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최악의 사태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정말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
어날줄이야.
어느날 연희 부모님이 내 휴가날짜를 물으시길래 나는 성큼 대답해 드렸다.
그리고 몇일후 연희 부모님이 그 날에 맞춰서 괌에 가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럼 연희는 누가 돌보고요? 저요? 하하하.. 그렇게 심한 말씀을.. 차라리 벼
락을 쳐주시옵소서. -아멘-
더 나쁜것은 유미란이 내 휴가날짜와 맞췄다는 것이다.
연희와 같이 바다로 놀러가자고 한것은 유미란이었다. 나는 도통 유미란이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머리좋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있다
면 내가 이길것이다. 하지만 트릭을 잘 써야 하는 게임이라면 유미란이 당연
히 승리였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남자라면 여자의 도전을 피하지 말하고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누구의 도전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다.
팔월 초의 바다란 아름다움도 아니고 시원스러움도 아닌 사람들만 버글거리는
그래서 바다속 어느 장소에서 수치스러움도 모른채 몸을 떠는 남자를 발견하
게 되는 그런 곳이다. 거기다가 연희같이 수영도 못하는애가 바다로 들어가
물이라도 먹게 된다면 그야말로 때때로 오줌을 보약으로 마신다는 우리나라
모 그룹의 회장이 되는것이다.
부산에 도착한 첫날 나는 연희와 유미란의 차이점을 확실히 알수 있게 되었
다. 유미란은 키도 큰데다 검은 선글라스에 비키니까지 입자 도대체 이 여자
가 외국에서 온 여잔지 한국여잔지 알수 없을 만큼 혼돈 되었고 연희는 작지
는 않은 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다고도 할수 없는 키에 반바지에 반팔 티를
입었다. 둘다 느낌이 너무나도 틀려서 어색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같
이 다니는 모습은 생각외로 언니와 동생사이처럼 친밀하게만 보였다.
사람들은 연희가 통역가이드로 그리고 유미란은 홍콩이나 일본에서 온 혼열쯤
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미란이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바닷가로 오는 길
에 몇몇의 남자들이 영어로 또는 중국어나 일본어로 유미란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다가 유미란은 생글생글 웃어 가면서 영어면 영어로 일본어면 일본어로
대답을 해주는것이었다.
"와우 대단해요."
연희가 유미란에게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기본적인 말만 익혔을 뿐이에요."
유미란에게서는 삶의 여유로움이 보인다.단지 그렇게만 보이는 신기루 현상과
같은것일지라도 지금은 그렇게 보였다. 유미란은 자신의 삶이 여유로와 보이
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마법을 사용한 것일까. 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얼
마의 고통이 따랐을까.
바닷가에 도착하자 기분은 훨신 더 좋아 졌다. 사람이 얼마나 많고 바닷가가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바다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였고 간혹 불쾌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잊어 버리려고 애썼다.
대전에서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이곳에 오는 내내 연희와 유미란은 아무 문제
가 없었다. 나만 괜히 불안해 했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불안해 한데에는 두
사람의 성격적 차이나 그런것이 아닌 내 이중적인 마음이 들통날까봐라는 표
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는 못사는 것일까?
"석우씨? 무슨 죄지은거 있어요? 과거 부산에서 만난 아가씨와 짧은 몇밤을
보내고 도망친적이라도 있으신거에요?"
유미란 이여자 혹시 독심술이라도 있는것은 아닐까?
"하하.. 진담을 참 농담처럼 잘하시네요. "
찔리는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농담화 시키는게 유일한 살길이라는 진리.
누구의 말씀? 내 말씀.
"석우씨도 예쁜 여자 좋아해요?"
"그럼요. 기왕이면 다홍치마잖아요."
"그렇군요. 역시."
유미란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밥이 있고 반찬이 있으면 당연히 가장 좋아하는 반찬쪽으로
젓가락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연희는 벌써부터 바닷가에 발을 담그면서 뛰어 다니면서 우리들을 불렀다. 저
렇게 단순할수가 있을까?
연희가 손짓하는 것을 보더니 유미란이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가요. 연희씨 혼자서는 재미 없을 거에요. 놀러 온거잖아요."
"아니요
. 괜찮아요. 연희한테 가보세요. 전 여기서 구경이나 하죠 뭐."
"아하! 몇점짜리 여자가 가장 근사한지 점수 매기러 온셈이로군요. 얄미워.
나중에 제 점수도 말해줘야 해요. 알았죠?"
유미란은 연희에게로 갔다.
연희와 유미란은 수영이라기 보다는 바닷가를 걷는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바
닷 바람에 연희의 머리칼이 나풀거리는게 보였다.
