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때는 고구려, 백제 , 신라 삼국이 생사를 걸고 치고 받고 하던 삼국시대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경과 불상을 전해옴으로 불교가 전래됐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돼었습니다. 그러면 신라는 언제 어디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던 걸까요?
신라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선산 도리사
4세기경,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통해 불교가 전래된 반면, 신라의 불교 전래에 관해선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9대 눌지왕때 사문(중)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지금의 선산)에 이르자, 그 군에 사는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고 그를 편안히 지내게 했다. 이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의복과 양을 보내 왔는데 군신들이 향의 이름과 사용법을 알지 못해 향을 가지고 온 나라에 사람을 보내 두루 묻도록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는 말했다.
'이것은 향이라는 것입니다.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게 나는데, 그 향이 신성한 곳까지 미칩니다. 신성한 것 가운데 삼보(불,법,승. 즉 부처, 불교의 이치, 승려)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태우면서 원하는 바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왕의 딸이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태워 빌게 하니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많은 상을 내리려 했으나 잠깐 사이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또 21대 비처왕(소지왕) 때에 승려 아도가 시자(侍者)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는데 거동과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그는 그곳에 몇 년을 살다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시자 세 명은 머물면서 불경을 강독했는데, 가끔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아도본비 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 어머니는 고도녕이다. 정시 연간에 조위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녕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이 떄문에 아돌르 임신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도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출가시켰다. 아도는 열여섯 살 때, 위나라에 가서 아굴마을 만나고 승려 현창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웠다. 열아홉살이 되어 어너니에게 돌아와 문안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나라는 지금 불법을 모르지만, 앞으로 3000 여달이 지나면 신라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도읍에는 가람을 세울 자리가 일곱 군데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 천경림(흥륜사)이고, 둘째는 삼천기(영흥사)고, 셋째는 용궁남쪽(황룡사)이고, 넷째는 용궁북쪽(분황사)이고, 다섯째는 사천미(영묘사)고, 여섯째는 신유림(사천왕사)이고, 일곱째는 서청전(담엄사)이니, 모두 전불(前佛. 석가모니 이전에 이세상에 나와 성도하고 돌아간 부처. 전불은 석가세존, 후불은 미륵불이라 한다)때의 절 터며 법수가 오래 흐르는 땅이다. 네가 그곳에 돌아가 대굘르 전파하면 마땅히 이 땅에서 불교의 개조가 되리라.'
아도화상 진영. 1920년대 그린 것으로 현재 김천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있음.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신라에 도착하여 왕성 서쪽에 머물렀는데, 그곳이 지금의 엄장사이다. 이때가 미추왕 즉위2년인 계미년(263)이다. 아도가 대궐에 나가 불법을 전하려 했으나, 세상에서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의심하면서 심지어 그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래서 아도는 속림(지금의 선산) 모록(모례라고도 함)의 집에 숨었다
미추왕 3년에 성국공주가 병이 났ㄴ느데, 주술과 의약이 효엄이 없어 칙사가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아도가 스스럼없이 대궐로 들어가자 공주의 병이 나았으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소원을 물었다.
"소승에게는 바라는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짓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빌고자 합니다"
왕이 허락하여 공사를 시작했다. 이떄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지붕으로 집을 지어 머무르며 가르치니, 이따금 하늘꽃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름을 흥륜사라 했다. 모록의 누이동생 사氏가 법사에게 의탁해 여승이 되어 역시 삼천기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이름을 영흥사라 했다. 얼마 후 미추왕이 승하하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그러자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놓고 문을 닫아 목숨을 끊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불교가 없어졌다.
제23대 법흥대왕이 514년에 재위에 오르자 불굑가 흥성하게 되었는데, 미추왕 계미년(263년)으로부터 252년이나 된다. 고도녕이 말한 3000 여달이 입증된 것이다.
