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는 것은 배수아의 번역본인데, 이전에 나는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불안의 책>을 읽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어쩐지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완역이 아닌 발췌본이라는 사실에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수아의 완역으로 나온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고 싶었으므로, 나는 3분의 2정도 읽은 그 책을 망설임 없이 덮었다. 배수아의 완역본은 두 권으로 나누어도 될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그 사이 다른 책을 읽느라고 한동안 읽지 못하다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요즘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제목만으로도 그 책을 이미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소연의 발문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 책을 두 번이나 정독했다고 하는데, 한 번 읽을 때와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물론 김소연의 발문 보다는 페소아의 서문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다. 이 책 또한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배수아를 통해서 독특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프란츠 카프카, 야콥 하인, 토마스 베른하르트, 샤데크 헤다야트, 그리고 페르난두 페소아까지. 그들이 비록 푸른 눈을 가진 이방의 작가들이라 할지라도, 배수아를 통해 그들을 읽으면 어쩐지 그 속에 역자의 지문이, 숨결이, 색채가 진하게 배어있는 것을 느낀다. 번역이 제2의 창조라는 말은 그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것은 1차적으로는 프란츠 카프카, 야콥 하인, 토마스 베른하르트, 샤데크 헤다야트,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수아의 프란츠 카프카, 배수아의 야콥 하인, 배수아의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의 샤댜크 헤다야크, 배수아의 페르난두 페소아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배수아도 함께 읽는다. 그것은 이중의 즐거움, 두 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배수아는 어느 매체에서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희열은 번역을 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이라고 했다. 나는 프란츠 카프카 혹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은은하게 발현하는 역자의 색채를 느끼는 희열은 그것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면서, 페소아가 말하는 불안이란 무엇인지, 어떤 색채를 띠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래야만 페소아 뿐만 아니라 배수아 또한 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예감에 지나지 않지만, 읽다보면 서서히 무언가 변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여기와는 다른 장소에 도달해 있을 것만 같다. 그곳은 아마 쓸쓸함마저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 자발적인 고립이 아름다운, 그런 곳이리라.(201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