지금 둘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내 얘기? 아니면 그냥 세상 얘기?
또는 화장품이나 옷 얘기?
가끔은 이렇게 끼지 않는척 하면서도 그 틈사이에 끼어서 사람들의 얘기를 열
듣고 싶을때가 있다. 보통은 자신이 불리하다거나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서 자
신이 없을때 남의 얘기를 몰래 열듣고 싶어 한다. 나도 내 자신에 대해서 자
신이 없는 것일까? 연희와 유미란 두 사람다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면 그것은 옳지 못한 생각일까?
바닷가에 왔지만 나는 또 다시 산과 강을 넘고 건너고 있다. 이곳이 종착역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나는 두 사람에게 다 터무니 없이 부족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가뭄이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좋으련만. 비
는 오지 않고 건조해진 바닷바람만 불었다. 멀리서 다시 연희의 나풀거리던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연희에게 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연희가 좋아 한다던 남자의 얘기를 들어 볼 참이다. 세상이 얼
마나 냉정한지 아직 알지 못하는 연희에게는 아직 나같은 보호자가 필요하다.
유미란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일단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그것은 목숨을 거는 외줄타기 보다 더 위험한 거
에요. 그리고 그 위험을 무슨 망각의 강을 건넌것처럼 그때가 지나면 잊게 되
요. 내가 그랬듯이요.`
나는 지금까지 쓸데 없는 걱정을 한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왜 두 여자중 하나
를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연희도 유미란도 나에게 있어서는 좋은 친구들인
셈이다. 아직은. 아직은 그랬다.
저녁이 되서 우리는 근처 민박 집으로 돌아 갔다. 방이 하나 밖에 안 남았다
면서 우리같이 혼성으로 온 사람들에게는 방을 주지 않는다는 아주머니에게
연희는 동생이고 유미란은 올봄에 결혼한 내 와이프라고 설득해서 간신히 얻
어낸 방이었다.저녁은 밖에서 먹었으니 간단히 샤워만 하고 잠자리에 들면 되
었다. 유미란이 자신이 먼저 샤워실을 쓰겠다면서 나갔다.
"연희야?"
"응?"
"너 저번에 말하던 남자 얘기 좀 해볼래?"
"왜? 저번에는 별로 관심 없는것 처럼 그러더니."
"그냥. 다 이 오빠가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지."
"걱정은. 사실은 질투하는거지? 그치? 나같이 이쁜애가 근사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니까 질투하는 걸거야. 맞아. 그래. 오빠 성격에 질투를 안할리가 없잖
아? "
"내 성격이 어떤데 질투를 하냐?"
"어떻긴. 뭐 그냥 유치 찬란."
연희가 얼굴에 턱을 괴고서는 생글 거렸다.
"내가 유치찬란 이면 너는 뭐야?"
"나? 난.. 단순 무식. 헤헤헤.."
안본 사이에 성격이 어두워 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대로 였다.
휴우.. 다행이다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유미란이 방으로 들어 왔다.
"다음으로 들어갈 사람?"
"네. 저요."
연희가 손을 번쩍 들고는 총총 거리면서 방을 나려고 했다. 이 민박집에 하나
밖에 없는 샤워실은 이 방밖으로 나가 마당으로 가야 했다. 밖이 어두운데 괜
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연희야?"
"응?"
"안 무섭니?"
"에이 무섭긴. 내가 뭐 어린앤줄 알아? 걱정마."
연희가 문을 탁 닫고 나갔다.
"정말로 좋은 오빠인거에요?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거에요?"
머리칼의 물기를 털고 있던 유미란이 말했다.
"........"
나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냥 연희는 원래가 공포영화도 못보고 겁도
많은 애라는 것을 알기에 걱정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유미란이 화를 낼줄이
야.
"신경쓰지 마세요. 내가 나갔을때 보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진걸테니까 걱정하
는게 당연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했고 유미란도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연희가 들어
오자 나와 유미란 사이에 흐르던 어두운 침묵이 깨졌다.
"저 갔다 왔어요. 말이 샤워실이지 그렇게 물이 졸졸졸 나오는줄 몰랐어요."
연희가 툴툴 거렸다.
"가뭄이니까 어쩔수 없잖아요. 다른데는 매일같이 새벽 두시에 물뜨려 나가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던데요."
"넵! 제가 칭얼거릴 일이 아닌가 봐요. 에구 못되라. 집에서 매일 펑펑 물쓰
던 습관때문에 그래요. 반성하겠습니다."
