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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는 1956년 처음 시작됐습니다.
조금 다른 역사를 상상해봤습니다.
만약 발롱도르가 시작된 1956년부터 아시아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발롱도르가 존재했다면, 매년 누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을까요?
이번 선정에서는 선수의 역사적인 위상이나 커리어 전체를 평가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그해의 활약을 중심으로 봤습니다. 개인 기량과 기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의 성과, 활약한 무대의 수준, 국제대회에서의 활약, 우승과 개인상 등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또한 단순히 가장 유명한 선수를 반복해서 선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시안컵이나 아시안게임, 월드컵처럼 특정 해에 열린 국제대회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가 있다면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만 1950~70년대 아시아 축구는 현재처럼 개인 기록과 영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기 몇몇 연도는 확정적인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남아 있는 기록을 최대한 비교해 재구성한 결과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각 연도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강력했던 경쟁자 한 명도 함께 선정했습니다.
1956년 수상자는 대한민국의 우상권입니다.
초대 아시안컵에서 3골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의 우승을 이끈 공격의 핵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대회를 시작으로 초기 아시아 축구의 강호로 자리 잡았고, 그 역사적인 첫 우승의 중심에 우상권이 있었습니다. 발롱도르가 처음 만들어진 바로 그해 아시아에서도 상을 줬다고 가정한다면 초대 수상자로 상당히 잘 어울리는 선수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스라엘의 나훔 스텔마크입니다. 초대 아시안컵에서 4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기 때문에 개인 기록만 놓고 보면 오히려 우상권보다 앞섰지만, 최종적으로는 우승팀의 핵심 공격수였다는 점에서 우상권에게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1957년에는 최정민을 선택했습니다.
‘아시아의 황금 다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최정민은 강력한 슈팅과 뛰어난 득점력을 앞세워 당시 대한민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았습니다. 국제대회가 많지 않았던 해라 객관적인 비교가 쉽지 않은 연도지만, 당시 선수의 위상과 대표팀에서 보여준 활약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말라야의 압둘 가니 민핫입니다. 메르데카컵에서 5골을 터뜨리며 이미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후 몇 년 동안 최정민과 함께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다투게 됩니다.
1958년 역시 최정민입니다.
대한민국은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결승에 진출했고 최정민은 대표팀 공격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1950년대 후반 최정민의 아시아 축구계 위상을 생각하면 2년 연속 수상자로 선정할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대만의 모쿠 힝입니다. 대만은 결승에서 대한민국을 3-2로 꺾으며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고, 황금세대의 핵심 선수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상 후보로 고려할 수 있었습니다.
1959년에는 압둘 가니 민핫이 최정민의 연속 수상을 막습니다.
말라야가 메르데카컵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했고, 대표팀에서도 꾸준하게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현미경 검수를 하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선수 가운데 하나인데, 당시 남아 있는 대표팀 득점 기록을 살펴보면 단순히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했던 공격수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기준으로 놓아도 대단한 골잡이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최정민입니다. 1950년대 내내 아시아 정상급 공격수의 위상을 유지했지만, 이 해만큼은 민핫의 구체적인 성과와 득점력을 조금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1960년은 조윤옥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아시안컵에서 4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고, 대한민국은 1956년에 이어 대회 2연패에 성공했습니다. 개최국이라는 이점이 있었다고 해도 아시아 최고 국가대항전에서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만큼 이 해의 수상자로는 상당히 명확합니다.
최대 경쟁자는 최정민입니다. 전성기의 마지막 시기에도 대표팀 공격진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두 번째 아시아 제패에 힘을 보탰습니다.
1961년에는 다시 압둘 가니 민핫입니다.
대표팀에서 연중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줬고 SEAP Games에서도 5골을 기록했습니다. 민핫은 이 시기 대표팀에만 오면 거의 경기당 한 골에 가까운 엄청난 득점 페이스를 보여줬는데, 아시아 축구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눈에 띄는 성과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다시 최정민입니다. 다만 이 무렵부터는 1950년대를 지배했던 최정민 시대가 저물고 민핫을 비롯한 새로운 아시아 스타들에게 중심이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62년에는 인도의 추니 고스와미를 선정했습니다.
주장으로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인도를 금메달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인도는 아시아 축구의 강호였고, 결승에서는 대한민국까지 2-1로 꺾었습니다. 팀의 리더이자 공격의 중심이었던 고스와미에게는 커리어를 대표할 만한 해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대한민국의 장경국입니다. 한국 역시 결승까지 진출했고 장경국은 대표팀 공격을 이끌었지만, 마지막 맞대결에서 인도가 우승했다는 차이를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1963년은 다시 압둘 가니 민핫입니다.
