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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향기로운 추억 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까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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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①》
1962년 6월20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내 법무관실. 부산일보 사장 겸 부일장학회 이사장 김지태씨는 흰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엔 5·16 직후 법무장관을 지냈던 고원증 장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씨가 자리에 앉자 고 장군은 미리 작성한 서류를 꺼내놓았다. 김씨가 14년간 애지중지 가꿔놓은 부산일보와 4년간 막대한 재산을 들여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한국문화방송 및 부산문화방송을 자진해 국가에 무상 기부하겠다는 기부승낙서였다.
아버지 김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인감도장과 인주까지 챙겨들고 달려온 장남 영구씨는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씨와 고 장군 사이에 실랑이가 오갔다. 김씨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버텼고 고 장군은 설득과 협박을 병행했다. 한동안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때 영구씨가 김씨에게 다가갔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고, 구속돼 있는 회사간부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구씨는 눈물을 흘리며 김씨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 이거 없어도 살아요. 그냥 포기하세요.”
김씨는 더 버틸 생각이었지만 아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파왔다. 김씨는 결국 고 장군이 원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후 김씨와 함께 구속돼 있던 회사 임원들은 군 검찰의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장면 ②》
1962년 6월20일 부산 대신동 교도소 면회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5·16장학재단 설립을 준비하던 고원증 장군과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김지태씨가 마주앉았다. 김씨는 수갑이나 포승줄에 묶이지 않은 채 하얀 모시옷 차림으로 자유스런 상태였다.
고 장군은 박 의장으로부터 김씨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속했으니 그 재산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관련 서류가 미비했다. 무엇보다 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교육부에 제출할 김씨의 기부승낙서가 필요했다. 일종의 요식행위였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날 고 장군이 김씨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침 김씨의 장남 영구씨가 도장을 들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고 장군은 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리 준비돼 있던 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김 사장, 이미 중정에 재산을 헌납하기로 약속했다면서요? 필요한 서류가 있으니 좀 찍어줘야겠어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김씨는 “내가 기증했으니 (도장을) 찍어야죠”라며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이틀 후 김씨와 임원들은 모두 풀려났다. 군 검찰이 공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중정 발표 김지태 혐의는 8개 항목
장면 ①은 김지태씨 유가족측의 주장대로, 장면 ②는 고원증 변호사의 진술을 토대로 1962년 6월20일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날짜만 같을 뿐 장소는 물론 상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한쪽은 강압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본인 스스로 순순히 재산을 헌납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년 전의 일인 만큼 어느 쪽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다. 당시 관계자들의 상당수가 고인이 된 상태여서 객관적 진술을 얻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 5·16장학회는 과연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수장학회의 탄생배경과 성격, 박 대표와 정수장학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단 조성래 단장은 “김지태씨 사건은 군사정부에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 언론사 사주의 제보를 빌미로 확대 시나리오를 짰다는 말도 있다”며 “철저히 조사해 반드시 그 진실을 밝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고 김지태씨가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을 당시의 외압 여부, 만일 있었다면 누구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느냐는 것, 그리고 부일장학회에서 5·16장학회로의 석연치 않은 재산이동 과정이다.
‘신동아’는 이 같은 주요쟁점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는 새로운 문건들을 단독 입수하는 한편 현존하는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확보했다.
먼저 김씨의 재산기부가 외압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1962년 김씨가 구속되는 과정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2년 3월27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부산지부는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국내재산해외도피 등의 혐의로 김씨를 비롯한 회사간부 10명에 대한 구속수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김씨가 사업차 독일을 방문한 후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러 있던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씨에게는 무려 8개항의 혐의가 적용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씨의 부인 송혜영씨도 관세법 위반 및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일본에 머물던 김씨는 4월말 귀국했는데, 김포공항에서 중정에 연행돼 곧바로 부산교도소에 구속 수감됐다.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김씨는 5월24일 결심공판에서 7년형을, 나머지 임원들은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5년까지 모두 실형을 구형받았다.