연희는 고개를 까딱 구부렸다. 연희가 매일같이 이런 착하고 신선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천사로 변한텐데... 아깝다. 어디 용한 점
쟁이라도 있으면 부적하나 사서 연희 이마에 붙여 놓아 볼까? 그러면 말도 잘
듣고 얼마나 이쁠까. 그런데 유미란이 연희의 저런 모습속에 악마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떨까? 아니지 유미란도 그런점에서는 연희와 다를바가 없
지. 내 팔자야. 용한 점쟁이를 만나서 부적을 붙여야 할것은 연희나 유미란이
아닌 나인지도 모르겠다. 저 두 여인네들은 기가 세서 아마 부적이 어디로 멀
리 도망갈것이다. 특히나 연희는 김일성이 죽은 이유는 복상사때문이라고 주
장하는 유일한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아주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도 연희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애한테 부적을 붙인다고 해서 그애
가 갑자기 착해진다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착해진다면 그것
은 지구가 갑자기 다가오는 어느 유성과의 충돌이 일어나는 날쯤이 되지 않을
까?
나는 연희가 들어오자 이번에는 내가 나가서 샤워를 할 차례였다. 좁은 방안
에서 세사람이 자려면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깨끗이 닦는게 더운날 그나마
조그이라도 덜 짜증이 날것이다.
내가 가장 문밖쪽으로 눕고 그 다음이 연희 그 다음이 유미란이었다. 연희가
가장 어리기 때문에 중간에서 자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흐응.. 두 사람이 다 날 샌드위치처럼 껴안고 자려고 그러는거지? 흐으으..
불쌍한 연희. 연희는 오늘로 목숨이 다 하는거야. 내일 아침이 되면 따끈따끈
한 호박죽이 되어 있을꺼야."
연희가 헤헤 거리면서 말했다. 말이야 우는듯한 목소리를 냈지만 전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호박죽이야?"
내가 묻자 연희가 이렇게 말했다.
"호박. 호박 몰라? 그럼 내가 줄그어서 수박처럼 보일려는 호박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말이야? "
유미란이 꺄르르르 웃었다. 연희는 확실히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이이다. 나만 종종 어색했을뿐이지 연희와 유미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친해지는듯 했다. 처음에 두 사람이 비키니와 반바지차림으로 걸었을때 느
꼈던 그 느낌 그대로 그 사람 사이는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새벽 두시까지 종알 종알 거리
다가 오늘은 그만 자기로하고 내가 자리에 눕자
두 사람다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올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에
도 다 벗고 자던 내가 두 여자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 입던 옷을 입고
잠을 자야 하는데다 날은 지독하게 더워서 열대야 현상이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바람이 불고는 있었지만 그것으로 더위를 식히기에는 턱도 없었
다. 하지만 아마도 연희와 유미란은 깜빡이라도 잠들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움직인다면 연희와 유미란도 깰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 그냥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한참을 자려고 해도 잘수가 없어 이제는 모기에 물릴때 물리더라도 대청
마루로 나가야 겠다고 결심했을때 누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바로 옆에
서 일어난게 아니라면 일어난 사람은 유미란일 것이다.
"잠이 안와요?"
정작 유미란에게 말을 건것은 연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생각하느냐
고 이렇게 미련하게 누워 있었단 말인가? 연애 십년동안 손한번 못잡아본 연
인들하고 똑같은 바보들.
"네. 석우씨는 자는 모양이네요."
유미란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숨을 죽였다.이것은 분명 내가 연희를 훔쳐보는
엿보기 취미에 그런데로 적합한 것이었다. 연희와 유미란이 말하는 것을 듣
기. 훔쳐 듣기는 아직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종목이었다.
"오빠요? 얼마나 잘 자는데요. 아마 도둑이 들어와서 업어 가도 모를걸요?"
"그래요? 어떻게 그렇게 석우씨 잠버릇을 잘 알아요?"
"헤.. 그건 같이 자봤으니까요."
연애 십년동안 손한번 못잡아본 연인들 보더 더 떨어지는 바보는 연희. 어떻
게 그렇게 편안히 나와 같이 자봤다는 말을 할수 있는것일까? 연희 말대로 너
무 단순해서 잔다는 것은 잔다는것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야 알
지만 유미란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또는 세상 사람중 몇명이 아무일 없었다
라고 생각할까?
"연희씨?"
"네?"
"부러워요."
"뭐가요?"
"세상에 대해서 솔찍한거요. 나도 나름대로 솔찍하고자 했는데 그게 안되더라
고요."
"무슨 뜻이에요?"
연희가 되물었다. 연희야 제발 눈치 빠르게 다른 말로 돌려 다오. 그렇지만
연희에게 그런 감각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건. 연희씨는 연희씨가 성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요.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는 그냥 생기는게 아니잖아요."
