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9월의 하순을 달리는 길목,
늦은 밤시간엔 혹시 <가을 소리>가 들리는가 해서 인간사의 상념을 내려 놓고
거실 불을 끄고, 커피 한잔 들고서 가까이 창을 열고 캄캄한 밤하늘 밖을 내다 봤다.
무언가 가을 바람은 스치고 가을 냄새는 약간 나는데, 지나가는 차량소리뿐
그 어디에서도 <가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늘 오후, <가을 소리>에 대한 강한 욕구가 느닷없이 발동되어,
에라~모르겠다 만사를 제쳐 놓고, 교통혼잡으로 멀리 갈 수는 없어, 집에서
그리 멀잖은 용인 에버랜드 부근의 호암미술관과 부근 호수를 찾았다.
그러나 그곳 가는 길을 따라, 산속, 숲 속, 나무, 높은 하늘, 맑은 공기,
스산한 계절의 흐름을 보니, 서서히 가을이 익어가는 분위기는 있으나,
내가 듣고 싶어하는 <가을 소리>는 들리지 아니했다.
그런데, 호암미술관에 들려, 오랜만에 고미술과 도자기(청자,백자,분청)를 감상하는데,
한쪽 벽면에 있는 어느 고미술 앞에서 깊디 깊은 <가을 소리>를 듣게 되었다.
다름아닌, 단원(檀園) 김홍도의 가장 늦은 나이의 작품인, 추성부도(秋聲賦圖)이다.
그 그림과 그림 속의 글(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詩를 단원이 직접 씀) 제목도
추성부 秋聲賦(가을 소리)인 詩를 짧은 한문실력을 총동원하여 대충 뜻이나 읽으며,
단원이 그린 그림 속의 글 작가인 구양수와 동자(童子)와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30여분 꼼짝 않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가 61세에 그린 "추성부도"는 죽기 얼마 전에 그린 가장 늦은 작품으로,
"추성부"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1007~1072)가 쓴 글로, 가을 밤에 책을 읽다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며 자연의 연속성과
인간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詩)이다. 화면은 어두웠고 갈필(渴筆)의 거친 붓질로
가을 밤의 스산한 분위기를 실감 있게 표현했다.
집안에 구양수가 있고, 하늘을 향해 가리키는 동자의 몸짓을 통해, 이 장면의 시를 풀어보면,
秋聲賦(추성부)---가을 소리
歐陽脩(구양수1007~1072)/宋
歐陽子方夜讀書(구양자방야독서)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聞有聲自西南來者(문유성자서남래자)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悚然而聽之(송연이청지) 섬칫하여 이를 듣다가
曰 "異哉!"(왈 이재); 말했다. “참 이상도 하다.”
初淅瀝以蕭颯(초석력이소삽) 처음엔 우수수 스산한 소리를 내더니
(쌀 일 석) (거를 력) (맑은 대쑥 소) (바람소리 삽)
忽奔騰而澎湃(홀분등이팽배) 느닷없이 솟구쳐 물결이 이는 듯 하는 것이
如波濤夜警(여파도야경) 마치 파도가 밤중에 일어나고
風雨驟至(풍우취지) 비바람이 갑자기 몰려오는 것만 같구나.
其觸於物也(기촉어물야) 물건에 부딪치면
鏦鏦錚錚(종종쟁쟁) 쟁글쟁글
金鐵皆鳴(금철개명) 쇠붙이가 일제히 우는 것만 같아,
又如赴敵之兵(우여부적지병) 마치 적진을 향해가는 군대가
銜枚疾走(함매질주) 입에 재갈을 물고 내달리매,
不聞號令(불문호령)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但聞人馬之行聲(단문인마지행성) 다만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予謂童子(여위동자)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此何聲也?汝出視之."(차하성야) (여출시지)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 살펴보아라."
童子曰(동자왈) 동자가 말했다.
"星月皎潔(성월고결) "달과 별이 환히 빛나고,
明河在天(명하재천) 은하수는 하늘에 걸렸습니다.