그런데 이때 군검찰은 김씨에게 농지개혁법 위반 및 관세법 위반에 대한 혐의만 적용했다. 재판부의 선고도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 바로 김씨가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문제의 6월20일이다.
박정희 “곧바로 내려가 풀어줘라”
당시 김씨로부터 도장을 받았던 고원증 변호사(1963년 준장 예편)는 최근 기자와 두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털어놨다. 바로 김씨의 혐의사실 자체가 터무니없는 내용이었고, 당시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지시로 이틀 뒤에 석방했다는 것. 고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내가 도장을 받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 박 의장이 (수사)기록까지 다 보고 올라오라고 했다. 다음날 김용순(군수기지사령관)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박 의장을 만났을 때 김용순이 김지태씨를 집행유예로 석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면 김씨에게는 전과가 생긴다. 사실 김씨는 명의 신탁한 토지를 등기하는 과정에 몇 사람이 생사도 확인 안 되고 연락도 안 돼 도장을 파서 찍은 것과 부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준 것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박 의장에게 ‘당시 10억 가까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등 좋은 일을 했는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럴 필요 있느냐. 앞으로 경제건설이 중요한데 공소취하해서 풀어주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의장이 김용순에게 ‘너 곧바로 내려가서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김용순은 그날 전용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풀어줬다.”
-김지태씨 입장에서는 억울했겠다.
“그렇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 변호사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인 5월20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법무장관을 지냈고, 그해 7월 5·16장학회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장학회 설립과 동시에 5·16장학회 상임이사와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는 등 장학회 초기단계에 누구보다 깊숙이 개입했다. 그만큼 내막을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처음부터 모든 게 박 의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고 변호사가 5·16장학회 설립작업을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박 의장이 이후락(당시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통해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만나보니 ‘몇 달 전에 기부를 다 받아놓았는데 재산이 자꾸 유출된단 말이야. 자네가 문화방송 사장을 하면서 김지태가 기부한 3개 회사로 장학재단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1주일 후 이번엔 평소 친한 후배인 신직수(다잇 최고회의 의장 법률특보)를 통해 또 연락이 왔다. 장학재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법률지식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맡아달라는 거다. 두 번씩이나 거절할 수 없어 ‘경험이 없으니 성과가 없더라도 책망은 마시라’며 결국 받아들였다.”
-김지태씨가 박 의장에게 이미 기부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문서를 본 적이 있나.
“그건 중정이 갖고 있겠지. 난 알 바 아니었고, 박 의장 말만 듣고 법률적으로 필요한 서류가 부족해서 보완작업만 한 것이다. 재단등록을 하려면 기부하겠다는 서류가 필요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걸 받으러 부산에 내려갔다가 온 거지.”
-5·16장학회 30년사를 보면 10만평의 땅을 장학회에서 국방부로 무상 양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전혀 기억이 없다. 내가 장학재단을 설립했을 때 땅은 없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기본재산은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등 3사뿐이었다.”
5·16장학회 설립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2년 7월7일 재단법인 창립총회가 열렸고, 1주일 뒤인 7월14일 교육부, 7월18일 서울시로부터 설립허가가 떨어졌다.
고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장학금을 지급할 재원 마련이 시급했다. 3사를 기본재산으로 등록하긴 했지만 이들 회사들은 장학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었던 것. 한국문화방송의 경우 사옥을 지으면서 오히려 2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게 고 변호사의 주장이다.
-장학회 창립임원을 보면 이관구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이 이사장을 맡았고, 윤일선(학술원 종신회원), 김연수(삼양사 회장), 이병철(삼성물산 회장), 김용우(전 국방장관)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누가 선정한 것인가.
“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지명했다.”
5·16 주체세력 조직적 개입
‘신동아’가 입수한 중정 부산지부장 박용기씨의 회고록을 보면 김지태씨 사건의 배후에 박 의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2000년 3월 발간된 ‘진주지(晋州誌)’에서 박씨는 1962년 1월2~3일경 박정희 의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김지태씨에 대한 조사를 지시받았다고 밝혔다. 박씨는 김씨를 구속했던 장본인이다. 그 내용 중 일부다.