"그래요. 그렇군요. 나도 스물 다섯이었을때가 있었군요. 혹시 스트라이킹이
라는 말 들어 봤어요?"
"아뇨. 그게 뭔데요?"
"대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요 대학생들중 운동하는 학생들이 가끔
옷을 벗고 어느 일정 구역을 달린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옷을 입고 그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
각을 말하는거에요. "
"정말요?"
"네. 그래요."
"그런데요?"
"연희씨는 세상에 대해서 자신을 다 보여줄 자신이 있어요? 실오라기 한올 걸
치지 않은 채로 말이에요."
"아뇨. 안그래요. 그러지 못할거 같아요."
"안그래요. 연희씨는 매번 세상을 향해서 한번의 부끄러움도 없이 옷을 벗는
답니다. 자신이 그렇다는거 알아요?"
유미란은 연희를 몇번 만나지 않았지만 연희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
던 모양이다. 유미란의 생각은 어디서 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희에게 저런 말을 하는것일까?
유미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미란이 연희에게 이제 그만 자자고 말했다. 유미란은 다시 누웠다. 연희는
이제서야 잠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연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
졌다.
유미란은 무엇을 절망하는 것일까. 엿보기나 훔쳐보기가 괴로울때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내가 괴로우니까. 마치 공범이 된 기분이었다. 더럽고
치사한 사기를 친 사람의 옆에서 뻔히 그 사기치는것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같이 공범이 되는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들. 열대야 현상. 말라버린 논들. 밤새 물을 받기 위해서
줄서는 사람들. 이런날 헤어진 연인들. 이런날 격렬하게 사랑하는 연인들. 자
살하는 사람. 살기위해 수술 받는 사람. 잠시 부는 바람으로 잠든 사람. 절망
하는 사람. 온통 세상의 모든것을이 뒤죽 박죽이었다.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지만 A와B는 같지 않다는 엉뚱한 퍼즐. 또는 요즘 육각 퍼즐보다 더 어렵다
는 동그란 공 모양의 퍼즐. 색깔 맞추기. 모양 맞추기.
마치 백야 같았다. 어지러운듯 히뿌연한 백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것 같
았다. 나도 그리고 연희도 유미란도.
우리는 어떤 퍼즐을 맞추고 있는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함께 모아야만이 하나
가 되는 퍼즐을 혼자서 끙끙대며 맞추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선
듯 같이 퍼즐을 맞추자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퍼즐을 꽁꽁 숨겨 놓고 혼자서만 힘들이고 있을 것이다.
연희가 잠결에 내쪽으로 굴러 왔다. 가끔 침대에서 떨어진다더니 이렇게 해서
떨어지는 것일 것이다. 연희가 이불속으로 나에게 기어들어 왔다. 어린애 처
럼. 유미란은 아직도 깨어
있을까? 그렇다면 연희가 내쪽으로 몸을 돌린것을
알텐데... 이건 내일 일이었다. 스칼렛도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뜬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졸음이 밀려 온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어쩌
면 이것은 연희가 옆에 있기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
각의 결론을 채 내리기도 전에 나는 잠들어 버렸다.
*******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일요일 여름의 낮에 비디오를 보고 있는 일이 따분하
다는것쯤은 나도 안다.
"재미 없어."
연희가 골내는 고릴라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라도? 아니면 할 일이라도?"
"있잖아. 언제 서울가?"
연희가 갑자기 서울 얘기를 왜 꺼내는 것일까. 일단 의심.의심.
"다음주에."
"그래?"
연희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사람이 궁금해지는 이유는 처음부터가 아닌
중간부터라는 것을 연희는 알까 몰라.
"그런데 왜 갑자기 서울 얘기는 꺼내는 거야?"
내가 다시 연희에게 물었다.
"아줌마 보고 싶어서."
"네가 울 엄마를 왜 보고 싶어 하냐? 하기사 나보다 널 더 좋아하시니까 그럴만도
하지만.. 그런데 다음주는 나 혼자 갈꺼야. 다음에 같이 가자. 널 데려가기 싫은
건 아닌데 어머니와 상의 드릴일이 있어서."
"알았어. 그럼 다음에 가지 뭐."
연희는 요즘 우울해 보였다. 마치 십대의 사춘기가 나뭇잎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는것 처럼 연희는 사춘기 같아 보였다. 결국 연희 사춘기때 나는 대학
을 갔고 군대를 갔었으니까 연희가 어떤 사춘기를 보냈는지 알지 못한다. 생각해
보니 연희가 고등학생이 된 후부터 내가 다시 대전에 내려오기까지는 연락이 뜸했
던게 사실이었다.
