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조선군, 청나라 300명에 당한 치욕전투 패인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blogthumb2.phinf.naver.net%2F20120129_256%2Fceoofpaik_1327837028114vAGaW_JPEG%2F%25C3%25BB%25B3%25AA%25B6%25F3%25B1%25E2%25BA%25B4.jpg%3Ftype%3Dw2)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쌍령전투
인조 14년(1636) 12월 청군이 2차로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
이때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4만 조선군 북상.
청군은 불과 기병 300 여기.
조선군은 4만 여명의 조총수.
조선군 4만 중 2만 전사 &,참패.
....................쌍령전투(雙嶺戰鬪).................
1637년 1월 2일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당시 조선 병사들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조총에 숙련되지 못했던 병사들이 상당수였고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한 10발 탄환들을 거의 소진.
조선군 진영은 탄환 재보급 요청 병사들로 인해 혼란 야기.
탄환과 화약을 재분배하는 진영 가운데에서
탄약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화승 불꽃에 닿아 대폭발이 일어난 사고.
갑작스런 폭음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혼란에 빠진 조선군에게 청나라 팔기병대 300명이 돌진.
닥치는대로 공격해 순식간에 조선군 선두진영은 뭉개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 목책을 넘어 급습,
이에 놀란 조선군은 탄약을 다쓴 조총을 내던지고 도주.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밟혀 죽는 참극.
선두대열이 무너지자 조선군 대오는 무너져
대부분 병사들이 도주하다가 밟혀죽거나 포로.
허완은 쌍령전투에서 패배하자
스스로 목을 칼로 찔러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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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청 태종이 조선의 무례함을 문제삼아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군은 불과 열흘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에 육박.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을 시도했으나
이미 청의 기병들이 길목을 차단해 남한산성으로 대피.
남한산성에는 1만3천 병사가 있었으나, 청군이 곧 포위.
조선은 변변히 싸움 한번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만 있다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임진왜란 7년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
그로부터 40년만에 병자호란으로 폐허화.
병자호란 47일 전쟁은 임진왜란 만큼 피해.
조선 인구 1천1백만 중 50/60만이 죽고
60만 포로들과 인질들이 청나라로 끌려가
조선 인구 1/10 이상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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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누르하치(재위: 1616~26년)가 만주를 통일
'여진족' 금나라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국호 후금(後金).
후계자 홍타이지(재위: 1626~43년)는 국호를 청(淸)으로
1636년 영토확장 및 군사·행정제도인 팔기(八旗) 체제 확립.
홍타이지 다음 순치제(재위: 1643~61년)때 청의 팔기군은
산해관 넘어 명 수도 베이징 점령후 1644년 수도로 삼았다.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는데.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여진)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나라는 전체적으로는 타 민족에 대해
정책을 훌륭히 펼친 왕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Empire of the Great Qing (orthographic projection).sv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upload.wikimedia.org%2Fwikipedia%2Fcommons%2Fthumb%2F6%2F66%2FEmpire_of_the_Great_Qing_%2528orthographic_projection%2529.svg%2F300px-Empire_of_the_Great_Qing_%2528orthographic_projection%2529.svg.png)
1896년 청나라 강역. 홍콩과 연해주,
아무르 이북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후 지도로, 최대 영토 아님.
1616년 금(후금)에서 출범한 '누르하치' 청태종.,건국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 살던 여진족들이 세운 나라.
처음에는 광대하지 않았으나 차츰 융성해 인구도 증가했다.
........청(大淸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ᡳ 다이칭 구룬)...........
1616년 태조 천명제(누르하치)가 건국한 ‘금’(후금)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홍타이지)는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어
중국을 지배한 대청국은 정식명칭이며 약칭은 청나라(淸朝)로 불린다.
중국 역사에서, 만주족(여진족) 지배를 받은 정복왕조,
근대식 공화정 수립 이전 마지막 전제군주정으로 본다.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서 탄생한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광대하진 않으나
융성했으며 인구도 증가하였고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장악.
심지어, 징기스칸 후예 원 보다 큰 중국 역사 중 가장 큰 영토.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중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
이민족으로서는.,가장 오랫동안 중국 대륙을 지배하였다.
제8대 도광제부터 말대 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2천년 봉건 왕조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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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 명나라 뿐 아니라, 주변 몽골, 위구르, 티베트 등
몽골제국(원)을 제외한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뤘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침입을 저지
'1683~1830'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국력이 약해져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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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누르하치(재위: 1616~26년)가 만주를 통일하고,
여진족이 세웠던., "금(金)를 잇는다."는 뜻으로 후금(後金)
그 후계자 홍티아지(재위: 1626~43년)가 정한 국호., 청(淸).
1636년, 영토를 확장하고 팔기(八旗) 군사 행정 체제를 확립
홍타이지 다음으로 순치제(재위: 1643~61년)때 북경을 점령.
청의 팔기군이 산해관을 넘어 1644년에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청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들어갈때
오랑캐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았기에
기선제압 목적으로 수많은 학살을 자행
양저우 한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일설에는 '5,000만~ 1억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
1600년 중국 인구는 1억2천~2억.
1650년 1억~1억 5천 정도로.,감소.
그후,경제발전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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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원과 달리, 한족을 중용해 선진문화를 수용
순치제에 이어, 8살 강희제 즉위(재위1661~1722).