[박 장군은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김지태씨에 대해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한 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다,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철저하게 조사할 것 지시.
구속수사중 김용순 장군은 현재 최고회의 의장의 심정은 김지태씨 재산 중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절충 합의하라며 본인이 직접 하라는 요지였음. 후일 최고회의 법률고문인 신직수(후일 법무장관, 중정부장 역임)씨가 교도소를 직접 방문해 재산헌납에 날인 받았다 함.]
김지태씨의 재산 기부행위는 이 같은 박씨의 회고록과 앞선 고 변호사의 진술로 알 수 있듯 분명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게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씨의 재산이 5·16장학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군부주체세력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김지태 인감도장은 하나였다
‘신동아’가 입수한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의 ‘기부승낙서’ 문건에는 누군가 조직적으로 관여, 조작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은 사장 김지태씨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닌, 윤우동 윤수동 김대윤 정종철 김종한 등 회사 주요 임원들의 명의로 분산돼 있었다. 비록 ‘명의신탁’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3사의 재산이 5·16장학회로 귀속되기 위해서는 김씨 뿐 아니라 임원들이 직접 작성한 ‘기부승낙서’가 있어야 한다.
‘기부승낙서’는 5·16장학회가 정당하게 기부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서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됐고, 일부 내용에서 가첨(加添)된 흔적이 발견됐다면 기부원인 무효에 해당하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실소유주인 김지태씨의 ‘기부승낙서’는 모두 3부다. 그런데 부산일보 주식에 대한 ‘기부승낙서’에 찍힌 도장이 한국문화방송 문서에 찍힌 도장과 다르고, 부산문화방송 문서의 것과도 다르다. 미리 작성된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김씨 유가족들의 주장을 감안할 때 필체가 다를 수는 있지만 도장이 다르다는 것은 누군가 인감을 위조해 허위로 서류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다.
‘혹시 회사별로 별도의 인감을 사용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김씨의 장남 영구씨는 “아버지의 인감도장은 하나고, 1962년 6월20일 군법무관실로 가져갔던 것도 바로 그 도장이었다”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헌데 문서 작성일자를 보면 한자로 6(六)월20(二十)일로 돼 있던 것이 ‘二’ 위에 ‘一’이 가첨돼 30(三十)일로 조작된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유가 뭘까. 누가 이 문서를 위조, 조작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추론해보자면 20일은 김지태씨와 임원들이 구속된 상태인 만큼 차후 누군가 문제제기를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석방된 이후인 30일에 작성된 것처럼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다른 임원들의 문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김씨 처남인 윤우동씨의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서울문화방송 3개사 주식 ‘기부 승낙서’에 찍힌 도장이 모두 다르다. 윤씨의 문서는 심지어 주소까지 틀리다. 부산문화방송과 서울문화방송 기부 승낙서상 주소는 ‘동래구 거제동 840’인데 반해 부산일보 주식 기부 승낙서에는 ‘동래구 온천동 315’로 적혀 있다. 누군가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당시 3사의 임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김종한(당시 부산일보 부사장)씨는 이와 관련 “기부승낙서라는 문서를 본 적도 없고, 그 문서에 도장을 찍은 일도 없다. 물론 인감증명서를 내주지도 않았다”면서 “재산을 강탈해갔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아마도 누군가 도장을 새겨서 찍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는 김성은 국방장관 명의로 1963년 10월21일 한국생사주식회사 이사장인 김지태씨에게 ‘감사의 공문’을 보냈다.
“1962년 4월11일자 구 부일장학회 이사진 결의에 의거 정부에 기부하신 부산시 동래구 우동 1127번지의 10 외 246필지 지적 9만9451평을 5·16장학회 이사장 이관구씨로부터 우선 양도 받아 등기 이전중에 있습니다. 위 재산은 군사상 지극히 긴요한 영구시설 부지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막대한 사재를 기부하여주신 귀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故 김지태씨의 ‘나의 이력서’
김씨측에서 봤을 때 국방부의 공문내용은 좀 엉뚱하고 황당하다. 문제는 국방부가 거론한 4월11일에 부일장학회 이사진에서 기부를 결의한 바 없고, 특히 그날 김씨는 국내가 아닌 일본에 있었다는 것. 김씨의 유가족은 그 증거로 같은해 4월2일 일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진단서를 제시했다. 유가족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씨는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감사편지를 받은 셈이다. 기분이 어땠을까.