그 사이 연희가 잘 성장 했는지 그리고 다른 고등학생처럼 적당한 고민과 적당한
재미를 붙이면서 지냈는지 알길이 없었다.
내가 아는 한은 연희는 내가 대학에 가기 전에는 고집세고 낙천적이고 세상에 대
해서 어떤 부담도 갖지 않으려는 아이었고 대전에 와서는 좀 변했을까 싶었는데
연희는 여전히 과거와 똑같았다.
나는 플레이 되고 있는 비디오를 껐다.
"저번에 말한 남자 안 만나니?"
"그 남자 바쁘데."
"뭐 하는 사람인데 바쁘다고 하는거야?"
"나도 모르겠어. "
"아니 그럼 뭐하는지도 모르는 놈팽이를 만난단 말이야?"
연희의 시큰둥한 대답을 듣은 나는 고함을 질렀다.
"놈팽이 아냐."
연희는 내가 지르는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대답하는것 처럼 보였다.
"그럼 놈팽이가 아니면 달팽이거나 팽이 버섯이란 말이야?"
이제는 얘기를 좀 해야 할때였다.
"우연희."
"응?"
"내 눈쳐다 보는거 알지?"
이것은 아주 오래된 고전적인 수법이었지만 신토불이라고 우리의 것이 좋듯이 연
희와 나 사이에도 오래된 고전적 수법이 가장 으뜸이었다.
"싫어."
"자. 눈에는 뭐가 들어 있다고?"
"진실."
연희가 고개를 다른쪽으로 돌린채 대답했다.
"내 눈을 쳐다 봐."
"치이 알았어."
연희가 이제서야 내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그 남자가 좋니?"
"응."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연희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그냥 아는 사람이야."
휴우.. 아무래도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연희는 그 남자에게 너무 많이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 얘기를 이렇게 안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연희가 나를 쳐다 보았다.
"물 먹고 싶어."
"그런데?"
"나 보다 쬐끔 더 냉장고와 가깝잖아."
아마도 연희는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남자에 대해서 더 이상 나에게 알려 주
지 않을 작정인것 같았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물 좀 가져다 주세요."
"너 날 꼭 시켜야만 하겠니?"
나는 연희를 향해 눈이 옆으로 찢어져라 흘기면서 쳐다 보았다.
"응."
읔! 저 뻔뻔함.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삼 오랫만에 다시 그 뻔뻔함을 느끼게
되었다.
쟤는 정말로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게 없어요. 설마 하나님 혹시라도 연희 생일때
마다 배탈이라든지 낮잠을 못 주무셔서 깜빡 조시다가 정신연령 올려 주시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하나님이 지금 잘못하시는 거라고요. 네? 아니라고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요? 너무 과보호를 했다니요. 제가 연희 어머닌가요. 전
아니라고요. 정말로 제가 연희를 너무 과보호 해서 저렇게 둔감하고 덜떨어진데다
가 세상물정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애가 된거라면 벼락치고 비를 내려 주세요.
흐흐흐.. 연희에게 배운수법이었다. 이런 날에 비가 올리가 없었다. 벌써 몇달째
가뭄이라는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비가 올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하나
님이 잘못하신거라고요. 쟤 정신년령이나 좀 올려 주세요.
"오빠? 비다. 비가 와."
연희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흐헉!
정말로 연희의 말처럼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더웠던 것이다. 더운 공기
가 자꾸 올라가 결국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비를 만들었던 것이다. 거디가가
천둥까지 치기 시작했다.
<쏴아.........>
처음에는 한두방울 뚝뚝 떨어지던 것이 몇초가 지나자 금새 땅이 패일만큼의 장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연희는 온통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비가 너무 세게 들이쳐서 집안으로 들어 오고
있었지만 연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건조하고 탁하던 바람이 금새 시
원스럽게 변해 버렸다. 연희는 창문을 열더니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리와봐. 여기서 흑냄새가 나. 와 향기로와라.기분이 좋아지는것 같아. 안정도
되고. 와아.. 좋아라."
비가 왔다고 좋아하는 것은 연희뿐만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누가 비가 온다고 창
문을 열고 흑냄새를 맡을 것인가.
"흑냄새 좋니?"
"응. 왜 땅을 괴롭히면 벌받는지 알것 같아. 자꾸만 비닐 봉지를 땅에 버리면 땅
은 화가나서 땅냄새도 안풍겨 줄거야. 그러면 두통 치료는 어떻게 하지? 응?"
연희가 슬픈듯이 나를 쳐다 보았다. 이렇다니까 금새 감수성 예민한 소녀같이 되
어 버렸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가 문제지만.
