 마르틴 루터 시대부터 이 외침을 전송해 왔다. 그 외침은 다음과 같다.
“형제 여러분, 한밤중에 자정을 알리는 허밍 소리를 들으시오. 우리의 위대한 신랑이 오신다오”. 한 시경, “한 시가 지났으니, 날이 어두움 속에서 밝는다오, 샛별이 나타나니 우리의 완악함을 버립시다.” 두 시경, “두 시라오, 예수님은 이 고요한 계절에 기다리신다오, 형제들이여, 의지와 이성 두 개를 속히 복종시키시오.”
세 시경 “세 시를 알리오, 축복된 셋은 몸과 혼과 영으로부터 최고의 찬양을 받을지라.” 네 시경, “네 시가 되었소, 셋이 간구하여 주께서 그 시기의 네 번째에 오시라고 하는 때요.” 다섯 시경, “다섯 시를 알리오, 결혼 예복을 입은 다섯 처녀가 보상받았을 때 다섯은 버림받았다오.” 여섯 시경, “여섯 시를 알리오, 나의 위치를 떠나리라. 자,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깨어 있으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이렇게 하나님의 권위가 담긴 “거룩한 성경”이 끝난다.
3. 다니엘은 왕을 책망하고 나서 신성모독 죄를 범하게 한다 (단 2:46).
『느부캇넷살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경배하고, 그들로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바치도록 명령하더라』(46절).
1) 느부캇넷살은 다니엘의 예언을 듣고 어찌나 놀라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지 얼
른 『엎드려... 경배』한다.
그는 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티칸의 교황보다도 얼른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느부캇넷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금방 깨달을 줄 알았고, 그 말씀 앞에 허리를 굽힐 줄 알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한 게 아니라 『다니엘에게 경배』했지만 말이다.
그는 또 『예물과 향품』을 다니엘에게 바쳤다. 이에 대해 다니엘이 어떻게 했는가? 자기 발 앞에 엎드린 왕을 내버려두었고 선물로 주는 예물과 향품도 넙죽 받았다.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49절을 보면 『다니엘은 왕의 문에 앉았더라.』고 말씀한다. 그 『왕』이 누구인가? 꿈에서 본 형상의 “금 머리”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것을 알고 있는 다니엘이었으면서도, 그는 그 『왕의 문에』 서슴없이 앉았다.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빌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했을 때(49절) 다니엘은 어떻게 했던가? 아무 소리 말고 받아들이도록 했다.
실은 이것을 청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다니엘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다니엘이 그만 시험에 걸려 넘어진 경우다.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태도였고 죄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자칫 하는 사이에 죄를 범하게 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라고 바울이 역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롬 3:23).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어떻게 다루셨던가?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곤욕을 치르게 하셨다(6:16). 물론 그는 사자 굴에서 나왔지만, 어쨌든 거기에 들어가 죽을 뻔하는 끔찍한 고난을 당하게 만드셨던 것이다.
2)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떤 훌륭한 인물도 한 가지 이상의 흠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요셉을 보라. 그는 실로 위대한 혼을 지녔던 인물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은잔”으로 사람을 속였고 “돈”으로 형제들을 속였다(창 44:1,2). 의도가 무엇이었건, 속인 것은 속인 것이었다. 노아는 또 어떤가? 그는 술에 취하는 바람에 죄를 범했다. 다윗은 어떤가? 간음했고 또 살인했다. 모세는 어떤가? 울화를 참지 못했다. 바울은 또 어떤가? 성령의 명령을 네 번이나 무시하고 예루살렘 행을 강행했다. 시몬 베드로는 어떤가? 맹세를 저버리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스테판은 또 어떠했던가? 나는 스테판이야말로 지상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죽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했고, 그런 다음에야 원수를 위해 기도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실 때, 그분께서는 누구를 위해 먼저 기도하셨던가? 원수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다. 이처럼 이 지구상에 나타났던 사람들 가운데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니엘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요셉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나서 자기의 잔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창
44:5)
【1 요셉이 자기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자루를 그들이 가지고 갈 만큼 양식으로 가득 채우고 각인의 돈도 각자의 자루 아구에 넣고 2 또 내 잔, 즉 내 은잔을 가장 어린 자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의 곡식값도 넣으라.” 하니, 그가 요셉이 지시한 말대로 행하더라.
