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숨겨진 이야기와 예술 세계
미켈란젤로의 숨겨진 이야기와 예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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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탁월한 르네상스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의 정교한 그림들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인 '다비드'를 조각한 인물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한때 '신성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미술 사기 시도가 실패한 후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는 그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생활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많은 사실들이 있다.
이 갤러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아보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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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였다.
그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제에서 태어났다.
라이벌에게 공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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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집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던 중
미켈란젤로는 질투심 많은 라이벌
피에트로 토리지아노(사진)와의 불화에
휘말리게 되었다. 토리지아노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가격하여 코가 부러지고 영구 기형이 되었다.
사기를 통해 명성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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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사진)은 우연히
미켈란젤로에게 큰 기회를 주었다!
리아리오는 미켈란젤로가 산성 흙으로
고대 물건처럼 보이게 만든
잠든 큐피드 조각상을 획득했다.
리아리오는 이 속임수를 알아차렸지만,
젊은 사기꾼의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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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이자 '자비의 성모'는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의 핵심 작품인
'피에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마리아에게 안겨 있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이름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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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작품의 출처에
의문이 제기되자 서명했다.
그는 마리아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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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사진)에 대한
강한 반감을 키웠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두 인물은
예술에 대해 정반대의 두 가지 태도를 취했다.
세 번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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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인 '다비드'는
미켈란젤로가 1501년에서 1504년 사이에 제작했다.
하지만 그가 이 조각 의뢰를 받은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다.
조각이 탄생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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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1464년 피렌체 조각가 아고스티노 디 뒤치오가
카라라에서 채석한 거대한 대리석 블록을 사용하여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1475년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버려진 대리석으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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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조각가 모두 거대한 대리석에서 발견된
결함 때문에 결국에는 제작을 거부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버려진 대리석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고, 4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품을 제작했다.
비아조 다 체세나를
지옥으로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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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의 전체 제단 벽을 덮고 있다.
이 걸작은 많은 벌거벗은 인물들을 묘사하여,
교황 바오로 3세의 의전 책임자
비아조 다 체세나의 분노를 일으켰다.
미켈란젤로는 비아조 다 체세나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불만을 품은 성직자를 지옥의
영혼의 판사 미노스로 묘사하여, 악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가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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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마지막 심판'을 만들 때 성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프레스코화의 한 부분에 성 바르톨로뮤의 양식화 버전으로
등장하여 사실상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가장한다.
경력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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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당 천장은 1508년에서
1512년 사이에 그려졌으며,
완성하는 데 4년이 걸렸다
또 다른 자기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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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이른바 '플로렌타인 피에타'에서
자신을 성 니코데무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품고
작품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하인에게 제지당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무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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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장엄한 돔의
완성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미 화가로서 은퇴한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신체적으로 현장을 방문할 수 없게 된 후에도
집에서 작업을 계속 감독하며 그림과 디자인,
답변을 조수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냈다.
다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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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창의적인 천재성은 시로 확장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300편 이상의 시를 썼는데,
사랑과 죽음과 같은 광범위하고 영적이며
신비로운 주제를 다루었다.
율리우스 2세의 변덕을
감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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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가장 후한 후원자 중 한 명이지만,
다소 전투적인 후원자는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을 의뢰했고,
라파엘로를 고용하여 라파엘로 방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성질이 급했고, 미켈란젤로와의
관계에는 긴장감이 있었다.
교황에게 고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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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미켈란젤로는 1505년부터
율리우스 2세부터 비오 4세(사진)까지
연속으로 9명의 가톨릭 교황을 위해 일했다.
부동산 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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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부유한 바티칸 현직자들로부터
많은 보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에
광범위하게 투자하여 추가 수입을 창출했다.
엄청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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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켈란젤로는 중세 기준으로
다빈치, 라파엘, 티치아노보다 훨씬 더 부유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5만 플로린, 즉
오늘날 약 2,750만 달러의 가치의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때때로 가난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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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켈란젤로와 같은 존경받는 인물도
가끔은 급여를 기다려야 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켈란젤로는
13개월 동안 교황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반박하고 있다.
피렌체를 위한
요새를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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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가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후
미켈란젤로의 건축가로서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메디치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피고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적 대의에 동조한 미켈란젤로는 도시 요새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0개월 후 교황의 군대가
도시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을 때 이 방어시설은
강력한 장애물이 되었다. 다행히 클레멘트 7세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반란에 가담한 것을 용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켈란젤로는 반역죄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피에타'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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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헝가리 태생의 호주 지질학자 라슬로 토스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죽음에서 부활했다"라고
외치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망치로 파손했다.
이 조각상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나,
결국 바티칸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후 토스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진단받았다
'다비드'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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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무의미한 파손 행위로, 1991년
실업자인 이탈리아 남성 피에로 칸나타가
끌로 '다비드'의 왼발을 파손시켰다.
그는 두 번째 발가락 끝 부분을
망치로 부수었다.
비참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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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상당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 사실 그는
거의 비참한 생활을 했고
종종 옷과 부츠를 입은 채 잠을 잤다. 그리고
거의 목욕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자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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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대부분 고독한 삶을 살았으며,
알려진 연인 관계는 거의 없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여성과 연애를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가 남성에게 끌렸을 것이라는 일부 추측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의 성적 취향을 확실히 확인할 수 없다.
세 권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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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생애 동안 세 권의 전기가 출판되었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영예였다.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그의 작품이 역사상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초월하며,
"한 가지 예술에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모두에서
최고"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전기 작가인 파올로 조비오(사진)는
그의 성격을 "매우 거칠고 무례하며 그의 생활 습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묘사했다.
장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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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8일
로마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남성의 평균 수명 약 60세에
비해 훨씬 더 오래 살았다.
피렌체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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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있는
화려한 무덤에 묻혔다.
출처
(Walks of Italy)
(History.com)
(Michelangel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