연희는 화가나거나 그러면 가끔 현관밖으로 나와 꽃에 물을 주고는 그 흑냄새를
맡는 버릇이 있었다. 연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 했다. 내가 이층에 있으면 연
희는 항상 꽃에 물을 주고는 이층을 올려다 보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난
이게 좋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희의 옆에 가서 섰다. 정말로 비에 젖은 흙냄새가 나는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비가 그칠때까지 흙냄새를 맡았다. 비는 십오분정도 내렸
는데 가랑비 한시간 내린것 마냥 그렇게 ㅆ아 졌었다.
"다시 봄이 왔으면 좋겠어."
연희가 말했다.
"가을과 겨울은 어쩌고?"
"나 가을하고 겨울 별로 안 좋아 하잖아. 내가 겨울엔 우울하다고 하면 웃을 거
야?"
"아니. 웃지 않고 비웃으면..."
나는 말을 하다가 생각보다 진지한 표정을 짖고 있는 연희를 보고 하던 말을 돌
서 말했다.
"봄은 겨울이 가야 오는거잖아. "
"그래도 난 겨울이 싫어."
"그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그래도 봄은 오잖아. 어차피 기다려야 할 봄이라면
기다리면서 세상을 충분히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해. 우울한 기다림도 즐거운 기다
림도 둘다 봄을 가져다 주거든. "
"그래 그말이 맞겠구나. 우울한 기다림과 즐거운 기다림. "
비 덕분에 적어도 한시간은 시원한 바람이 불것이다.
만약 내가 연희에게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지금쯤이 되지 않을까? 결코 예
쁘지 않은 연희가 참으로 곱고 예뻐 보였다. 이런것을 제눈의 안경이라고 하겠지
만 그래도 연희는 예뻤다. 연희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밤마
다 베게를 적셔 가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연희는 이제서야 시작했는지도 모르
겠단 생각이 들었다. 연희도 밤마다 숨죽여 울게 될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인
생에 있어서 성장을 의미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각각 다르다. 정말로 성장하는
사람 그대로 주저 앉는 사람. 적어도
성장에 있어서 만큼은 모두들 스승도 부모도
형제도 없는 셈이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그렇다면 연희도 변하게 될까? 세상의 짐을 나눠지고 비슷한 기분으로 그렇게 살
게 될까? 개구장이같이 반짝 거리던 눈에 눈물이 맺히는 날이 더 많게 될까?
아깝다. 나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 많은 별들중 하나가 사라져 버린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별이 너무 많아서 어떤게 사라졌는지도 모를것이다.
하지만 매번 그 별을 쳐다 보는 사람이 한사람쯤은 있을 테고 그러면 사라져 버린
별에 대해서 마음아파할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런 느낌이다.
월요일날 출근하자 유미란은 하루종일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왔다 갔다 했다.
유미란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나조차도 신경이 쓰여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
다.붙잡고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닌것 같아 보였
다. 점심시간에도 훌쩍 혼자 사라져서는 점심시간이 다 끝나서야 나타났다. 분명
히 무슨 문제가 있기는 있었다. 나는 퇴근시간이 십분쯤 남았을때 유미란에게도
갔다. 퇴근후에 만나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 볼 생각이었다. 나는 유미란에
게 가서 퇴근후에 시간좀 내 달라고 하자 마치 도둑 고양이가 생선 훔치다 들킨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천천히 설득을 하자 유미란은 같이 퇴근을 하자고 했
다. 퇴근후 유미란이 나를 데리고 간곳은 그녀의 아파트였다.
유
미란이 나에게 앉으라고 한후 차를 끓여 왔다. 아파트는 평소 유미란에게서 느
끼는 그런 화려함은 없었다. 가구도 별로 없었고 깔끔하고 깨끗했다.
강하게만 보였던 유미란이 애처롭다 못해서 금방이라도 풀섞 주저 앉고 울것만 같
아 보였다. 나는 유미란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 남자가 돌아 올줄은 몰랐어요."
유미란이 말한 그 남자란 유미란의 두번째 남자를 칭하는 것이었다. 첫번째가 유
미란보다 나이가 어린 녀석이었다면 두번째 남자는 정 반대였다. 첫번째의 실패가
가져다 준 충격을 잊고자 만났던 남자 였는데 무려 유미란보다 열 다섯살이나 많
았다. 유미란은 두번째 남자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라고 느끼게 되는
데 그 두번째 남자는 훌쩍 떠나기를 너무 좋아해서 유미란을 만나고 일년만에 사
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길로 유미란은 유학을 떠났고 그 다음부터는 유미란의
생활은 지금 보는것 처럼 엉망이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유미란은 정말로 두번째 남자를 사랑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유미
란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두려워요?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거 말이에요."