3 아침이 밝자마자 그 사람들을 보냈으니, 그들과 그들의 나귀들이라. 4 그들이 성읍을 떠났으나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요셉이 그의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일어나 그 사람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따라잡으면 그들에게 말하되 ‘어찌하여 너희가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마시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참으로 그가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행하므로 악을 행하였도다.’ 하라.” 하더라. 6 그가 그들을 따라잡고 그들에게 그대로 말하니라.】(창 44:1-6)
1) 식사는 끝났다. 요셉은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뒤 방안으로 들어가서 청지기를
불러 『이 사람들의 자루를... 가득 채우고... 돈도... 넣고... 내 은잔을... 넣고
그의 곡식값도 넣으라』고 지시했다(창 44:1,2).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면서 형제들이 질투하는가를 이미 시험한 바 있었다. 그들은 과거에 자기에 대해 질투했음으로 요셉은 베냐민에 대해서는 어떤가를 알아보려고 “그들의 마음을 살폈고 영들을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요셉의 형들은 질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한 가지 교훈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도덕적 개선”은 구원이 아니다(딛 3:5을 볼 것). 수많은 죄인들이 그들이 몇 가지 교훈을 얻었거나 아니면 “늘 하던 짓들”을 그만 두었다는 사실이 자신들이 회심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개혁일 뿐(reformation)회심(conversion)이 아니다(마 12:33,34,35을 볼 것).
자, 이제 열 한 명의 형제들은 영적으로 기쁨에 차 있는 순간이다. 그들은 도둑으로 몰리지도 않았고, 좋은 식사를 대접받았으며, 자기 나귀들도 여물을 다 먹었고(창 43:24), 얻고자 하는 식량도 얻었으며 게다가 시므온과 베냐민까지 되찾게 되었다.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옳은 일은 대가를 돌려 받는다.” “정직이 최상의 방책이다.” “다른 사람이 네게 행하기를 원하는 대로 행하라.” 이 밖에도 여러 가지의 위조품 구원 계획들을 신뢰하면서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카인의 모델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창 4:1-5).
2) 요셉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놓았다. 만약 요셉의 형제들이 출발 전
에 자루를 살펴보았더라면 이런 불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3:34의 정중한 대접과 창세기 43:29의 축복을 해 준 그런 총독이 그처럼 사악한 계획을 세우리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만 여 개의 “평화 메달”을 수여하고 온갖 그럴싸한 평화 메시지를 난발해 온 “그리스도의 대리자”(교황)께서 어떻게 전세계의 모든 정부들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음모를 꾸밀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하려고 들지 않는 반면, 성경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의심을 하려고 한다.
“은잔”은 어쩌면 단순한 컵(5절)이 아니라 커다란 트로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단순히 마시기 위한 컵일 뿐 아니라 미래를 점치는 데에 쓰이는 도구였다. 점친다는 것(5절)은 사도행전 16:16과 사무엘상 28:8의 점을 치는 것과 예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점치는 풍습은 전세계 모든 민족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내려오는 풍습이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여전히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손금을 본다던가, 골상학(관상학), 점성술, 강령술, 운수보기 등등을 여전히 실행하고 있다. 본 주석의 저자는 이런 점치는 법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이들 모두가 미래를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A.D. 3000년 넘어서까지 발전을 거듭할 것이며 결국 “이 땅에는 화평”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그 뒤에는 단 하나의 “영”이 숨어 있다(계 21,22장 ). 이 영은 결코 성령이 아니다.
3)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빚어 가고” 있다. 그들은 결코 선을 악으로 갚은 적이
없다(4절). 그들은 또한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다(5절). 요셉의 청지기의 추
궁에 그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7절).
이번에는 요셉의 형제들은 단지 매우 화가 났을 뿐 아니라 심히 놀랐고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올바로 행했다(요셉처럼!) 그런데 그들은 거짓 고소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요셉처럼!). 그들은 이제 체포당해야 한다(요셉처럼!). 그것도 그들이 행하지 않은 어떤 일 때문이다(요셉처럼!). 어쩌면 죄인은 여러 가지 범죄와 죄악에 있어 무죄할 수도 있고 여러 경우에 거짓 고소를 당하는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요셉이기 때문이다(마 27:22을 볼 것). 아무리 정결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의롭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정직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양심과, 율법의 증거와 그리고 성령의 증거에 의해 죄인인 것이다(롬 1,2,3장, 요 16:8-11을 볼 것). 이와 같은 이유로 죄인은 늘상 자기의 좋은 점만을 지적하는 것이다(이것을 보통 적극적인 접근방식이라고 부른다). 죄인은 자신의 생애와 성품에 있어 두드러진 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들지 않는다. 즉 죄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여 자신의 의(그의 종교적 선행들)를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죄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것은 여간해서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라 보편적인 법칙이다).
4) 『어떻게 우리가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리이까?』(8절). 물
론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40:15을 보라 요셉도 그랬지 않은가?