이 해를 다시 조사하면서 민핫의 평가가 오히려 올라갔습니다. 말라야컵 결승에서 셀랑고르가 페낭을 6-2로 꺾었는데 민핫이 혼자 무려 4골을 넣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도 득점력을 유지했고, 단년도 개인 퍼포먼스라는 우리의 기준에 잘 맞는 선수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일본의 야에가시 시게오입니다. 일본 중원의 기술적인 중심으로 활약하며 1960년대 일본 축구가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964년은 인도의 인더 싱입니다.
아시안컵에서 2골을 기록해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인도를 준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1962년 아시안게임 우승에 이어 인도 축구 황금기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 선수이기도 합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스라엘의 모르데하이 슈피글러입니다. 역시 2골로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우승했기 때문에 사실 이 해는 상당히 접전입니다. 개인 활약을 조금 더 중시해 인더 싱에게 근소하게 한 표를 줬습니다.
1965년부터는 수크 바하두르와 버마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수크 바하두르는 단순한 골잡이라기보다 버마 황금세대를 상징하는 주장 겸 에이스였습니다. 버마가 동남아시아의 강호를 넘어 아시아 전체에서도 경쟁력 있는 팀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같은 버마의 마웅 마웅 틴입니다. 당시 버마는 한두 명의 스타에게 의존한 팀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수크 바하두르의 리더십과 상징성을 가장 높게 평가했습니다.
1966년 역시 수크 바하두르입니다.
버마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했고 수크 바하두르는 주장으로 황금세대를 정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시아 최고 수준의 국가대항 종합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전년도보다 오히려 수상 근거가 더욱 강합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란의 호마윤 베자디입니다. 이란의 아시안게임 준우승을 이끌며 서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올라섰습니다.
1967년에도 수크 바하두르를 선택했습니다.
버마는 국제대회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거뒀고 수크 바하두르는 황금세대의 주장과 에이스라는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65년부터 3년 연속으로 아시아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최대 경쟁자로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등장합니다. 일본의 새로운 절대적인 해결사로 성장하고 있었고, 불과 1년 뒤에는 아시아 축구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국제대회 퍼포먼스를 보여주게 됩니다.
1968년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입니다.
이 해는 초기 연도 가운데 가장 고민할 필요가 없는 선정 중 하나입니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무려 7골을 터뜨려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일본은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아시아 선수가 세계 규모의 국제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자국을 메달까지 이끈 사건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란의 호마윤 베자디입니다. 아시안컵에서 4골로 공동 득점왕에 오르며 이란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기 때문에 다른 해였다면 충분히 수상할 만했지만, 1968년 가마모토의 올림픽 활약이 너무 강력했습니다.
1969년에도 가마모토입니다.
올림픽이라는 일회성 대회에서 반짝하고 사라진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대표팀과 일본 사커리그에서 계속 정상급 득점력을 보여주며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평가를 이어갔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오치아이 히로시입니다. 일본 사커리그에서 12골로 득점왕에 올라 리그 기록만 보면 가마모토보다 앞섰지만, 대표팀과 국제적인 위상까지 종합해 가마모토에게 한 표를 줬습니다.
1970년에도 가마모토가 왕좌를 지킵니다.
일본 사커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자신의 강점이었던 득점력을 다시 숫자로 증명했습니다. 1968년 올림픽 이후 몇 년간 가마모토는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공격수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버마의 윈 마웅입니다. 아시안게임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버마의 대한민국과의 공동 금메달을 이끌었기 때문에 대표팀 성과만 본다면 오히려 윈 마웅에게 표를 줄 수도 있는 해입니다.
1971년 역시 가마모토입니다.
처음에는 버마의 윈 마웅을 선택했지만 전체 기록을 다시 검토하면서 가마모토로 수정했습니다. 일본 사커리그에서 11골로 득점왕에 올랐다는 명확한 개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에게 주는 연간상이라는 원칙을 적용하면 가마모토가 조금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수크 바하두르입니다. 버마가 메르데카컵 정상에 오르며 황금기의 경쟁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후보로 남았습니다.
1972년에는 이란의 호세인 칼라니입니다.
아시안컵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결승에서는 연장전 결승골까지 기록했습니다. 이란은 1968년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고, 득점왕이 가장 중요한 경기의 결승골까지 책임졌다는 점에서 완성도가 매우 높은 수상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에브라힘 아슈티아니입니다. 이란 수비의 중심으로 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에 선정됐습니다. 공격수와 수비수 가운데 누구에게 더 높은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충분히 의견이 갈릴 수 있는 해입니다.
