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禪話)에 보살 친견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문수보살과 나눈 대화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조(世祖)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 동자를 만난 후 종기가 나았다는 이야기,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중국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해서 진실사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에서도 전하는 그런 이야기의 하나가 무착 문희(無着文喜, 821~900) 선사 이야기다.
무착 문희(無着文喜)는 당나라 때의 선승이다.
남악 회양(南岳懷讓) ― 마조 도일(馬祖道一) ― 백장 회해(百丈懷海) ― 위산 영우(潙山靈祐) ― 앙산 혜적(仰山慧寂, 807~883)으로 이어지는 위앙종 법맥에서 앙상 혜적 선사의 제자라고 <전등록(傳燈錄)>에 기록돼 있다.
무착 선사는 일곱 살에 출가해 항상 계율을 익히고 제방을 편력하다가 당 무종(武宗)의 불교말살을 획책한 회창폐불(會昌廢佛) 사태를 만나 한때 환속해 살다가 다시 절에 들어와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경학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성공(性空) 선사를 만나 여러 지방의 다른 사찰들을 두루 참배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 말을 들은 무착은 곧바로 문수보살의 영지(靈地)인 오대산(五臺山)을 참배하고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하여 오대산에 다다르자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묻기를,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오대산에 왔는가?”
“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을까? 자네 밥 먹었나?”
“안 먹었습니다.”
노인이 그냥 지나가자, 노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무착은 자기도 모르게 노인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웬 웅장한 절 한 채가 눈앞에 나타났다. 노인이 문 앞에서 “균제(均提)야!” 하고 부르니, 동자가 나와 소고삐를 잡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무착도 뒤따라 들어가자, 그 때 동자가 아주 향기로운 차를 한 잔 가져왔다. 다완(茶椀)이 진귀한 보석 같았다. 향기로운 냄새와 상쾌한 분위기에서 얼떨떨해 있는데, 노인이 무착 스님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노인이 찻잔을 들어 보이며,
“남방에는 이런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지?”
무착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는 방안에 가득 찬 순금 장식물들에 눈을 주고 있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주지(住持-교법을 보육함)하는가?”
“말법(末法) 비구가 계율을 지켜 겨우 유지합니다.”
“대중은?”
“혹 300명도 되고 혹 500명도 됩니다.”
“여기 불법은 어떻게 주지(住持)합니까?”
“용과 뱀이 혼잡해 있고 범인과 성인이 동거하고 있다네(龍蛇混雜 凡聖同居).”
“대중 수효는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지”
무착 스님은 노인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가게 해줄 것을 청했다.
노인이 곧 바로 “염착(染着-속세에 물듦)이 있는 자는 자고 갈 수 없지”라고 하시고선, 다시 묻기를,
“자네 계율을 잘 지키는가?”
“아, 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지켰습니다.”
“그건 염착(染着)이 아니고 무엇이지?”
만약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왜 계를 받았는가 하는 말이다.
또 무착 스님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동자를 불러 배웅하게 한 뒤에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미 어둑해진 길가로 나와서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아까 노인께서 '전삼삼 후삼삼'이라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러자 동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스님!” 그 소리에 무착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그 수효가 얼마나 됩니까?”
동자가 다그쳐 물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보고 말했다.
“이 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반야사라고 합니다.”
동자가 말하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웅장했던 절은 어느새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람과 절이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허공에서 게송 한 구절이 들려왔다.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얼굴에 성 냄이 없음이 참다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구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裏無瞋吐妙香)
부드러운 입속의 말 한 마디가 부처님께 올리는 미묘한 향이로다.
심리무진시진보(心裏無瞋是眞寶)
마음에 성냄이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부처님께 올리는 보배로다.
무염무구시진상(無染無垢是眞常)
깨끗하고 때 묻지 않은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동자도 절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자리에 다만 오색구름 가운데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노닐었는데, 홀연히 흰 구름이 동쪽에서 와서 감싸 버리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문수보살 만나기를 하도 간절히 원하기에 문수보살께서 노인으로 변신해 무착을 만나주었다. 하지만 무착은 그저 기이한 노인 정도로만 알았다. 그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와 보니 노인도 절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낌새를 알아차린 무착이 게송을 읊었다.
온 누리가 그대로 성스러운 가람일세(廓周沙界聖伽藍).
눈에 가득히 문수보살 만나 말을 나누었으나(滿目文殊接話談)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니 어찌하랴(言下不知開何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옛 산과 바위뿐일세(廻頭只見翠山巖).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무착은 수행에 더욱 힘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앙산 선사의 법을 이어받아 큰 도를 이루었다.
위에서 아래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은 내용이 나온다.
“여기 불법은 어떻게 주지(住持)합니까?”
“용과 뱀이 혼잡해 있고 범인과 성인이 동거하고 있다네(龍蛇混雜 凡聖同居).”
“대중 수효는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지”
이와 같은 대화에서 “용과 뱀이 섞여 살고 범인과 성인과 같이 산다.”는 말은 보통으로 들으면 그저 그런 것 같지만 그 뜻이 깊은 곳에 있다. 겉말만 따라 가다가는 큰일 난다.
