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배신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 세계까지 망가져가는 카미유 클로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울증과 피해 의식, 편집광적 증상을 보이며 거리를 방황하고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대지만, 그러나 결국 그녀는 어둡고 침침한 지하 별장에서 고통 속에 빚어낸 여러 작품들을 뒤로 하고 정신 병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실려가게 된다.
영화「카미유 클로델」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조각품들을 미친 듯이 깨부수는 그녀의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감성을 넘치도록 부여받은 예술가들에게 사랑이나 욕망은 축복인 동시에
형벌이었을 수도 있다. 예술가들의 화폭을 넘나드는 격정적이고 흥미진진한 스캔들.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스캔들은 아마도 로댕과 클로델의 그것일 것이다. 로댕이
카미유를 처음 만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친구인 조각가 알프레드 부셔가 로마로 떠나면서 자신이 지도하던 카미유를 로댕에게 맡긴 것이 그 인연의 시작이다.
이때 카미유의 나이 열아홉 살.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카미유는 로댕의 학생에서 정식 조수로 채용되는데, 그것은 직업적인 ‘승격’의 의미를 넘어 본격적인 사랑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였다. 공무원(등기소 소장)의 딸로 태어나 조신하게 자란 처녀가 “내 인생의 꿈은 모두 악몽” 이라고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모진 사랑의 광풍 앞에 빨려드는 순간이었다. 조각가가 되려는 그녀의 뜻에 심하게 반대했던 그녀의 부모는 어쩌면 더 필사적으로 반대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운명 이었다. 카미유가 로댕의 조수가 된지 3년이 지나도록 그녀의 부모는 딸의 애정 행각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둘의 사랑은 은밀했고 또 집요했다. 당시 로댕이 카미유에게 쓴 편지에는 이 열병의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소.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이처럼 카미유가 로댕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상했지만, 그러나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로댕 곁에는 늘 그를 지키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침모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무려 53년간 로댕에게 헌신한 로즈 뵈레가 그녀이다. 1864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로댕의 나이 스물네 살 때 만난 두 사람은 가장 어렵고 고달팠던 시기를 함께 보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로즈는 조강지처였다. 1886년 로댕은 그때까지 22년 간 함께 살던 로즈와 헤어지고 카미유와 해외로 나가 살겠다는 계약서 초안까지 썼지만, 이 약속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로댕의 말마따나 “동물적인 충성심”으로 평생 자신을 따른 로즈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댕의 이런 우유부단한 태도에 너무도 실망한 카미유는 1890년대 들어 해석증이라는 중증 편집증에 빠져버린다. 당시 카미유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는 그녀가 남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또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누워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변해버립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더 이상 저를 속이지 말아주세요”
1892년 로댕과 결별한 뒤 카미유는 한동안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정신질환이 악화되면서 그녀의 모든 추구는 갈수록 뒤틀려 버렸다. 1906년 사랑하는 남동생 폴 클로델마저 일 때문에 자신의 곁을 떠나자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들을 부셔버리고 창작 활동을 중단했다. 1913년 그녀를 격려해주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와 주치의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해버렸고, 20년의 잔인한 수용생활 끝에 쓸쓸히 생애를 마감했다.
첫댓글 자주 드르지만 글은 처음 남깁니다. 허락 없이 제가 감히 글 올려도 될지...제가 좋아하는 이주헌의 그림이야기에서 발췌한 부분 이어서 중복될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중복으로 올렸다면 알려 주십시요.
밍키별 님, 처음으로 올려셨다니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게시물로 뵙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