“죄가 없다는 선행자”들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9절).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난 후이다. “현대인”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롬 1:32은 심리적인 농간에 대한 멋진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은 창세기 44:10과 창세기 44:12에서 죄의 인식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죄로 죽을 것이다”(10절, 겔 18:14-24).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12절, 렘 17:10, 롬 8:27). 요셉의 형제들은 전혀 소망없는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들은(모든 죄인들처럼) 그들 스스로의 말에 의해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10절).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이다(마 12:37, 눅 19:22). 모든 죄인은 무의식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경우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되면 자기 자신이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눈 앞에서 자기를 정죄하게 되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특히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잘 나타난다(마 21:26,27). “관용”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간과해 줌”과 같은 표현들은 실은 죄 자체를 정당화시키려는 욕망일 뿐이다.
4) 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서 옷을 찢고 마음이 부서지고 정신을 가다듬지 못한 채로 헬리오 폴리스로 돌아갔다. 자,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눅 15:14-17을 볼 것). 이제 그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된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요셉의 형제들은 이제 하늘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반대로 나타나는 식으로 사건을 배열하신 사실이 너무도 놀랍지 않은가?(사 55:5-10). 인간이 “드디어 해냈다! 우리는 발전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인간이 “나는 망했다. 나는 잃어버린 바 되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내가 보살피리니, 곧 영이 가난하고 통회하고 내 말에 떠는 자라... 하나님의 희생제들은 상한 영이니,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상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사 45:22; 66:2, 시 51:17).
이집트 땅에서 열 한 명의 젊은이가 모든 “종교적 의식”과 “경건한 종교”와 “황금률”을 다 실행해 보았으나 결국 다시 돌이켜 요셉을 만나 그들의 죄에 대해 설명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롬 14:12).
5.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는 믿음을 부인하기도 했다(갈 2:11)
1) 『그러나 베드로가 안티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갈 2:11)
11절은 사도행전 15:35에서 일어난 것이다. 구원과 관련된 행위의 문제는 사도행전 15:35 이전에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로마 카톨릭, 그리스도의 교회, 제 칠일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불교, 도교, 유교, 감독교회, 감리교, 진화론, 공산주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다. 이제 또다른 질문이 생기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는 어떠한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티옥에 왔을 때...』(11절). 예루살렘 회의가 있기 몇 년 전에 이미 안티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행 11:26). 더욱이 그들은 회의가 있기 전부터 가르치고 예언했으며(행 11:28), 이방인들 가운데 사역을 개척하는 경험도 가졌다(행 13,14장). 성경적인 기독교의 중심 도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옥이다.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11절). 바울이 “사도들의 왕자”를 바로잡고 있으며, 분명한 말들로 그를 책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말이다. 첫 번째 “교황”(카톨릭 신자들이 주장하는)은 말을 실수했을 뿐 아니라(행 10:14), 영적 판단(마 16:22)도 실수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으며(마 26:74), 여기서도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 이단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베드로의 계승자로 자처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분명히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행히 총각으로 사도적인 계승은 베드로가 아닌 바울에게로 이어졌다. 시몬 베드로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려면 우선 그의 가족 전체가 할례받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전 9:5).
2) 행15:35, 바울과 바나바도 안티옥에 머물면서 많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전파하니라.
안티옥에는 “많은 선생들”이 있었다(행 15:35). 그러므로 신약성경 번역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찾아볼 때 이곳을 살펴봐야 한다. 안티옥은 “선교사들”과 “성경 교사들”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이 바로 성경이 강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배교자들(바이스, 웬트, 네슬, 홀츠만, 그리스바흐, 라흐만, 스트라우스, 티쉔돌프, 샤프, 메츠거, 루켄)이나 영국의 배교자들(산데이, 홀트, 라잇풋, 엘리코트, 웨스트코트, 노울링, 렌돌, 워즈워드, 스펜스, 데이빗슨)이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강조이다. 그들은 기독교 학자계가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권위이며,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해서 로마를 통해 뉴욕, 런던, 시카고로 갔으며 베를린과 하이델베르그를 거쳐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사가 제시하는 증거는 전혀 다르다. 참된 “성경 교육”이나 참된 “말씀의 전파”가 그러한 곳들을 근거지로 해서 나왔다는 증거는 성경이나 교회사에 없다. 안티옥은 신약 기독교의 “근거지”이다. 안티옥에는 『주의 말씀』(35절)과 “많은” 교사들(35절)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나 로마가 『주의 말씀』을 가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안티옥에서부터 얻어진 것이며, 로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안티옥(시리안) 계열의 헬라어 원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1881년(RV)과 1901년(ASV), 1952년(RSV), 1963년(NASV), 1973년(NRSV) 위원회들은 완전히 거부했다.