1973년에는 알리 파르빈입니다.
페르세폴리스와 이란 대표팀의 중원을 지휘하며 이란 황금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단순한 공격포인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플레이메이커이자 리더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골람 호세인 마즐루미입니다. 대표팀과 클럽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파르빈과 함께 이란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마즐루미가 파르빈을 넘어섭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이란의 금메달을 이끌며 최전방 해결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홈에서 열린 대회였지만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는 결과와 공격수로서의 기여도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자연스럽게 알리 파르빈입니다. 중원의 지휘자로 같은 우승을 이끌었기 때문에 둘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였고, 이 해만큼은 마즐루미의 직접적인 득점 기여를 조금 더 높게 봤습니다.
그리고 1975년, 드디어 차범근이 등장합니다.
아직 독일에 진출하기 전이었지만 대표팀에서 보여준 득점력은 이미 아시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슈팅, 뛰어난 신체조건을 앞세워 이전 세대의 한국 공격수들과는 또 다른 유형의 초대형 공격수가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즐루미입니다. 여전히 이란과 서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상급 골잡이였지만, 이때부터 차범근이라는 새로운 거대한 흐름이 시작됩니다.
1976년에는 알리 파르빈이 차범근을 막습니다.
아시안컵에서 대회 MVP에 선정됐고 결승에서는 직접 결승골까지 터뜨렸습니다. 무엇보다 이 우승으로 이란은 1968·1972·1976 아시안컵을 모두 제패하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대회 3연패를 완성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즐루미입니다. 3골로 공동 득점왕에 오르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지만, MVP와 결승골을 모두 가져간 파르빈에게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1977년부터 다시 차범근 시대가 시작됩니다.
차범근은 월드컵 예선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아시아 최정상 공격수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유럽에서의 성공이라는 후광조차 없었던 만큼 대표팀에서의 순수한 퍼포먼스로 받은 왕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알리 파르빈입니다. 이란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여정을 중원에서 이끌었기에 팀 성과에서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1978년에도 차범근입니다.
대표팀에서 엄청난 득점력을 이어갔고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과 공동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라는 새로운 무대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라즈 다나에이파르입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 스코틀랜드전에서 이란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골을 넣으며 아시아 축구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1979년부터 차범근에 대한 평가 기준 자체가 달라집니다.
분데스리가에 입성하자마자 프랑크푸르트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였고, 아시아 선수가 그곳에서 단순히 명단에 포함되는 것을 넘어 주전 공격수로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제드 압둘라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해결사로 등장하며 이후 오랫동안 차범근과 함께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거론될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80년 차범근은 아시아 선수의 기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립니다.
프랑크푸르트의 핵심 공격수로 UEFA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단순히 유럽에 진출했다는 것을 넘어 유럽대항전 우승팀의 중요한 공격 자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최순호입니다. 불과 18세에 아시안컵에서 7골을 터뜨려 공동 득점왕에 오르며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대표팀만 놓고 본다면 최순호도 엄청난 해였지만, 차범근의 UEFA컵 우승이 너무 강했습니다.
1981년 역시 차범근입니다.
이번에는 DFB-포칼에서 존재감이 컸습니다. 준결승과 결승이라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득점하며 프랑크푸르트의 우승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단순한 주전 선수를 넘어 큰 경기에서 결과를 만드는 공격수라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제드 압둘라입니다. 사우디와 알 나스르의 공격을 책임지며 서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2년도 차범근입니다.
분데스리가에서 꾸준한 득점력을 유지하며 아시아 선수 가운데 사실상 혼자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정상급 경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시아 선수와 유럽 최고 무대 사이의 격차를 생각하면 이 꾸준함 자체가 엄청난 가치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라크의 후세인 사이드입니다.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4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이라크의 사상 첫 금메달을 이끌었습니다.
1983년에도 차범근입니다.
분데스리가에서 15골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아시아 선수치고 잘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분데스리가 자체에서 뛰어난 공격수라고 평가할 만한 생산력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다시 마제드 압둘라입니다. 사우디 대표팀과 알 나스르에서 변함없는 득점력을 보여주며 아시아 무대에서는 차범근과 비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격수였습니다.