제4대 황제 강희제는 15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즉위 초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다.
오배 난(1669년), 오삼계(吳三桂) 등.,3란(1674~83년)
이를 진압하고, 타이완 정씨왕국을 청(淸)에 편입(1683년)
강희제 대에 이르러서는.,중국을 통일.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
네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체결 후, 국경확정.
'스타노보이 산맥~ 흑룡강'., 일대 지역.
또한, 아직까지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외몽골 정복.
자신에게 반항하던 '준가르' 군세를 크게 꺾어놓았다.
아울러, 한자 5만자를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 했다.
한편,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
예수회 선교사들을 총애했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성 중심으로 서양과 무역
69세 나이로 사망했고,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 사망후, 4남 옹정제 (1722~1735)가 45세에 즉위.
옹정제는 '형제의 난' 승리로 후계자가 되어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로 국민부담을 덜어주었다.
옹정제는 하루 4시간 자며 정무에 몰두 중 과로로 운명.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가장 큰 영토를 완성.
당시 영토는 몽골,신강,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영역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종주권를 확보
이 시기의 역사상 처음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다.
명나라 인구 6천만에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사서 편찬, 경전,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 발전을 가져왔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고증학(考證學) 학풍이 학문의 전분야에 전개되었다.
건축으로 원명원(圓明園)은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견된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 사치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되어
국운이 기울고, 반란이 일어나며 국력이 약해졌다.
1896년 청나라 영토.
당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
일찌기 대진사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
천주교 선교사들이 청에서 겪었던 어려움.,조상제사.
교황청에서 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
청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개신교도 청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 모라비안 교인들이 선교활동
1860년 영국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아내.
이들은 청나라 사람들과 똑같은 옷옷을 입고 선교
그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는 1898년까지 후난성 선교활동.
그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해
1951년 철수, 1964년 OMF로 선교회 이름을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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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1894~1895년)으로
한때., 일본이 점령하기도 했다.
1차 대전(1894~1895년)후, 미국 도움으로.,국가 유지.
1차대전 승전국들 간에 "영토분활 소유권"을 주장할 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어.,'세계평화의 아이콘'이 된.,미국.
2차 대전 이후,
내전을 극복한 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장개석 총통의 임시정부가 대만으로 망명.
모택동 정권장악 후, 소멸된.,청나라의 황실.
사실 상, 오늘날까지도.,중국의 모체는 청나라.
![중국](http://i1.daumcdn.net/thumb/R290x0/U03/encyclop/4E413A5E01563E000B)
...................입연사(入燕使)......................
병자호란 후 조선과 청나라 간에 정식으로 국교.
1637년(인조 15)부터 조선은 청에 사신을 보냈다.
성절·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의 정기사행
사은·주청(奏請)·진하(進賀) 등의 임시사행이 있었다.
나중에 천추사가 없어지고, 세폐사(歲幣使)가 생겼다.
청 세조 즉위 이듬해인 1645년부터는
정조·동지·세폐의 삼사를 본래의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정조에 오는 것이 좋다 하여
여기에 성절사를 합쳐서 보냈는데 3,000리 넘는
사행길 때문에 조선의 부담도 컸지만 청나라 역시
이들을 접대해야 하는 중국 측 부담도 컸기 때문이다.
사행은 하나로 구성되었지만
공물은 명목에 따라 각기 바쳤다.
이 정례사행을 "삼절겸연공사(三節兼年貢使)",
이를 생략하여 동지사 또는 절사라고도 불렀다.
동지사는 매년 12월 초에 떠나
12월 안으로 연경에 도착하여
다음해 3월 그믐께 돌아왔다.
정례사행은 뒤에 역서를 받아오는 역행(曆行) 추가.
사행의 구성은 정사(正使) 1명, 부사 1명, 서장관 1명,
대통관 3명, 호공관 24명, 도합 30명이 공식인원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수종하여
300명 전후, 500명 넘을 때도 있었다.
사신이 갈 때 조선이 청에 보내는 물품은
방물· 세폐· 예단 등의 명목으로 보내졌다.
조공(朝貢)이라고 칭해졌지만 실은 청나라도
이에 상응하는 물건을 조선에 보내오는 공무역.
사신행렬에는 상인들이 참가하여 무역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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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나라와 무역을 하던
국제시장이.,경원개시(慶源開市)
조선정부는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1645년(인조 23)
함경북도 경원에 청나라와 무역을 하는 시장을 개설.
청나라와 무역은 종래 주로 사신왕래에 의해 이뤄졌으나,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가 적극적으로 국경에 시장설치를 요구.
조선정부는 1628년 이에 동의하고
개시라는 국경무역을 시작하였다.
경원개시는 격년제로
간지에 을·정·기·신·계가
들어가는 해에 열었다.
개시기는 음력 4, 5월의 봄과
9, 10월 가을 or 12월이었으나,
효종 이후 에는 겨울에만 열었다.
청나라로부터의 수입품은 가죽·담뱃대·녹용·구리·부싯돌·말·노새 등
조선에서의 수출품은 소·말·돼지·쌀·소금·농기구·솥·생필품 등이었다.
국경지방에는 경원 외에도 중강·회령에 개시 설치,
회령개시는 경원개시와 함께 북관개시라고 불렸다.
중국과의 무역은 조선 국내의 상업 발전에 따라 크게
발전하여 후시를 통한 잠상의 무역활동이 성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