김씨의 유가족들은 5·16장학회에 빼앗긴 재산을 되돌려받기 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명예회복과 ‘아버지 김지태씨의 생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다.
김씨의 5남 영철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여러 차례 되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오랜 기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서 “박 대표가 정수장학회, 그 전신인 5·16장학회의 설립과정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바람처럼 재산을 되돌려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개인재산이 아닌 공익재산이기 때문이다.
고 김지태씨가 생전에 쓴 ‘나의 이력서’를 읽다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와 문화사업의 공익재단이 5·16장학회의 공영제 운영으로 넘어가서 당초 기약했고 목적했던 사회봉사라는 이상이 확대되고 또 영원할 것이므로 나는 이와 같은 운영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또 만족스레 생각한다. …내어던진 재산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면 모름지기 공영제의 운영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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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부정축재 장물유산 영남대…영남대, '校主 박정희' 청산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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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校主 박정희' 청산은 가능할까
[오마이뉴스 2004-08-15 21:12]
[오마이뉴스 이승욱 기자](최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이 논란이 된 가운데 박 대표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이른바 '장물유산'들이 새삼 거론되고 있다. 정수장학회에 이어 영남대학교도 그 하나로 일부 대구지역 언론에서 이미 이 사안을 거론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주(校主)'로 있는 대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의 설립 비화, 청구대가 박 정권에 의해 대구대와의 합병으로 영남대가 된 과정, 청구대 설립자 고 최해청씨 아들의 증언, 박정희 사후 그의 자녀들의 영남대 되찾기 등을 상-하 두 차례에 걸쳐 집중보도한다... 편집자 주)
▲ 영남대 중앙도서관 - 영남대와 박정희의 관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재는 건물의 구조를 변경하고 내장재를 교체하는 등 '리노베이션' 공사 중이다. ⓒ2004 오마이뉴스 이승욱
영남대학교 경산캠퍼스가 점점 가까워지면 우뚝 솟은 회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75년 건립된 이 건물은 총 21층(지하 1층 포함) 높이의 영남대 중앙도서관.
영남대 도서관은 박정희와 영남대의 밀접한 관계를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다. '초고층' 도서관의 건립 배경과 관련된 '추측'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하나는 박정희와 김일성의 체제 경쟁의 산물이라는 것.
영남대 도서관이 건립될 70년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도 고층 도서관이 들어서 있었다. '자존심'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라면야 빌딩 높이를 두고도 신경전이 날 법하다. 박정희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그것보다 높은 21층 높이로 도서관을 지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추측은 아랫사람들의 '충성' 경쟁의 산물이라는 추측이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의 합병 이후 건립된 영남대. 그곳을 순시하기 위해 영남대로 이동하던 박정희는 수행원들에게 '영남대는 어딨냐'고 물었다고 한다.
영남대 도서관을 통해 본 '영남대와 박정희'
결국 당대 최고권력자 박정희가 사실상 교주(校主)나 다름없는 영남대를 어디서든 눈에 잘 띄도록 고층 건물로 짓는 '대작업'에 착수했다는 것. 두 가지 추측 중 후자가 '정설'로 전해오고 있다. 물론 이들 역시 추측을 근거로 '호사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정도다.
영남대와 박정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이런 '추측'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영남대가 지난 97년 펴낸 <영남대학교 50년사(年史)> 곳곳에는 영남대를 '세운' 박정희의 이야기가 드러나 있다.