34절을 로크만 재단과 밥존스대학 교수진은 성경에서 완전히 말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구절은 ASV, NASV에도 빠져 있다. 극도로 변개된 대문자 필사본 B와 알렙에도 빠져 있다. 그러나 왈덴스들의 구라틴 역본과 D(서방계열), C(알렉산드리아 계열), 시리아와 비잔틴 계열 사본들(안티옥 계열)에는 그 구절이 들어 있다.
예루살렘 회의 이후에 베드로가 안티옥으로 오고(33,35절), 바로 이 시점에서 갈라디아서 2:11-21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5장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F.F. 브루스, Ibid., p. 300 참조). 브루스는 그것이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6. 모든 교황은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이단적이고, 성경을 왜곡하고, 하나님
을 모독하고, 세가지언약을 어기는(창9:4, 레 17:14, 행 15:20) 행동을 한
다.
1)『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과 더불어, 즉 그 피째 먹지 말지니라.』(창 9:4)
그러나 카톨릭은 매 주 미사를 보면서 정말, 예수의 피를 먹는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바로 비성경적일 수 밖에 없다.
㉠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이 구절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즉 그분을 믿으면, 그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시는 것처럼 당신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은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부이시고 아버지 하나님 역시 그분의 일부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부분이시고 아버지 하나님 역시 그리스도의 일부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죽으시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안에 거하시게 되고, 당신은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이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진짜 죽는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육신적인 요소가 개입할 틈이 전혀 없다. 당신이 구원받고 얻은 영생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적인 생명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너희 조상이 만나를 먹고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시니라』(58절).
이스라엘 조상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물질적인 음식이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영적인 것이었다. 물질적인 음식인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의 조상은 육신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은 다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인 음식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 영적인 음식은 영적인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음식은 죽음으로 마감하지만, 영적인 음식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인 음식으로 먹지 않고 물질적인 음식으로 먹는 자들은 모두 죽음으로 마감하게 된다. (먹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뜻이다)
2) 레 17:14『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요, 육체의 피는 그 생명을 위해 있
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종류
의 육체의 피도 먹지 말라 하였도다. 이는 모든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니,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17:14 이 영감은 말씀이 로마카톨릭의 경배에 가하는 엄청난 충격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에 참여하는 척함으로써(요 6:57-63). 로마 카톨릭과 그 모든구성원들은 성경의 "새 언약" 을 어겼다. 즉 그들은 율법 이전의 은혜 아래에서 어떤 종류의 '실제적인 피'에도 참여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창 9:4-6). 그들은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다시' 그 말씀을 들었다(이곳). 도 그들은 부활 이후 신약에서 다시 그것에 관한 경고를 들었다. 신약에서는 사람들이 행위드 없이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래도 피가 들어 있는 것은 '어떤 것' 도 먹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사도들과 장로들과 성령의 판단이었다(행 15:20,22-23, 28-29). 따라서 미사는 '새 언약하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 적인 모독이다. 이 계획적이고 극악 무도한 - 창세기에서 사도행전까지 모든 것을 범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은 잘차 이 사람들이 '물' 대신 '피' 를 마실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것이다(계 16:3-6).
7. 그리스도로 인해 죽는 스테판은 자기를 위해 먼저 기도한다(행 7:59-60) !
주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먼저 기억하셨
다.(눅 23:34,46)
【 59 그들이 스테판을 돌로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말하기를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이 말을 하고 잠드니라.】(행 7:59-60)
1) 『이 말을 하고 잠드니라』(60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한다(요 11:13, 고전 15:20, 살전 4:14을 볼 것). 잠자는 것은 ‘몸’이다(창 35:18).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죽기 전에 그의 몸을 떠난 것처럼(요 19:30) 스테판의 영도 분명히 떠났기 때문이다(행 7:59). 러셀 목사와 러더포드 판사가 “혼이 잠잔다”고 말하는 것은 마태복음 25:41을 문자 그대로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제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충만했던 위대한 스테판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벧전 2:21) 스테판은 선으로 악을 극복하기는 한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러나 이 기도는 자기 보존의 기도인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 다음에 왔다. 하지만 주님은 원수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그 다음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
2) 4피트 높이의 돌무더기에 파묻혀 그는 사라져 간다.
15-20분 동안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일제사격을 참아 내면서. 이 “소일거리”에 사용된 돌들은 골프공만한 크기에서부터 배구공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수 7:25).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바울이나(행 14:19) 예수님을(요 8:59)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는 그들이었다면, 스테판을 그렇게 죽이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출처]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