그러나 1984년에는 중국의 자슈취안이 차범근의 연속 수상을 막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슈취안이 센터백이라는 점입니다. 아시안컵에서 수비수임에도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대회 MVP까지 차지하며 중국의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국제대회 단기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는 아시아 축구사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차범근입니다. 분데스리가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기 때문에 클럽 무대의 수준을 최우선으로 본다면 차범근에게 줄 수도 있었지만, 자슈취안의 아시안컵 임팩트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1985년에는 차범근이 다시 왕좌를 가져갑니다.
레버쿠젠에서 두 자릿수 득점력을 유지하며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아시아를 대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에는 자신의 독일 커리어에서도 가장 폭발적인 득점 시즌을 만들어냅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제드 압둘라입니다. 대표팀과 알 나스르에서 여전히 막강한 결정력을 보여줬습니다.
1986년은 차범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분데스리가에서 개인 커리어 최다인 17골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세계 정상급 리그에서 아시아 공격수가 이 정도 득점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 쉽게 따라잡기 힘든 기준이 됐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최순호입니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멋진 골을 넣었고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클럽에서 보여준 차범근의 퍼포먼스가 워낙 강력했습니다.
1987년에는 김주성을 선택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새로운 공격 중심으로 성장하며 차범근 이후 세대의 대표적인 아시아 스타로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야생마’라는 별명처럼 폭발적인 스피드와 활동량, 공격력을 앞세워 한국 축구의 새로운 얼굴이 됐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차범근입니다. 전성기의 득점력에서는 내려왔지만 여전히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1987년은 세대교체의 의미까지 담긴 상당히 박빙의 선정입니다.
1988년은 이라크의 아흐메드 라디입니다.
이라크 대표팀의 공격을 책임진 당대 중동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하나였고 당시 IFFHS의 아시아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실제 동시대 평가라는 중요한 근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재검수 과정에서 차범근 대신 라디를 선택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김주성입니다. 대한민국을 아시안컵 결승까지 이끌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이 해는 라디와 김주성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접전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김주성이 정상에 오릅니다.
월드컵 예선에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당시 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김주성 시대의 본격적인 출발점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제드 압둘라입니다. 이미 오랫동안 정상에 있었지만 여전히 사우디를 대표하는 절대적인 해결사였습니다.
1990년에도 김주성입니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무대를 경험하며 아시아 최고의 스타라는 위상을 유지했습니다. 당시 실제 연간 평가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단순한 국내 평가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란의 파르샤드 피우스입니다. 뛰어난 득점력을 앞세워 김주성을 강하게 추격했습니다.
1991년 역시 김주성입니다.
대우 로얄즈의 K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아시아 올해의 선수 3연패를 완성했습니다. 공격수에서 이후 수비수까지 소화하게 되는 김주성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커리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같은 대우의 정용환입니다. 수비의 중심으로 K리그 우승을 이끌고 리그 MVP까지 차지했기에 국내 성과만 놓고 보면 김주성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었습니다.
1992년에는 일본의 미우라 가즈요시입니다.
일본의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훗날 ‘킹 카즈’라고 불리게 되는 일본 축구 최초의 대중적인 슈퍼스타가 국가대표팀에서도 결과를 만들어낸 해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라모스 루이입니다. 중원의 기술적인 중심으로 일본의 패싱 축구를 지휘하며 첫 아시아 정상 등극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993년 역시 미우라입니다.
J리그 출범 원년에 20골을 기록하고 초대 MVP에 선정됐습니다. 일본 프로축구가 새롭게 출범한 역사적인 순간에 리그 최고의 스타가 최고의 활약까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큽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하라 마사미입니다. 일본 대표팀과 요코하마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아시아의 벽’이라 불릴 만큼 정상급 센터백으로 성장했습니다.
1994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에드 알 오와이란입니다.
미국 월드컵에서 사우디를 사상 첫 16강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벨기에전에서 수비진을 혼자 돌파해 넣은 결승골은 지금도 월드컵 역사에 남아 있는 명장면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모하메드 알 데아예아입니다. 골문에서 사우디의 돌풍을 뒷받침하며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95년은 이하라 마사미입니다.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J리그 우승을 수비의 중심에서 이끌었고 AFC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됐습니다. 공격수들이 주목받기 쉬운 연간상에서 센터백이 정상에 오를 만큼 영향력이 컸던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미우라 가즈요시입니다. 여전히 일본 대표팀과 베르디에서 막강한 득점력을 유지했습니다.
1996년은 이란의 호다다드 아지지입니다.