四無人聲(사무인성) 사방에 사람 소리도 없고,
聲在樹間"(성재수간)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予曰(여왈) 내가 말했다.
"噫嘻悲哉!(억희비재) "아, 슬프도다!
此秋聲也(차추성야) 이것은 가을의 소리로구나
胡爲而來哉?(호위이래재) 어이하여 왔는가?
蓋夫秋之爲狀也(개부추지위상야) 대개 가을의 형상이란,
其色慘淡(기색참담) 그 색깔은 참담하여
煙霏雲斂(연비운렴) 안개는 부슬부슬 한데 구름은 걷히는 것만 같고, (눈 펄펄내릴 비)
其容淸明(기용청명) 그 모습은 맑고 밝아 (30)
天高日晶(천고일정) 하늘은 드높은데 해가 반짝이는 듯 하다.
其氣慄冽(기기률열) 그 기운은 오싹하여
砭人肌骨(폄인기골) 사람의 살과 뼈를 저미는 것만 같은데,
其意蕭條(기의소조) 그 뜻은 쓸쓸하여
山川寂寥(산천적료) 산과 내가 적막한 듯 하다.
故其爲聲也(고기위성야) 그래서 그 소리는
凄凄切切(처처절절) 처량하고 애절하여
呼號憤發(호호분발) 울부짖고 분을 터트리는 듯 하다.
草綠縟而爭茂(초록욕이쟁무) 우거진 푸른 풀들이 무성함을 다투고, (번다 할 욕)
佳木蔥籠而可悅(가목총롱이가열) 아름다운 나무도 울창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더니만
草拂之而色變(초뷸지이색변) 풀이 이 바람에 흔들리면 색깔이 변하고,
木遭之而葉脫(목조지이엽탈) 나무가 이것과 만나면 잎이 떨어진다.
其所以摧敗零落者(기소이최패영락자) 꺾어져 시들어 떨어지는 까닭은
乃其一氣之餘烈(내기일기지여열) 한 기운의 남은 매서움 때문이다.
夫秋 刑官也(부추) (형관야) 대저 가을이란 형관(刑官)이니,
於時爲陰(어시위음) 시절로는 음(陰)이 된다.
又兵象也(우병상야) 또 전쟁의 형상이니,
於行爲金(어행위금) 오행으로는 금(金)이 된다.
是謂天地之義氣(시위천지지의기) 이를 일러 천지의 의로운 기운이라 하니,
常以肅殺而爲心(상위숙살이위심) 항상 엄숙함을 마음으로 삼는다.
天之於物(천지어물) 하늘은 사물에 있어
春生秋實(춘생추실) 봄에는 싹이 돋고 가을에 열매 맺게 한다.
故其在樂也商聲(고기재악야상성) 그런 까닭에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商聲)이라
主西方之音(주서방지음) 서방의 음을 주관하며
夷則爲七月之律(이칙위칠월지율) 이칙(夷則)이 7월의 음률이 된다.
商 傷也(상) (상야) '상(商)' 이란 '상심(傷心)' 이니,
物旣老而悲傷(물기노이비상) 만물이 이미 노쇠하매 슬퍼 상심함이며,
夷 戮也(이) (륙야) '이(夷)'는 '죽인다'는 뜻이니
物過盛而當殺(물과성이당살) 사물은 성대한 시절을 지나면 죽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嗟乎 草木無情(차호) (초목무정) 아아! 초목은 무정하여
有時飄零(유시표령) 때로 나부껴 떨어진다.
人爲動物(인위동물) 사람은 동물로서
惟物之靈(유물지령) 오직 만물의 영장이 되니
百憂感其心(백우감기심) 온갖 근심을 그 마음에 느끼고,
萬事勞其形(만사로기형) 갖은 일이 그 형체을 수고롭게 한다.
有動於中(유동어중) 마음에 움직임이 있게 되면
必搖其精(필요기정)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린다.
