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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마을 사무총장까지 맡게 된 장원재 숭실대 교수. |
장 교수가 축구와 사랑에 빠진 때를 찾기 위해선 그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가 3살 때부터 축구장을 데리고 다녔다. 축구 외에 다른 스포츠 경기도 보러 다녔는데 유독 축구를 볼 때만 피가 끓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며 축구에 대한 열정은 타고 났었다고. 하지만 그가 '축구'라는 바다에 깊숙히 빠진 것은 6살 때다. "내가 축구를 정말 사랑하고, 축구와 함께 하겠다고 느꼈던 것은 1971년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뮌헨 올림픽 예선전을 본 뒤"라며 운을 뗀 장 교수는 "당시 슈팅수가 한국이 41개, 말레이시아가 3개일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역습으로 한 골을 내줘 0-1로 패해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어린 마음에 너무 분해 경기장 앞에서 엉엉 울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학창 시절 역시 축구와 궤를 같이 한다. 장 교수는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소질이 열정을 따라가진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심판이었다." 장 교수는 그라운드의 '에이스' 자리는 포기했지만 '포청천'으로 거듭났다. 친구들이 용돈을 모아 축구화를 살 때 장 교수는 플라스틱 경고카드를 샀다. 축구 규칙이 담긴 교본도 사서 열독했다. 그 결과 장 교수는 고교 시절 다른 학교에서 심판을 봐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고교 시절 심판으로 100경기 출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조촐하지만 기념파티도 했을 정도다.
장 교수에겐 어떻게든 축구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축구의 본고장을 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장 교수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체육대학에 들어가서 축구를 더 파고 들고 싶었지만 80년대 중반에는 실기시험을 통과해야만 체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결국 장 교수는 국문과로 발길을 돌리게 됐다. "축구와 계속 함께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국문과를 택했지만 그렇다고 축구를 버릴 내가 아니었다." 1990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장 교수는 아내와 함께 '축구종가' 영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장 교수의 지도교수가 "영국 가서 연극학 공부한 사람이 없으니 가서 해보라"는 조언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장 교수의 속마음은 이미 축구의 본고장에서 직접 유럽축구를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지금이야 유럽 축구를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시엔 유럽 축구에 대한 정보 자체에 목말라 있었던 상태였다. 가서 원 없이 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장 교수의 축구 열정은 영국에서 만개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프리미어리그'는 물론 관중이 500명도 안 되는 아마추어들의 6부, 7부리그 경기까지 틈만 나면 쫓아다녔다. 장 교수는 2000년까지 장장 10년 가까이를 현장에서 경기를 직접 관전하며 영국의 선진 축구 시스템을 눈에 익혔다. 영국 내 각 종교단체와 기업 직원 등을 상대로 '재영(在英) 한인 축구리그'를 조직해 직접 운영하는 수완도 발휘했다.
갑자기 그런 그의 아내가 이역만리에서 고생을 많이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에 장 교수는 "94년 미국월드컵 당시에는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내가 가고 싶어서 끙끙 앓자 흔쾌히 다녀오라고 한 것도 아내였다"며 "축구와 동거를 허락해준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다"라고 전했다. 어쩌면 장 교수의 아내는 그와 결혼하기 전부터 축구와도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 영국 유학 시절 모습(위)과 미국, 프랑스 월드컵을 쫓아다니던 모습(아래) |
◇축구평론가, 그리고 기술위원
국내에 축구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이름 앞에 '축구평론가'란 단어가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다. 장 교수는 "94년에 '리뷰(현재 폐간)'란 잡지에 원고청탁을 받아 94년 미국월드컵에 대해 쓴 것이 시작이었고 이후 스포츠서울의 영국 통신원으로 활동한 것이 평론가로 일하게 된 큰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영국에서 통신원으로 일하며 축구에 대해 생각을 자주 펼쳐보일 수 있었고 자연스레 '축구평론가 장원재'로 불리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장 교수에겐 꿈 같은 일이 일어난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선임. 장 교수가 유럽 선진 축구의 흐름을 잘 알기 때문에 협회의 다양성 부족을 메워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비경기인 출신으로는 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체육과학연구원 신동성 박사가 기술위원을 지낸 일이 있지만 장 교수처럼 마니아 출신이 기술위원에 임명된 것은 최초였다. "당시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현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이 내게 전화를 했다. 허 감독은 유럽축구의 시스템과 정보를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현역 축구인 가운데 없으니 도와 달라 얘기했고 황송한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다." 이후 장 교수는 이회택, 허정무 등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 동료 기술위원들과 함께 대표팀 감독 후보를 선별하는 등 해박한 축구 지식을 바탕으로 맹활약했다.
![]() 원어민 강사 프로스트(위)와 함께 즐겁게 영어로 얘기나누고 있는 축구 꿈나무들. |
장 교수는 지난 4일 또 하나의 경력을 추가했다.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을 맡게 된 것. 영어마을에서도 그의 축구사랑은 활짝 꽃 피었다. 장 교수의 제안에 따라 6일부터 13일까지 14세 이하 축구 대표팀 선수 30명이 영어마을 파주캠프에 입소, 일상 회화와 축구와 관련된 영어 표현을 배우고 있다. 한국 축구 꿈나무들이 축구기술은 물론 영어실력까지 키우게 됐다. 장 교수는 "어린 선수들이 후일 해외진출을 위해선 영어구사 능력은 필수다. 해외 심판에게 당당히 어필할 수 있으려면 영어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영어마을 캠프 입소 추진배경을 전했다. 뉴질랜드의 내셔널리그 클럽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원어민 강사 알리스터 프로스트(30)는 "아이들이 수업에 흥미를 갖고 임한다. 영어를 좀 더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금방 실력이 늘 것으로 보인다"며 어린 선수들의 열의를 높게 샀다. 14세 이하 축구 대표팀의 주장 정호균(14·광양제철중)도 "훈련을 받으며 영어를 배우는 게 힘은 들지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재미 있다"며 "이런 기회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축구를 영어마을과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장 교수는 경영에도 신경써야 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장 교수는 영어마을을 국제적인 명소로 키우겠다는 당찬 계획을 밝혔다. "영어마을을 만들어 놓은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며 "중국과 일본, 대만 학생들도 외국 연수를 가는데 문화적으로 친밀하고 안전 문제도 완벽한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유도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보이스카우트 관계자가 현지 실사를 다녀 갔으며 몇몇 외국 단체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 곧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장 교수는 본업 외에 축구까지 아우르며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여유'를 빼앗아간 '축구'지만 장 교수는 그런 축구에 감사하고 있다. "축구로 인해 바쁠 때가 많지만 오히려 축구에 빠져 있을 때가 행복하다"는 장 교수. 축구는 그에게 인생 그 자체다.
이웅희기자 iaspire@sportsseoul.com
첫댓글 이런분들 많았으면 ㅋㅋ
이분 책 읽었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