아시안컵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대회 MVP에 선정되며 이란 황금세대의 공격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기술과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로 이후 유럽 진출까지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알리 다에이입니다. 같은 대회에서 무려 8골을 기록해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개인 득점 기록만 보면 다에이가 더 강하지만 대회 전체 영향력과 MVP라는 평가를 반영해 아지지를 선택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나카타 히데토시의 시대가 열립니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며 아시아 최고의 신성에서 최고의 선수로 단숨에 올라섰습니다. 기술과 패싱 능력뿐 아니라 경기 자체를 지배하는 젊은 미드필더의 등장은 당시 아시아 축구에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호다다드 아지지입니다. 호주와의 극적인 플레이오프를 포함해 이란의 월드컵 복귀를 이끌었습니다.
1998년에도 나카타입니다.
일본의 첫 월드컵에 출전한 뒤 세리에A 페루자로 이적했고, 유벤투스를 상대한 데뷔전부터 2골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세리에A가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시아 축구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알리 다에이입니다. 이란의 월드컵 공격을 책임졌고 유럽에서도 경쟁력을 보여주며 아시아 공격수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1999년 역시 나카타입니다.
페루자에서 세리에A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더 이상 화제성 있는 아시아 선수가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리그에서 실제 결과를 만드는 선수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알리 다에이입니다. AFC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고 바이에른 뮌헨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은 두 선수의 유럽 활약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재미있는 비교가 가능합니다.
200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와프 알 테미야트입니다.
알 힐랄의 아시아 클럽 정상 등극을 이끌고 AFC 올해의 선수까지 차지했습니다. 기술적인 능력과 경기 조율을 모두 갖춘 당시 사우디 축구 최고의 미드필더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카타입니다. 세리에A에서 활약했다는 무대 수준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었지만, 연간 성과와 우승까지 고려해 알 테미야트를 선택했습니다.
2001년에는 중국의 판즈이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는 센터백으로 활약하는 동시에 중국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AFC 올해의 선수까지 차지했습니다. 중국 축구 역사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카타입니다. AS 로마의 세리에A 우승 멤버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클럽 커리어만 보면 나카타에게 표를 줄 수도 있는 매우 어려운 선정입니다.
2002년은 홍명보입니다.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 4강이라는 아시아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를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FIFA가 선정한 월드컵 브론즈볼까지 차지했습니다. 수비수가 월드컵 전체에서 세 번째로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았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이 해는 홍명보가 가장 강합니다.
최대 경쟁자는 오노 신지입니다. 페예노르트의 UEFA컵 우승을 함께했고 일본의 월드컵 16강에도 기여했습니다. 다른 해였다면 충분히 수상할 만한 시즌이었습니다.
2003년은 이란의 메흐디 마다비키아입니다.
함부르크에서 분데스리가 정상급 측면 자원으로 활약하며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AFC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됐습니다. 스피드와 크로스, 공격적인 생산력을 모두 보여준 전성기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카타입니다. 세리에A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여전히 아시아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클럽 무대를 누볐습니다.
2004년은 알리 카리미입니다.
아시안컵에서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특히 대한민국과의 8강에서는 해트트릭을 터뜨렸습니다. 화려한 드리블과 개인 기술로 ‘아시아의 마라도나’라 불렸던 선수의 재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시기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카무라 슌스케입니다. 일본의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사실 이 해는 대표팀 성과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나카무라를 선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박빙입니다.
2005년은 박지성입니다.
PSV에서 리그와 컵 더블을 차지했고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진출했습니다. 특히 AC 밀란과의 준결승에서 직접 골을 터뜨리는 등 유럽 최고의 팀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쟁력을 증명했고, 결국 여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카무라 슌스케입니다. 세리에A에서 활약한 뒤 셀틱으로 이적하며 자신의 유럽 커리어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나카무라 슌스케입니다.
셀틱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프리킥 골을 넣었습니다. 특히 셀틱 파크에서 기록한 결승 프리킥은 구단의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역사적인 골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박지성입니다. 맨유 첫 시즌부터 주요 전력으로 자리 잡으며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아시아 선수가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2007년은 이라크의 유니스 마흐무드입니다.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이라크 대표팀을 주장으로 이끌고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공동 득점왕과 대회 MVP에 올랐고 결승에서는 직접 결승골까지 넣었습니다. 결과와 개인 퍼포먼스, 역사적 의미를 모두 갖춘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야세르 알 카타니입니다. 사우디의 준우승을 이끌고 공동 득점왕에 올랐으며 실제 AFC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됐습니다.
2008년에는 박지성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더블에 기여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 명단에서 제외된 아쉬움은 있지만 토너먼트 과정에서 로마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중용됐다는 점에서 팀 내 역할은 분명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우즈베키스탄의 세르베르 제파로프입니다. 부뇨드코르와 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실제 AFC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2009년 역시 박지성입니다.