"그래요. 어제 전화가 왔었어요. 몇년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였는지. 담배는 첫번
째 망난이 녀석과 끝이 난후에 배웠지만 그건 그냥 멋이었어요. 그런데 두번째에
는 멋이 되지 않더라고요. 니코틴의 효과라고 해야 겠죠? 담배 없인 안정이 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깜
짝 깜짝 놀라고 밤잠을 못자서 신경 안정제와 심장약을 먹
었는데 둘다 효과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안 먹는것 보단 십분이나 이십분이라도
눈을 붙이게 되니까 약을 먹었고 그러다가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갔고 그때는 그냥 담배만 피웠어요. 물론 유학도중 우리가 흔히 마
약이라고 하는것도 흡입해 보고 담배로 말아서 피워도 보고 그랬어요. 하지만 그
런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유학 후에 대전에 온거에
요. 서울이 싫었거든요. 서울은 너무나도 그의 흔적 투성이 였으니까요. 이게 내
이야기의 전부에요. 물론 숨겨진것도 있지만 대충 말하자면 이렇단 거에요."
유미란은 생각보다 침착한 말투였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유
미란은 그녀의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여서 깊게 들여 마신후 다시 손가락 사이에 끼운후 나를 쳐다 보았
다. 유미란은 냉정을 잃지 않으려는듯 보였지만 그녀가 담배를 끼우고 있는 손가
락은 가늘게 떨렸다.
"아.. 세번째 남자부터는 기억을 못해요. 그때 뿐이었죠. 그리고 어제 전화온 그
남자가 육체적으로는 첫번째 남자에요. 그래요."
유미란은 지금 나에게 말을하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어제 전화온 것에 대해서
냉정히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를 할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중인것이다. 과
거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처음부터 차근 차근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유미란에게도 연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것 처럼 해결해 주지 못하였
음으로 커피나 타서 그것을 유미란에게 마시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으로 가니 의외로 유미란은 부엌 용품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보였다. 빨간
뚜껑이 달린 아주 예쁜 주전자 부터 시작해서 밥그릇도 너무 너무 예뻐서 남자인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였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위에 올려 놓고나서
유미란이 꾸며놓은 부엌의 하일라이트인 찻잔들이 죽 모여져 있는 곳에서 마음에
드는 잔 두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단순한 베이지색 체크였고 또 하나는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 그 바닥과 주위를 금색 쇠로 감싸 놓은 것이었다. 언듯 강아
지 모양의 머그잔도 보였는데 그것은 연희에게 딱 어울리는 잔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커피물이 다 끓자 물을 붓고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잔은 유미란에게 그리
고 베이지색 체크 머그컵은 내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컵인데 잘 맞추시네요."
커피를 한모금 마신 유미란은 이제서야 평상시의 유미란으로 돌아 온것 같았다.
그렇지만 커피를 마시면서도 유미란은 여전히 담배를 들고 있었다. 재털이를 보니
벌써 담배 한까치가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
다. 유미란은 커피 한모금에 담배 한모금식으로 계속 입에서 무언가를 떼는 법이
없었다. 유미란은 커피를 다 마시자 옷을 갈아 입어야 겠다면서 방으로 들어 갔
다. 유미란은 오렌지색 티셔츠와 오렌지색
쫄바지를 입고 나왔다. 온통 황금빛이
었다. 어떻게 보면 밀밭에서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 같아 보였다. 매번 어린
왕자를 떠올릴때 마다 가장 인상 깊게 남는 장면이 바로 여우가 어린왕자를 기다
리는 장면이었다.
유미란이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이 이윽고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오늘 같이 있어 줄래요? 그냥..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원한다면 특별해도 상관은
없어요."
유미란은 그 어떤것에도 희망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여자처럼 행복한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유미란과 같이 있는 지금 나는 바람이 부는것을 느낀다. 그것은 겨울의 바람이었
다. 머추지 않는 그런 바람이었다. 가슴이 시리고 시려서 옆에 있는 나마저 얼어
붙을것 같은 그런 시린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가슴속에 무엇을 묻은 것일까. 가슴속에는 무덤뿐. 어름 무덤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그 어름 무덤은 유미란의 가슴속 깊이 있어서 나로써는 볼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느낌은 내 가슴마저 시리게 했다.
결국 내 결정이 이런것인가?
"특별한이라면 좋아요. 미란씨는 침대에 눕는거에요. 좋죠? 잠옷 입어요? 아니면
서람 다 벗고 자지는 않겠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내 얘기를 해줄께요. 내 얘기
듣고 싶어 했잖아요."
"그럼 잠옷으로 갈아 입고 화장도 지울께요."