무착이 문수를 찾아 오대산에 갔을 때는 아직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갖지 못한 경지였다. 그래서 자신이 문수와 하나가 아닌 둘로 쪼개진 상태에서 문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때 문수는, 무착이 곧 깨달음을 얻을 근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답해 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품이 물에 녹아 섞이듯이 무착에게 친절히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의 법문을 해주었다. 그러나 무착은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노인과 작별했다.
삼삼(三三)은 보통의 숫자가 아니라 한정된 차별의 숫자적인 견해를 초월한 입장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정신은 제법(諸法)의 본체가 평등한 실상으로 보는 것이므로 중생의 분별심, 혹은 고정관념으로 사량 분별하지 말라는 비유이다.
그런데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 앞으로 3, 3, 뒤로도 3, 3이란 말이다.
• 숫자가 3×3=9명 또는 9×9=81명이라 하기도 한다.
• 숫자가 아니라 불성(佛性)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란 곧 앞도 불변이고, 뒤도 부동(不動)이란 뜻이며, 앞도 불래(不來)이고, 뒤(後)도 불거(不去)란 뜻, 이는 곧 현상(現相)과 근본(根本) 역시 다르지 않고 같다는 뜻이며, 현상과 근본 역시 불이일체(不二一體)라는 말이다. 일체 모든 것이 둘이 아닌 하나요, 같다는 뜻이며, 일체 모든 것이 있다, 없다는 말 자체를 초월해 만물과 만법이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여여(如如) 하다는 말이다.
• 앞으로 세 발자국, 뒤로 세 발자국이면 제자리를 말한다. 즉,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큰 뜻을 이루는 것이며, 현재가 가장 중요한 시점,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치라는 의미이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말이다.
• 전삼삼 후삼삼(前三三後三三), 항하강의 모래 수 곱하기 항하강의 모래 수, 헤아려봤다 소용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 삼삼은 보통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량을 초월한 무한의 수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란 앞에도 三三은 九요, 뒤에도 三三은 九라는 말로서 열 명 이내의 몇 안 되는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것이나 저것이나 고만고만 거의 같은 정도, 피차일반(彼此一般)라는 뜻이다.
다음은 이러함에 대해 평하는 말들이다.
이처럼 ‘전삼삼 후삼삼’에 대한 반응과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뜻이 무엇을 지칭하든 언구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전삼삼과 후삼삼’을 분리해서 이해해도 안 된다. 그것은 앞과 뒤처럼, 위와 아래처럼 하나를 의식적 인식의 차원에서 표현했을 뿐이다. 불성의 물결처럼 퍼지는 모습이며, 바람처럼 흘러가는 흐름을 전삼삼 후삼삼으로 나타낸 것이다.
얼마나 됩니까? 그 대답하는 당체가 도대체 얼마냐? 숫자가 얼마냐? 거기에 무슨 숫자가 있을 필요가 있나. 온 우주가 거기에 그냥 있을 뿐이다. 묻고 답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저~ 총림에 500명이 있고, 5000명이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이 순간에 우리는 살아 있는 불법을 서로 주고받으면 된다. 오대산에 천 명이 있든 만 명이 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저 남방 총림에 300명도 살고 500명도 사는 것이,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여기서는 아무 소용없다. 이 자리에서는 활발하게 살아있는 존재, 진정으로 생명이 불꽃 튀는 그 불법, 진짜 살아있는 불법, 그것을 묻고 답하는 그것이다.
“오대산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하니까
“범성(凡聖)이 교참(交參)하고 용사(龍蛇)가 혼잡(混雜)이라.”
범부와 성인이 어울려 있고, 용과 뱀이 함께 산다. 이것 역시 처음부터 알아듣기 힘든 말이다. 범부와 성인이 한데 산다. 뒤섞여 있다. 용과 뱀도 뒤섞여 있다. 알 듯, 말 듯하다.
이와 같이 혼잡한 듯하면서도 선문답에 격식이 있다. 제대로 된 선문답이라면 언제나 이와 같이 알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긴 여운을 남긴다. 선기(禪機)ㆍ선미(禪味)ㆍ선향(禪香)에 젖어서 선천(禪天)ㆍ선지(禪地)의 복락을 누리는 것이 선인(禪人)들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부르고 답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며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그냥 때가 돼 식사하는 일이며, 피곤해 잠자는 일이다. ― 무비 스님
법(法, 眞理)을 법이라 말하면, 이미 법이 아니듯이 하나가 둘이요, 둘 또한 하나인 것을, 하나니 둘이니 분별심을 내어 무엇하리요. 분별시비(分別是非)는 집착의 원인이며 참 법을 가로막는 마구니일 뿐이다. 숫자에 얽매이지 말라. 이 모두가 자기 눈앞의 허공 꽃(空華)이로다. 이 공안에 생각으로 어떤 해석을 붙이면 불나비가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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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하십시오.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무착 문희(無着文喜, 82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