이럿듯 본기와 본비 두가지에 나오는 설이 서로 상이하다. 또 시대도 맞지 않고.. 현재는 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인으로 보는 추세이고 또 눌지왕때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아도화상이 해동(신라) 최초로 불교를 전래했다는 선산(구미)으로 잠시 카메라 들고,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로 세웠다는 도리사와 모례네 집 그리고 선산지역의 불교 유적을 찾아 나섰다. 필자에겐 경주 인근 지역을 벗어난 최초의 문화재 답사였답니다. ^&^
먼저 향한 곳은 보물 제1122호인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었다. 출발전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만 차에서 내리자 빗방물이 하나 둘....@@ 가는 길은 초행이라 모르겠고 구미시 황상동 90-14 번지를 네비게이션에 찍으면 된다.@@
차에서 내려 공단 건물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2분 정도 걷자 마치 여성의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부처님이 우산을 쓰고 지긋이 눈을 감은체 내려다 보신다.
보물 제1122호 황상동 마애 여래입상.
전설에 의하면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의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었는데, 위기를 모면하고 보니 이곳에 있던 여인은 간 곳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당나라 장수는 그 여인이 부처님이라 여기고 이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 한다. 물론 뻥이다. 마애불의 조성시기를 고려 시대로 보는 의견이 많은데, 삼국시대 전설은.. 뭐 어디를 가건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속칭 석현이라는 고갯길 좌측에 거대한 자연암벽의 동남쪽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조각한 거구의 마애여래입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잘 정제되어 있다. 귀가 길게 느리워지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어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이다. 양 팔에 걸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은 가슴부터 배꼽에 이르는 무늬가 양쪽 다리에 이르러 각기 완만한 활모양의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린다. 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있는데,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하여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엔 통일신라시대로 안내판엔 10세기 이후 고려시대 작품으로 나와 있는데, 어느게 맞는 건지..@@ 일단은 고려시대로..ㅎㅎ
노천에 있는 부처님 머리 위에 판석을 올리는 것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인데, 아무리봐도 판석이 근래 것처럼 보인다.
부처님의 발. 마애불이건 그림이건 사람의 발을 모아 표현이 하는 건 무척 힘들다 한다. 대단히 잘 표현하는 석공이나 화가나 가능한 일이라고... 발모양을 보니 영략없는 팽귄발로.. 아마 석공이 자신이 없었나 보다..
마애불을 보고 도로에서 바로 인근에 있는 구미 척화비를 보러 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게 심상치가 않다...@@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를 치른 후 서양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흥선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들 중 하나이다. 임오군란(1882년)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해 대부분 철거 되고 몇 몇이 남아 있다. 이척화비의 특징은 돌을 깍아 만든 비석에 글을 새겨 세워 놓은 것이 아닌 자연석 바위위에 세겼다는 점이다.
洋夷侵犯非戰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卽和主和賣國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戒我萬年子孫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丙寅作辛未立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구미시 해평리 526 번지로 향했다. 해평동 석조여래좌상은 해평동 보천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어딘지 모르는 초행길을 이리구불 저리 구불 가다가 산길로 약 500 여미터를 걸어 올라가자 드디어 산뜻하게 지어진 보천사에 이르렀다.
보물 제 492호 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
보천사의 본존불로 얼굴과 신체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구분이 잘 안된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탄력없이 쳐지고 있으나 배에 있는 띠 모양의 매듭은 독특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은 모양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의 표현과 부처가 앉아있는 대좌(臺座)이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모두 2중의 원으로 표현되었는데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다.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늬가 광배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윗부분에는 반원형태로 활짝 핀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중간과 아래부분은 8각형으로 각 면에 연꽃무늬, 구름무늬, 비천상 등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화려한 광배와 대좌, 단정한 체구와 얼굴 등에서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불상의 특징은 거신광배 주변에 화불이 7분이 세겨져 있다. 경주 지역의 불상의 광배에도 보통 7분의 화불이 있는데, 해평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의 화불의 특징은 좌우 대칭으로 두 분씩 4개의 화불, 그리고 맨위에 삼존불 형식으로 3분의 화불이 나란히 세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릎 부분 위엔 향로가 각 1개씩 세겨져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화불의 형태는 아니다.
코와 얼굴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 대좌에서 부터 광배까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전되었다. 목이 없어지거나, 심지어 두동강이난 경주 지역의 불상을 생각하니, 경주에 살고 있는 부처님이 좀 측은하기도 하다... @@
보천사에 이르르자 비는 쫘~~악 쏟아지기 시작하고.... 우산을 준비안해서...걍 비를 맞으며...ㅎㅎ
동행한 나의 사이버 스승님인 신라문화동인회 계림 선생님이 저기 세겨진 한자체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기억이 안난다.. 하여간 중국 어느 왕조 때 잠깐 쓰인 한자체라 한다. 측히 위에서 두번째 글자... 달 "월" 자라고 한다.