而況思其力之所不及(이황사기력지소불급) 하물며 그 힘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憂其智之所不能?(우기지지소불능) 지혜로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는 것인가?
宜其渥然丹者爲槁木(의기악연단자위고목) 윤이나게 붉던 낯빛이 마른 나무 같이 되고
黟然黑者爲星星(이연흑자위성성) 이들이들 검던 머리가 허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검을 이)
奈何以非金石之質(나하이비금석지질) 어이하여 금석의 자질도 아니면서
欲與草木而爭榮?(욕여초목이쟁영) 초목과 더불어 번영함을 다투려 하는가?
念誰爲之戕賊(념수위지장적) 생각건대 누가 이를 해치고 죽이는 것인가? (죽일 장)
亦何恨乎秋聲(역하한호추성) 그럴진대 어찌 가을 소리를 한하랴?"
童子莫對(동자막대) 동자는 대답 않고
垂頭而睡(수두이수) 고개를 떨구고 졸고 있었다.
但聞四壁蟲聲喞喞(단문사벽충성즉즉) 다만 사방 벽에서 풀벌레 소리만 찌륵찌륵 들려와
如助余之歎息.(여조여지탄식) 마치 나의 탄식을 부추기는 듯 하였다.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구양수가 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하여 이를 듣다가 말했다
" 참 이상하도다, 처음에는 우수수 스산한 소리를 내더니 느닷없이 솟구쳐 물결이
이는 듯한 것이 마치 파도가 밤중에 일어나고 비바람이 갑자기 몰려 오는 것만 같구나,
그것이 물(物)에 부딪치면 쟁글쟁글 쇠붙이가 일제히 우는 것만 같아, 마치 적진을
향해 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내달리며 호령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 듯 하구나,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서 살펴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달과 별이 밝게 빛나고 하늘에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 소리>구나"
이렇게 시작되는 시는 자연의 연속성과 인간 삶의 허망함을 한(恨)하며 말미에,
"그럴진대 어째서 가을 소리를 한탄만 하는가?
동자는 나의 말에 대답도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잠을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려와,
나의 탄식을 부추기는 듯하다"고 하고 끝을 맺는다.
그림과 그림 속의 글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 하니, 규정에 안 된다는 안내원의
말에 따라 찍지는 못하고, 팔고 있는 간단한 화록만 사서 나왔는데, 길옆 이름 모른
대여섯 그루의 큰나무 밑에 낙엽인지 누른 잎사귀 몇 잎이 떨어진걸 보고 차에서
내려 밟아 보았다. 불어오는 호숫가의 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발 밑에 부서지는
소리를 가을 입구에서 들으며, 벌써 낙엽이라니 그 나무 성질 한번 급하다 생각하면서
인간이나 자연세계에 성질 급한 녀석은 남보다 빨리 죽거나 떨어진다는 교훈을 얻으며,
<가을 소리>와 함께 일찍 찾아온 가을의 첫 정취를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며,
生과 死가 공존하는 창조의 신비를 맛본다.
전통회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림과 글이 한 작품에 같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회화에서도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문인(文人)사상과 관련이 깊다. 이는 전통회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대체로 왕실과 귀족 등
상류계층이고,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학식과 사상을 회화에 투영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 이미 문인화(文人畵)라 부르는 장르가 등장하였고,
시와 서예, 그림에 모두 뛰어남을 뜻하는 삼절(三絶)은 하나의 최고 경지이자 이상이 되었고,
그림 속에 글을 뜻하는 제발(題跋)도 이런 사상과 관련이 깊다.
회화가 문인들의 성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문인들의 시나 문장들이 그림에 들어 가게 되었다.
오늘날은 시인, 서예가, 화가가 각각 다른 예술의 한 장르를 만들고 있지만,
그때의 고미술(古美術)을 보면, 그림과 시, 서예가 한 작품에 같이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가을이 짙어지면, 가을풍광을 즐기고 가을냄새를 맡았던 예년과는 달리,
올해에는 자연의 연속선상에서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계절 속에,
<가을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