맨유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아스날전에서는 골까지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결승에서 선발 출전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전이라는 역사를 썼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하세베 마코토입니다. 볼프스부르크의 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에 기여했기에 팀 성과만 보면 박지성에게도 밀리지 않는 훌륭한 시즌이었습니다.
2010년에는 혼다 케이스케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카메룬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고 덴마크전에서는 환상적인 프리킥 골까지 기록했습니다.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자국 개최가 아닌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고 혼다는 그 공격의 중심이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박지성입니다. 주장으로 대한민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을 이끌고 그리스전에서는 직접 골까지 넣었습니다. 사실 2010년은 한일 양국 에이스의 월드컵 퍼포먼스가 정면으로 붙었던 상당히 재미있는 해입니다.
2011년에는 카가와 신지입니다.
도르트문트에서 위르겐 클롭 축구의 핵심 공격 자원으로 성장했고 분데스리가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유럽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혼다 케이스케입니다. 일본을 아시안컵 정상으로 이끌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대표팀만 놓고 보면 혼다가 오히려 앞섭니다. 하지만 유럽 클럽에서 보여준 카가와의 퍼포먼스를 조금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2012년 역시 카가와입니다.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2연패와 DFB-포칼 우승으로 더블을 달성했고, 바이에른과의 포칼 결승에서는 직접 득점까지 기록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영입했을 만큼 유럽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근호입니다. 울산의 AFC 챔피언스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와 AFC 올해의 선수까지 차지했습니다. 아시아 클럽 무대만 평가한다면 이근호가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손흥민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함부르크에서 분데스리가 12골을 기록했고 불과 20세의 나이에 레버쿠젠으로 스텝업했습니다. 아직 지금 우리가 아는 완성된 손흥민은 아니었지만 이미 유럽 최상위권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할 수 있는 아시아 공격수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나가토모 유토입니다. 인테르의 주전 풀백으로 세리에A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당시 아시아 최고의 수비 자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2014년에도 손흥민입니다.
레버쿠젠에서 다시 분데스리가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알제리를 상대로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을 넣었습니다. 이제 유망주가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유럽파 공격수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일 제디낙입니다. 크리스털 팰리스와 호주 대표팀의 중원을 책임지며 프리미어리그와 월드컵에서 모두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2015년 역시 손흥민입니다.
아시안컵에서 3골을 넣었고 호주와의 결승에서는 패색이 짙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까지 터뜨렸습니다. 클럽에서는 레버쿠젠에서 공식전 17골을 기록했고 여름에는 토트넘으로 이적하며 마침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마시모 루옹고입니다. 호주의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아시안컵만 평가한다면 루옹고, 한 해 전체를 평가한다면 손흥민이라는 판단입니다.
2016년에는 오카자키 신지가 손흥민의 연속 수상을 끊습니다.
레스터 시티의 주전 공격수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우승 가운데 하나를 함께했습니다. 득점 숫자 자체가 화려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방에서의 활동량과 압박, 연계로 제이미 바디와 함께 팀 공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손흥민입니다. 토트넘 첫 시즌에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6-17시즌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아는 월드클래스 공격수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 해는 레스터 우승의 역사성을 높게 평가해 오카자키에게 한 표를 줬습니다.
2017년 손흥민이 다시 왕좌를 되찾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14골, 모든 대회를 합쳐 21골을 기록하며 당시 자신의 커리어 최고 시즌을 만들었습니다. 토트넘 역시 리그 2위에 올랐고 손흥민은 케인, 알리, 에릭센과 함께 리그 최강급 공격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카가와 신지입니다. 도르트문트에서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며 여전히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 경쟁력을 보여줬지만 개인 생산력에서는 손흥민에게 밀렸습니다.
2018년 역시 손흥민입니다.
월드컵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멋진 골을 기록했고 세계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꺾은 경기에서도 쐐기골을 넣었습니다. 이후 아시안게임에서는 주장으로 대한민국을 금메달로 이끌었습니다. 클럽과 월드컵, 아시안게임을 모두 합치면 상당히 완성도 높은 한 해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하세베 마코토입니다. 프랑크푸르트의 DFB-포칼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 16강까지 진출했습니다.