감로수라고 적혀 있는데... 감로수가 아니라 이건 영락없는 곡주, 막걸리 색깔이다. ㅎㅎ 아마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일 수도...
옛날 가난한 굶주린 사람에겐 쌀 씻은 쌀뜸물로 보였을 것이고.. 배고푼 간난 아기에겐 엄마의 맛난 찌찌로.. 딸기코 술꾼에겐 막걸리로 보였을 지도.. ㅎㅎ
보천사를 떠나 아도 화상이 신라 최초로 지었다는 태조산 자락의 도리사로 향했다. 도로에 세워진 커다란 산문을 지나 약 4km를 달리자 운무를 헤치고 도리사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비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 붓고 있었다.
주차장을 지나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이 "ㄱ" 자 형태로 된 설선당과 수선당이다. 불자들의 신행과 수행을 목적으로 1998년과 1994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구미 태조산 도리사 (太祖山 桃李寺)
한국불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기틀은 해동불교의 초전지 선산의 도리사에서부터 비롯된다. 묵호자로 알려진 아도화상은 신라불교 공인(법흥왕 15년 528년)에 앞서 눌지왕대(417-458)에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일선군(선산) 모례장자의 집에 머문 바 있다. 실로 신라불교는 이 아동화상의 전교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선산의 냉산 자락에서 어느 겨울날 오색의 복사꽃이 눈속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창건하니이것이 곧 해동 최초의 가람 도리사이다. 오늘날도 이웃한 도개엔 아도화상이 포교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모례장자의 유허지가 있고 모례장자의 집터엔 모례정이란 우물이 남아 있다.
무언가 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불자들의 쉼터네요. 독서도 하고 ...
수선당을 지나 게단을 오르면 태조선원과 극락전이 나옵니다.
태조선원은 정면 7칸 측면 8칸의 "ㄷ" 자 건물로 50평 크기입니다. 도리사가 선원을 운영하던 당시엔 해동선객들이 "제일도리"라 할 정도로 매우 이름난 선원이었습니다.
태조선원 옆에는 도리사의 중심 불전인 극락전이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15평 건물로, 17세기에 세워져 고종 12년(1875년)에 용해화상이 중수했습니다.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1876년에 만들어진 후불탱화가 봉안되어있으며, 신중탱화, 지장보살탱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는 도리사의 부속 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후불탱화. 금을 입혔군요. 불상에 금을 입히는 작업을 개금이라 합니다. 금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극락전 앞을 보면 요상하게 생긴 탑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 탑은 탑인데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탑, 가령 불국사 석가탑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탑 ㅎㅎ
도리사 석탑 (보물 제 470호)
이 석탑은 대웅전 앞뜰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5개층을 이루고 있는데, 맨 아래층은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으로 여겨진다. 위의 2개 층은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塔身部)이다. 탑신부의 1층과 2층 몸돌은 작은 정사각형의 돌을 2∼3단으로 쌓아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인다. 지붕돌 역시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각각 한면에 문틀을 돋을새김한 널돌이 끼워져 있어 문짝모양을 표현한 듯하다. 맨 위의 2개층은 탑의 머리장식받침인 노반(露盤)이 포개진 것인지, 아니면 위층만 노반이고 아래층은 탑신부로 보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탑들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몸돌과 지붕돌 윗부분의 층단구성이 모전석탑처럼 보인다. 이처럼 희귀한 모습을 한 탑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석탑옆에 보면 작은 개구멍 비스므리한 문이 있으니 그곳으로 나가 몇 걸음 아래로 향하면 좌선대와 아도화상 사적비 그리고 불답시주질비가 나옵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 6년)에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것을 적은 것이고 불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불량답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적은 것으로 1712년 (숙종 38년)에 세워졌습니다. 승통 능철이 주관하고 석수 김성원이 글을 썼습니다.