유미란은 희미하게 나마 웃었다
.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의 이 시기가 지난다면 유
미란은 좀 더 강해질 것이다. 유미란은 지금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고 그 방법
의 결과가 어떻든간에 강해져 왔었다.
유미란이 양치질 까지 깨끗이 하고 조르르 침대에 와서 누웠다. 이런거 보면 연희
와 비슷했다. 여잔 다 저런걸까? 여자를 아는것과 여자와 자봤다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같이 밤을 지낸다는 사실만
으로 소유와 소속이 되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잘 생각해 보면 여자를 잘 알아야 한 여자와 자면서도 내내 백명도 넘
는 여자와 지내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고 만약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 본다면
백명의 여자와 잤어도 결국은 단 한 여자와 잔것 만도 못되는 것이다. 그 당연한
차이를 모른다니....
"얘기해 줘요."
유미란이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좋아요. 먼저 눈을 감아야 해요."
"왜요? 나 아직 안 졸린데..."
"졸린것과는 상관없는 거에요. 내가 창피하니까. "
"알았어요."
나는 유미란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렸을때 친구들과 놀던 얘기. 그 당시
대전이 얼마나 시골이었는지도 말해주었고 그리고 대학을 서울에서 공부 했는데
그때 첫 여자를 만났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이년을 사귀었고 그 애는 날
차
버리고 시집가버렸다는 얘기와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뽀뽀라도 하면 결혼도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먼저 채인 덕분에 여자들은 그런 문제와
상관없이 다른 남자와 살수 있더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 시집간
애는 대학교 이학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시집을 갔는데 그녀보다 무려 스무살이나
많은 남자였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는 여자
는 무조건 경계의 대상이었다는 말도 해주었다. 지금까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귀여움받고 아들을 둘씩이나 낳고 살고 있다라고 들었노라고 유미란에게 말하자
유미란은 키득키득 거렸다.
"그럼 나만 실패 한셈인가요?"
"아니 미란씨만 실패한게 아니라 그애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거죠.잘 생각해 봐요.
스무살이나 많은 고리타분한 아저씨와의 결혼이라니 그애는 애인이 아닌 아버지의
역활을 해줄 남자가 필요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스무살 많은 남자와 결혼한 그
애도 정서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요. 지금은 첫 여자라는 기분으로 남
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다거나 한것은 아니에요. 지나가버린 일로써 기억
한다는 것 뿐이에요."
유미란은 점점 졸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하지만 유미란도 연희처럼 쓸데
없는 남의 사랑 얘기를 듣는게 취미였던지 안잘려고 버티는 것을 재미 없고 고리
타분한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얘기를 해주는 것을 끝으로 잠을 재워 버리고
말았다.
자 나는 어디선 잔다? 별수 없이 거실쇼파에서 자야 겠군. 그래도 테레비를 누워
서 보겠다고 거실 한쪽에 긴 쇼파 하나늘 마련해 둔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것도 없었다면 나는 그냥 바닥 신세였을 것이다.
왜 사람은 매번 밤만 되면 잠을 자야만 하는것일까? 내가 유미란을 재웠듯이 밤은
분명히 잠과 어떤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과학적으로야 관계가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어두움과 두려움이 밤을
상징하는 거라면 밤에는 자는게 최고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어두움과 두려
움을 잊게 하는 부작용없는 정신과적 치료제일 테니까.
유미란을 재울때까지만 해도 잠이 쏟아 져서 유미란이고 누구건 상관없이 그저 눕
고만 싶더니 이제는 자꾸만 자꾸만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말똥말똥해지는 것이었
다.
유미란. 그녀는 꿈속에서 조차 가슴이 시릴까? 갑자기 그게 걱정이 되었다. 무엇
을 그 얼음 무덤속에 묻어 둔것일까. 두번째 남자라... 그는 아무리 봐도 지나간
사람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유미란의 반응으로 봐서도 지나간 남자로 남는게 최고
였다. 또는 이제 유미란 그녀의 가슴을 불을 비춰줄 등불이 되던지 하지만 내가
들은 말로는 그 남자 등불이 되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미란씨? 여전히 가슴이 시린가요? 이럴때는 안아주면 좋으련만... 그런데 선듯 그
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였다면 이런 고민따위는 하지 않
았을
것이다. 아마도 같은 침대에서 껴안고 자고 있었겠지.
젊은 내가 두 여자 사이에서 한숨이나 푹푹 쉰다는 것을 우리 엄마가 알면 나는
그날로 북어 맞듯이 맞을 것이다. 남편에게 있어서 북어가 여자고 아내에게 있어
서 콩이 남자라면 부모에게 있어서는 북어도 콩도 다 자식일 따름이었다.
음... 이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