2019년에도 손흥민입니다.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8강 상대였던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두 경기에서 무려 3골을 넣으며 팀의 4강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토트넘은 결국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고 손흥민은 발롱도르에서도 22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알모에즈 알리입니다. 아시안컵에서 무려 9골을 넣어 단일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며 카타르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국가대표 단기대회 퍼포먼스만 보면 역대급이었지만 유럽 최고 무대에서의 손흥민 활약을 조금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2020년 손흥민은 또 다른 단계로 올라갑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자신의 첫 10골-10도움 시즌을 만들었고, 번리전에서 자신의 진영부터 약 70m를 질주해 수비수들을 모조리 제치고 넣은 골로 FIFA 푸스카스상까지 차지했습니다. 단순히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세계 축구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스타가 된 시기였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메흐디 타레미입니다. 포르투갈 무대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유럽에서도 통하는 이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021년에도 손흥민입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17골 10도움을 기록했습니다. 공격포인트 27개라는 숫자뿐 아니라 케인과의 조합 역시 리그 역사에 남을 수준으로 발전했고, 이제 손흥민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정상급 공격수라는 평가가 전혀 과장이 아닌 선수가 됐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다시 타레미입니다. 포르투에서 꾸준하게 득점했고 챔피언스리그 첼시전에서 기록한 환상적인 바이시클킥은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22년 손흥민은 이 전체 70년 명단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수상 시즌을 만들어냅니다.
2021-22 프리미어리그에서 23골을 넣어 모하메드 살라와 공동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특히 페널티킥 득점이 단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23골을 기록했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유럽 5대 리그 가운데 하나인 프리미어리그의 골든부트를 차지했습니다.
월드컵 직전에는 안와골절로 수술까지 받았지만 보호 마스크를 착용하고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는 추가시간 황희찬의 결승골을 도우며 대한민국의 극적인 16강 진출을 만들어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타레미입니다. 포르투에서 계속 정상급 득점력을 보여줬고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도 2골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PL 골든부트라는 업적 때문에 2022년 손흥민의 수상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손흥민의 6년 연속 수상을 끊은 선수가 2023년 김민재입니다.
나폴리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무려 33년 만의 세리에A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단순히 우승팀에 속했던 것이 아니라 시즌 종료 후 세리에A 최우수 수비수로 선정됐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나폴리의 구단 역사상 첫 8강 진출에 기여했습니다.
발롱도르에서도 22위를 기록했습니다. 아시아 센터백이 유럽 5대 리그 우승팀의 핵심 수비수이면서 해당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아시아 수비수 역사에서도 특별한 시즌입니다.
최대 경쟁자는 손흥민입니다. 토트넘 주장으로 선임되고 다시 득점력을 끌어올렸지만 2023년만큼은 김민재의 세리에A 우승과 최우수 수비수라는 조합을 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2024년에는 카타르의 아크람 아피프입니다.
아시안컵에서 8골을 터뜨려 득점왕에 올랐고 대회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특히 요르단과의 결승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카타르의 3-1 승리를 사실상 혼자 책임졌습니다. 카타르는 2019년에 이어 아시안컵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손흥민입니다. 토트넘 주장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여전히 정상급 생산력을 유지했고 대한민국의 아시안컵 4강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최고 국가대항전에서 우승+MVP+득점왕+결승 해트트릭을 모두 가져간 아피프의 임팩트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25년은 다시 손흥민입니다.
토트넘의 주장으로 UEFA 유로파리그 정상에 올랐습니다. 토트넘에게는 무려 17년 만의 메이저 트로피였고, 오랜 시간 유럽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우승컵과 인연이 없었던 손흥민 개인에게도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주장 완장을 차고 토트넘의 오랜 무관을 끝냈다는 상징성까지 고려했습니다.
최대 경쟁자는 이강인입니다. PSG에서 프랑스 국내대회 정상에 올랐고 무엇보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멤버가 됐습니다. 트로피의 격만 본다면 이강인이 오히려 앞서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 과정에서의 팀 내 비중과 주역성을 함께 고려해 손흥민에게 마지막 왕관을 줬습니다.
이렇게 발롱도르가 시작된 1956년부터 2025년까지 정확히 70년을 모두 돌아봤습니다.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의 최정민과 말라야의 압둘 가니 민핫이 경쟁했고, 이후 버마의 수크 바하두르와 일본의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왕좌를 이어받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이란 황금세대가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줬고 그 틈에서 대한민국의 차범근이라는 거대한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차범근은 아시아 무대를 넘어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분데스리가에서 정상급 공격수로 활약하고 UEFA컵과 DFB-포칼까지 들어 올리며 아시아 선수에 대한 기준 자체를 바꿨습니다.