좌선대는 아도화상이 좌선을 했다는 바위입니다. 진짜인지는 저 모르죠..그당시 안살아 보았으니 ㅎㅎ
다시 도리사 석탑으로 올라와 극락전과 태조선원을 지나 위로 약간 오르면 세존사리탑이 나옵니다. 세존사리탑은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로, 도굴꾼에 의해 언덕아래로 가출한 것을 다시 찾아오는 과정에서, 안에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208호)과 수정같은 사리 1과가 발견되었습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국보 208호) 문화재청 사진자료
경상북도 선산군 도리사에 있는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사리함은 높이 17㎝로 기단, 탑몸,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평면 6각형으로 각 면의 기단에 안상을 뚫었다. 2면의 탑몸에는 불자(拂子)와 금강저를 든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상을 선과 점으로 새겼다.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으로 새겼다. 이들의 배치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이 되게 한 듯 보인다. 지붕 처마와 추녀에는 고리가 있어 장식을 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그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오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이 유행하던 시기에 6각형의 사리함이 나타났다는 점이 특이하며, 시대를 달리하는 종 모양 부도에 안치되었던 것도 특이하다 하겠다.
문화재청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이되서 진신사리로 판단을 한 것인지, 아님 사리기에 사리에 관한 기록이 나와서 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멋지게 사리탑을 세우고
적멸보궁도 지었습니다. 계단의 숫자가 48개라 합니다.
적멸보궁엔 부처님이 안계십니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사리탑이 보이죠.
적멸보궁에서 적멸(寂滅)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번뇌의 불을 끈 상태로 깨닭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을 이르고 열반, 즉 적멸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것이죠.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뜻합니다. 5대 적멸보궁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에서 있을 때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해 나타나 진신사리 100과와 불두골(부처님의 머리뼈), 가사 한벌, 손가락뼈 그리고 염주와 경전을 주었는데 요걸 신라로 가져와 영축산 통도사와 황룡사 구층탑에 모셨다고 합니다. 현재 자장율사에 의해 모셔진 사리가 현존하는 곳이 다섯군데인데, 통도 영축산 통도사, 그리고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입니다. 적멸보궁엔 부처님을 모시지 않습니다. 통도사를 제외하곤 모두 강원도에 있는데, 이 다섯 사찰을 5대 적멸보궁이라 부릅니다. 당연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겠죠. 요 근래 들어, 사찰에서 동남아나 인도로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긍께 사와서.., 와 사리탑을 세우고 적멸보궁을 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오리지날 적멸보궁이라 할 수 있는 사찰은 5대적멸보궁뿐이겠죠. 물론 감은사 3층석탑 사리기에서도 진신사리가 나왔습니다.
이 건물은 전국 어느 사찰을 가건 꼭 존재하는 건물입니다. 도리사 창건 당시부터 존재한 사찰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아도화상이 창건 할 당시의 원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아마 매일 위치가 바뀌었을 것으로 사료되는데, 이후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주위에 움막을 쳤을것으로 사료가 됩니다. 기와를 얹는 양식은 근래 들어서 유해을 합니다.
무얼까요? ㅎㅎ
도리사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고 특히 비오는 날 안개 낀 전경이 죽여준다고 전해져 오는데, 실제 전경이 아름답고도 신비했습니다.
아쉬움을 담기고 태조산을 내려와 식사를 한 후 다음 장소로 향했습니다.
비빔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간 곳은 선산 낙산리 고분군이었습니다
낙산리 고분군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98-4에 위치한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로 총 205기에 달하며, 낙동강 동쪽에 인접한 해발 700m 내외의 광범위한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무덤을 덮은 봉분은 원형과 표주박형으로 되어있고, 내부는 널무덤(토광묘), 독무덤(옹관묘), 돌덧널무덤(석관묘)으로 되어있다. 유물은 굽다리접시(고배)를 비롯한 토기류와 치레거리(장신구), 고리자루 큰칼(환두대도) 등의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들은 당시 이지역에 존재한 세력의 크기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까지는 문화재청 자료이고 현지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원삼국시대에서 뭐 어저꾸 저쩌구 나와 있는데, 실제 발굴에 참여했던 분의 이야기를 따르면, 발굴 당시 약 40 여개 정도의 무덤만이 봉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하더군요. 약 10 여기를 조사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무덤이었을것으로 의심되는 곳도 봉분만들고 만드다 보니 200 개 채우자고 해서 무덤 200 여기를 만들었다 합니다.