"영남학원과 영남대학교는...영남이 배출한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이념을 우리 법인과 학교의 교육정신으로 삼아갈 것을 우리는 다짐한다."(67년 통합 당시 이사들의 결의문 중)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박정희 '서거' 후 수 십년이 흘렀지만 영남대의 '주인'이 여전히 박정희라는 점이다. 영남대 재단인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정관 1조(목적)는 다음과 같다.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校主)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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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 '교주 박정희'의 대학
재단 정관 속에 '교주 박정희'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은 지난 82년의 일이다. 이는 사실상 '영남대 주인은 박정희'라는 것이 명문화된 셈이다. 이미 '죽은' 박정희를 현존하는 영남대와 연관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점 때문이다.
명문화된 '교주 박정희'는 박정희의 교육이념을 떠받들고 있다는 영남대의 설립 정신과 뭉쳐져 영남대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 교주 박정희는 그의 후손들에게 영남대의 권리를 주장하는 명시적인 근거가 된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정수장학회와 더불어 영남대 역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관련성'이 있었다. 박 대표가 영남대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0년의 일이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이듬해인 80년 3월 박 대표는 '신군부'의 양해를 얻어 영남대로 들어선다. 당시 그는 영남학원의 재단 이사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인 근영('서영'으로 개명, 현 육영재단 이사장)씨는 그로부터 2년 후인 83년 이사로 영남대에 발을 딛는다.
이전에는 박정희의 측근이자 대리인격의 이후락 등이 박정희를 대신해 영남대 이사로 참여했지만,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영남대의 운명은 박정희의 '딸'들에게 맡겨진 것. 이사로 들어온 박근혜 대표는 채 한달도 지나지 않은 80년 4월24일 영남학원 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앞서 3월 21일 서울에서 전 이사장 이효상(전 국회의장)은 법인 이사회를 열고 인사를 단행했다. 그러나 '박근혜 이사장' 체제는 그해 11월 막을 내린다. 당시 박 대표의 이사장 취임은 학내 민주화 운동의 촉발제가 됐던 것이다. 영남대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근혜 대표 등 일가의 영남대 진입과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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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의 이사장 취임을 애초부터 반대해왔던 영남대 교수협의회(79년 발족)는 '구교성명서'를 발표했다. 학생들 역시 연일 시위를 벌였고, 5월 들어서는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천막농성'도 이어졌다.
80년 5월 14일. 영남대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1만 여명의 교수·학생들이 교문 앞으로 집결했고, 이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당시 대구시내에 있는 대명동 캠퍼스까지 진격했다.
결국 박 대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11월 18일 이사장직에서 이사로 물러나고, 류준을 이사장으로 하는 7대 체제가 들어선다. 그러나 이사장을 물러나긴 했지만 영남대 재단은 박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정체제'로 구축되고, 박 대표의 동생인 근영(서영)씨도 이 때 영남대 이사로 들어온다.
영남대에서 '박정희 일가'(一家)가 일시적 '후퇴'를 하는 것은 그로부터 8년후인 1988년 11월의 일이다. 이후 박근혜 대표는 구 재단의 전면 퇴진의사를 밝힘으로써 영남대에서 박정희 일가의 지배 체제는 '일단' 종식됐다.
당시 박 대표이 영남대에서 손을 뗀 직접적인 이유는 학교 운영과 관련한 비리문제. 박 대표가 퇴진한 88년 당시 대학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교육계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사학비리 조사가 실시됐다. 그 해 10월 국회는 광주 조선대와 함께 영남대에 대한 국정감사를 벌인다.(※ 맨하단 박스기사 참조)
당시 영남대 국감의 주요한 이슈는 ▲ 박 대표 등 재단의 정통성 결여 ▲ 영남투자금융의 주식매출 비리 ▲ 재단 부동산 처분과 편취 ▲ 입시부정 등이었다.
결국 국정감사 한 달여만인 11월 2일, 박 대표와 구 재단은 영남대에서 '손을 뗀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영남학원은 관선이사 체제로 전환되고 민선 총장을 선출하면서 학원 민주화의 토대를 닦으며 16년간 관선이사 체체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불안한 '88년 체제'... 박정희 일가 복귀는 시간문제?