차범근 이후에는 김주성이 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올라섰고, 1990년대에는 일본의 미우라 가즈요시와 나카타 히데토시가 일본 축구의 급성장과 함께 왕좌를 이어받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홍명보, 박지성, 나카무라 슌스케, 유니스 마흐무드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아시아 축구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부터는 손흥민의 시대였습니다.
분데스리가의 어린 유망주로 시작해 프리미어리그 정상급 공격수가 됐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경험했으며 마침내 프리미어리그 득점왕까지 차지했습니다. 이후 김민재와 아크람 아피프가 각각 2023년과 2024년 왕좌를 가져갔지만, 2025년에는 다시 손흥민이 마지막 수상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70년의 수상 횟수를 모두 계산했을 때 가장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차범근 10회.
손흥민 10회.
한 선수는 아시아 선수의 유럽 진출 자체가 특별했던 시대에 독일에서 세계 정상급 공격수로 살아남으며 길을 만들었고, 다른 한 선수는 그 길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가상의 아시아 발롱도르에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차범근과 21세기를 대표하는 손흥민이 통산 10회로 역대 최다 수상 공동 1위라는 상당히 재미있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실제 발롱도르나 AFC의 공식 기록이 아니라 각 시대의 기록과 성과를 바탕으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재구성해본 가상의 선정입니다. 특히 1950~70년대는 현대 축구에 비해 남아 있는 개인 기록과 영상 자료가 훨씬 적기 때문에 다른 선수를 선택할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이 주제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ㄷㄷㄷ
엄청난 게시글
며칠 자료 찾아본다고 죽는 줄 알았어요 ㅠㅠ ㅋ
ㄷㄷㄷ
올해 기스게 발롱도르!
부족한 글인데 과찬이십니다 ㅠㅠ ㅋ
엄청난 정성글 잘 봤습니다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ㅠㅠ ㅋ
이건ㄷㄷㄷ
며칠 아시아 축구 좀 파봤네요 ㅎㅎ
차붐 쏜 !!!! 펠레가 발롱 몇번이다 이런글은봤어도 아시아도 이렇게보니 재밌네요 ㅎㅎ 김주성도 대단한선수 였군요 얘기만들었는데
부족한데 재밌게 보셨다니 감동 먹었어요 ㅠㅠ ㅋ
와,,,👍👍👍
블랙아머님 늘 고맙습니다 ㅎㅎ 꾸벅 ㅋ
재밌는 if네요. 그러니까 차손박인 거죠?
재밌게 보셔서 다행입니다 ㅠㅠ ㅋ 3명은 레전드 ㅎㄷㄷ
대단합니다 50년대부터 ㄷㄷㄷ
며칠 재밌었습니다? ㅋㅋㅋㅋ
정성글 ㄷㄷ
부족한 글인데 과찬이십니다 ㅠㅠ ㅋ
미우라가 아직도 뛰고있다는게 레전드
그만 은퇴하지 ㅋㅋ
글 지기네예
👍🏻👍🏻👍🏻
댈러스사나이님 늘 감사드려요 ㅎㅎ 꾸벅 ㅋ
정성 가득한 글 감사합니다 슛돌이 꼬마도 조만간 선정될수 있겠죠?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ㅠㅠ 조만간 선정되지 않을까요? ㅎㅎ
김주성만 최순호로 바뀌면 대부분 동의합니다.
최순호로 바꿔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해요 ㅎㅎ
굉장한 글이네요~
흥미롭게 봤습니다
부끄러운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와 글 어마어마하네요 ㄷㄷ 수상자중 현실적으로 월클이라 할만한 선수는 차붐 손흥민 김민재 뿐인데 우리나라 대단하네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
@Messi 메시님 글 재밌게 보고있는데 초반 보고 너무 길어서 스크롤 내렸다가 점심시간에 정독했는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봤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베커밋 아이고 부끄럽네요 ㅠㅠ ㅋ 진심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합니다 ㅎㅎ
와!!! 대단하십니다.. 역사책보는 느낌으로 쭉 봤습니다. 역쉬 차박손은 대단하네요.
부족한데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
진짜 저때 홍명보좋아했는데ㅜㅜ
이젠 보기만해도 화가납니다.
아이고… 저도 안 뽑을 수는 없고 뽑아 놓으니 보기는 싫고 ㅋㅋ
이건...그냥 공짜로 볼 글이 아닌데요...정말 잘 봤습니다.
아아라도 하나 보내드려야하나
과찬이십니다 ㅠㅠ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ㅎㅎ
대단하십니다. 잘 봤습니다.
부족한 글인데 과찬이셔요 ㅎㅎ 고맙습니다 ㅠ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