나오는 유물로 판단되는 것은 신라의 정복사업이 활발했던 내물왕 시대 경에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하더군요. 경상도 지역엔 진한 12국과 변한 12국이 있었고, 그 중 하나인 사로국이 주변을 정복하고 이후 지증왕때 국호를 신라로 바꾸게 됩니다. 진한 11국과 변한 12국 중 일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정복한 주변국을 직접 통치하기 보다는 처음엔 그 지역에 존재했던 세력에게 옥대나 금동관 등을 보내어 주고 대신 다스리게 했습니다.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들이 신라 왕경 지역의 무덤들(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들이라 하더군요. 원래 유적지 안내문을 보면 문화재청 자료나 실제 학자들이 판단하는 것보다는 뻥이 많은 편인거 같습니다. 지역 문화관광과에서 어떻게든 더 좋고 삐까번쩍하게 써 넣은 걸 선호하니...@@
도로변에 보이는 고분들을 보면 경주 금척리 고분군이나 선도산 기슭 서악리 삼층석탑 뒷편 고분군들을 보는 거 같습니다.
다음에 찾아 간 곳은 인근의 낙산동 삼층석탑
시골길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따라가자 폐교가 나오고 폐교에 차를 주차시키고 얼마 걸어 올라가자 멀리 아담한 탑이 하나가 반갑게 맞아 준다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보물 제469호)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4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 가운데돌에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3개, 즉 한 면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이 설치되어 있고, 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동그란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머리장식을 받치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의 구성방법은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선산죽장동오층석탑(국보 제130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유형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를 짠 수법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시기는 8세기경인 통일신라 전기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1층 몸돌에 감실이 있는 것을 보면 분황사 모전석탑을 보는 듯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느낀 것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는 고선사 삼층석탑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신라 시대엔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 이렇게 폐허로 변했을까? 주변에 국보인 죽장동 오층석탑이 있어 보러 가려고 했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국 포기를 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묵호자와 아도화상(현재는 동일인으로 추정을 하는 분위기임)이 고구려에서 처음 신라로 왔을 때 머물렀다는 모례장자의 집터였다.
잘 정돈된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니..모례장자의 집터엔 옛 우물만 남아 있었다.
모례가 정(毛禮家 井) 또는 모례정으로 불리운다.
모례가정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360-4)
이 우물은 도개리 마을 중앙에 위치하는데, 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인 모례의 집에서 사용한 우물로 전해진다. 모례는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왔으나, 탄압이 심해지자 자기집에 굴을 파고 숨겨주었으며, 후에 아도가 찾아 왔을 때도 3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며 자기집에 머물게 했다.
우물은 직사각형의 큰 돌을 쌓아 올려 큰 독모양으로 만들었다. 우물 깊이는 약 3m이고 단면은 가운데가 불룩하고 상하가 좁은 항아리 형태이다. 밑바닥에 두꺼운 나무 판자를 깔아 만든 것이 특징인데, 나무 판자는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 우물을 보면 왜 우물이 한자로 "井" 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우물돌(석정)이 영락없는 우물 井 자 이다.ㅎㅎ 경주 박물관에서 석정을 많이 보았지만 우물정자 모양의 석정은 처음 보는 순간이다.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이 탄강한 알영정이나 김유신 장군의 집터에 남아있다는 재매정도 사각형이라 하지만 우물돌은 남아 있지 않다.
보통 설화니 전설이니 하는 것은 자세히 보면 유물과 시대가 맞지 않는 대부분 후세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데 이 우물은 신라시대 우물의 전형을 보여줘 신빙성이 높은 편이다. 신라시대 우물의 특징은 위에 언급했듯이 가운데가 불룩하고 상하가 상대적으로 좁고 항아리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최초의 불교신자로 알려진 모례장자의 집. 어쩌면 신라최초의 사찰은 모례장자의 집이 아닐까? 꼭 번듯한 가람을 지어야 절이라고 해야하는가? 묵호자 또는 아도화상이 모례네집에 머물렀으니 모례장자의 집이 신라최초의 절이라 전해지는 태조산 도리사보다 먼지 일수도 ... 새로운 학설이네 ㅋㅋㅋ. 예전엔 절에 간다는 표현으로 "모례네집에 간다" 라는 말을 썼었다고 한다.