그렇다면 박 대표 등 박정희 일가가 영남대에서 '손을 뗐다'고 해서 영남대의 '박정희 청산' 작업이 마무리됐는가? 또 박정희 일가와 영남대가 '결별'해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 것인가. 그러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소위 '88년 체제'는 한마디로 불안정한 체제다. 마치 총성 없는 전쟁을 잠시 쉬고는 있지만 언젠가 다시 터질 수 있는 '휴전' 상황과도 같다. 88년 체제가 허물어지면 다시 첨예한 대립이 빚어지고 영남대의 향배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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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김태일(정치행정학부) 교수의 말이다. 아직도 당시 구 재단측 인사들이 영남대에 '포진'해 있고, 대책없이 관선체제가 정리될 경우 88년 이전 체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담은 분석이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영남대 재단인 영남학원의 한 관계자는 "구 재단의 복귀 움직임은 최근들어 전혀 없었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그동안 박정희 일가의 영남대 복귀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 2001년의 근영씨의 재단 복귀 움직임이었다. 당시 영남대 주변에서는 '구 재단측이 100억원 투자를 대가로 재단 복귀를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영남대 교수와 민주동문회, 학생들은 발칵 뒤집혔고, 결국 부정적인 여론으로 인해 이 일은 '없던 일'로 끝이 났다.
근영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육영재단'의 한 관계자는 당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과거 정치적인 시류에 의해 박정희 일가가 자리(영남대)를 떠나야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 구 재단 복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구 재단측 "박정희 일가 제자리 찾아야"
현 총장도 "재단 이사 참여 반대 안해"
근영씨는 2001년말 교육청의 지시사항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쫓겨난 후 법정공방 끝에 지난달 이 재단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이 뿐만 아니라, 근영씨의 재단 복귀 시도가 있었던 지난 2001년 여름 영남대 이상천 현 총장과 박근혜 대표의 만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당시 양측은 장시간 재단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7월 29일자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총장은 당시 만남에 대해 "설립자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대학의 사유화는 곤란하다는데 공감했다"면서 "공익성 재단을 지향하는 한편 설립자의 정신 계승이란 측면에서 그 후손이 재단 이사로 참여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정확한 일정만을 밝히지 않았을 뿐 박정희 일가의 재단 복귀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 일가의 재단 복귀를 '원천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대학 구성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영남대 민주동문회 황원일 회장은 "그동안 박정희 일가의 재단 복귀 움직임은 빈번히 있어 왔지만 우리로서는 어떤 형태로의 복귀도 절대 반대"라면서 "재단 이사로 복귀를 제한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교주 박정희'와 맞물려 영남대의 사유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남대의 한 현직교수도 "이 총장이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면서 "재단 이사 참여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먼저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총장의 사고방식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어떻든 박정희 일가의 영남대 복귀 문제는 언젠간 터질 문제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6년 관선이사 체제로서의 한계가 나타나고 그 종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두루'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관선체제가 재단의 투명성을 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책임성 있는 적극적 경영이 어렵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이에 따라 영남대는 지난해 말부터 소위 '영남대학 발전협의회'를 꾸려 재단 정상화 방안을 강구 중이다. 현재 ▲ 인천대학을 모델로 한 도립대학화 ▲ 상지대 모델인 시민대학화 및 공익재단화 ▲ 성균관대 모델로 한 기업이나 개인에 의한 책임경영 등이 제시되고 있다.
영남대의 '박정희 청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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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 전경 - 멀리 본부 건물이 보인다. ⓒ2004 오마이뉴스 이승욱 |
관선이사 체제에서 정식이사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구 재단의 복귀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어떤 모델이 선택되더라도 영남대에서 '교주 박정희'와 그의 일가에 대한 과거 청산이 필수적이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영남대 본부의 한 교직원은 "영남대의 주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면서 "박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영남대가 성장한 것도 무시 못하는 측면이 있어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직원은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이미지의 영남대를 생각한다면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일가를 털어내지 않는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영남대 민주동문회 황원일 회장은 "여전히 독재자 박정희를 한 대학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영남대에서 과거사 청산은 박정희 일가의 재단 복귀를 막고 영남대의 새로운 정신을 찾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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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이 카페의 카페지기입니다.김대중 대통령님과 노무현 대통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