이곳엔 모례와 아도화상과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니 좀 적어 보겠다.
아도화상이 일곱 살 때 모례네집에 와서 머슴을 살면서 양 천마리와 소 천마리를 길러 모례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5년동안(위에는 3년으로 되어 있는데..@@) 머슴을 살고 열두 살이 되어 돌아 갈 때 그동안의 새경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모례가 아도가 떠나는 것이 섭섭하고 아쉬워서 (뭐가 섭섭한건지, 새경을 안받아서 이지, 아님 더 머슴살이 안하고 가는게 섭섭한 건지..) 가는 곳을 묻자, 아도는 "얼마 후 칡순이 당신집으로 뻗어 올것이니 그 칡넝쿨을 따라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요" 라고 하고 떠났다. 그 뒤 한 겨울에 정말 칡넝쿨이 모례네 문턱을 넘어 오니 모례가 칡넝쿨을 따라가 보니 냉산 자락에 아도가 있었다. (사실, 칡넝쿨을 따라간 것이 모례에겐 큰 실수 였다 @@).
아도는 모례의 인색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지라 큰 시주는 바라지 않는 듯, 딱 두말 정도 들어가는 망태기를 지어 내놓으며 "절을 지을것이니 시주나 좀 해 주소" 라고 하자 모례는 망태기를 보고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근데 요 망태기가 아주 요상한 것으로 쌀 한말을 붓고 두말을 부어도 한 말을 부었을때와 똑같았고 한 섬, 열 섬, 백 섬을 부어도 한 말을 부었을 떄와 같았다. 그렇게 쌀 천 석을 넣고도 약속한 두말들이 망태기를 채우지 못했다. 아도는 모례가 시주한 쌀 천석으로 한겨울에도 복숭아꽃, 오얏꽃이 만발한 냉산 자락에 절을 세우니 이것이 신라최초의 도리사라 한다.
그러나 모례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도리사는 날로 번창하여 승려들도 갈수록 늘어났으니, 가끔 마을로 내려와 시주를 청했는데, 두말들이 망태기에 혼이 난 모례네 집에서는 시주하면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청하는 시주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더욱 더 부자가 될수 있냐고 시주나온 스님을 붙잡고 묻자 스님은 "집 모양이 배 모양이니 돛을 세우면 좋을 것입니다. 부자가 될겁니다" 라고 하자 옳다구나 싶어 이 말을 쫓아 비석 세개를 세우니, 어라 점점 가세사 기울더니 금세 쫄딱 망해버렸다고 한다. 지금 마을에 세워진 입석이 그 비석 중 하나라 한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겠지만 어찌 보면 재미있고 어찌 보면 좀 야박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명색이 신라최초의 신자이고 시주를 천 석이나 했는데...ㅎㅎ
그래도 전설이라 하고 웃어 넘겨선 안될 것이 있다. 1970년대까지도 삼국유사는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불교관련 설롸나 그저 허구로 가득찬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요새도 그런가? 삼국유사를 전공으로 하는 사학자들이 꽤 많다.
모례란 이름에서 모(毛)는 털毛 자이다. 털,, 위에 아도가 머슴으로 살면서 양 천마리와 소 천마리에서 길렀다고 나왔듯이 모례네 집은 가축을 많이 길렀다. 그래서 이름이 털례 한자로 하면 모례가 되는 것이다.
이 모례가정의 주변은 도문 스님이 많은 돈을 들여 인근 수만평의 땅을 사들여 불교성지를 만들려고 노력 중에 있다. 땅을 매입해 기념관과 법당도 지었다. 도문 스님은 이외에도 불교 중흥을 위해 경주 남산 틈수골 천룡사지 부근의 땅도 수만평 매입하여 천룡사 삼층석탑도 복원하였고, 낭산 부근의 중생사와 인근 능지탑도 복원하셨다 한다. 또 경주 남산의 칠불암도 ... 아까 소개한 신라 최초의 가람 도리사의 중건에도 많은 힘을 쓰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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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주말 사찰순례에서 뵈옵기를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