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흔히 말하길 "현재를 조명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만이 현재의 좌표, 위상, 현상을 알아 미래를 정확히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역사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거울이라 하겠다.
19C 유럽 보수정객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지리멸렬한 이탈리아를 "지리상의 이름 뿐이다." 라고 멸시했으며, 외교적으로 처리해서 합병하려는 의도를 가졌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는 선각자 마찌니라는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 그가 생각해낸 것이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가르치는 것 만이 가장 확실한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조상들이 로마제국을 건설하여 유럽, 중․근동 지역을 석권했고, 그 문화 또한 찬란하여 그 혜택을 현재의 전 유럽, 중․근동 아시아가 누리고 있음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결과, 젊은이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강력한 조국애로 뭉쳐 이탈리아를 막강한 통일국가로 발돋움하게 해서, 메테르니히의 말이 망발이 되게 했던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때의 일로써, 왕이 "王又念 欲興邦國 須先風月道" 즉, "왕이 또한 생각하기를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해선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풍월도(風月道)란 우리 민족 고유의 얼이요, 정기요, 혼이요, 사상이며, 종교이다. 즉, 우리 민족이 유구하게 유지․발전시켜 온 민족 고유의 전통이며, 문화이며, 사상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만들어낸 제도가 "화랑제도(花郞制度)"이다. 이 화랑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국론을 통일하여 힘을 기른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보고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개인이 자신의 과거를 깡그리 잊었을 때 그를 의학적으로는 기억상실증 환자라고 한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기자신의 진정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 민족이 그 민족의 역사를 잊었거나 잘못 알고 있을 때, 그 민족은 이민족의 식민통치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동서고금을 통하여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2. 민족사의 조감
일제 식민시대의 대표적인 민족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민족이 죽느냐 사느냐는 그 민족의 역사가 죽느냐 사느냐에 달려 있다." 라고 설파한 일이 있다. 그만큼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생명선과도 같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을 새기면서 민족사를 조감하고자 한다.
가. 한국사의 특징
한국사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본고(本稿)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크게 부각시킨 사료빈곤의 역사, 말살된 역사 만을 채택, 고찰하고자 한다. 왜 우리 역사의 사료가 빈곤하고 말살되었겠는가? 이는 한마디로 "주변 민족의 역사보다도 우리 민족의 역사가 우월하기 때문에 그 우월성에 도전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 생각한다. 일본민족이나 중국민족이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보다 소등(少等)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 자료를 말살한 것으로 본다. 이에 몇 가지 과정이나 이유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1) 외침에 의한 말살
AD 246년 고구려 제 11대 동천왕 20년에 위장(魏將) 관구검( 丘儉)에 의한 고구려 수도 환도성(丸都城) 함락과, AD 342년 제 16대 고국원왕 12년 연왕(燕王) 모용 (慕容 )의 환도성(丸都城) 공함(攻陷) 등 두 차례의 전쟁에 상고시대로부터 고구려 초엽에 이르기까지 2300여 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 100권이 소실당했고, 그 후 AD 600년 제 26대 영양왕 11년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다시 산수(刪修)하여 《신집(新集)》 5권으로 《유기(留記)》를 요약하였던 것 등 《신지비사(神誌秘史)》, 《해동비록(海東秘錄)》,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단군기(檀君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선사(仙史)》들이 전란으로 찬탈 내지는 소실당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소장하고 있던 고구려 및 그 이전의 상고사까지도 멸실되게 되었다는 사실로 우리 민족사의 크나큰 비극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AD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수도 사비성 함락시 박사 고흥(高興)이 저술한 《서기(書記)》, 《조대기(朝代記)》, 《단군기(檀君記)》 등 백제가 소장하였던 사서들이 소실되었고, 고려시대 사찬(私撰) 사서로써 민족자주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예종(睿宗) 때 홍관(洪灌)이 저술한 《편년통록(編年通錄)》 등과 고려 초중엽에 주로 도학자(道學者)들의 저서로 알려진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삼성밀기(三聖密記)》, 《표훈천사(表訓天詞)》, 《도 기(도 기)》 등이 AD 1231년 제 23대 고종(高宗) 18년부터 6차례 29년간의 원(元)나라 침공으로 인하여 침탈․분탕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등 병란시 도성을 비운 사이 많은 사서들이 소실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노비들이 노비문서를 불태우려고 서고에 불을 질러 귀중한 사서마저 소실되었다고 한다.
(2) 중국 사서에 의한 말살
현재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동이족(東夷族)의 분포가 산동반도 남쪽에서부터 태행산맥 동쪽 중국 동북부 해안 곡창지대와 북경을 포함하는 지역까지를 동이족(東夷族)의 분포지로 명백히 해 놓았다. 이는 중국의 상당부분의 지역과 역사가 동이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제시한다. 실로 중국 고대 최고의 성군으로 받드는 순(舜) 임금도 동이족(東夷族)이요, 홍콩대학의 서량지(徐亮之), 대만대학의 임혜상(林惠祥) 교수는 "은(殷)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다" 라고 하였고,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옛적 중국 제왕들의 종족을 보니 거의 동이족(東方族)이었다." 라는 등 중국 상고사는 동이족(東夷族)과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겠으나, BC 104~91년경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중국 고대사를 한족(漢族) 위주로 정리해 놔 중국 내 동이족(東夷族), 동이계(東夷系)의 역사활동사실은 은폐, 변조, 조작, 둔갑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정직하게 동이(東夷) 활동을 기록했던 서진(西晋)의 역사가 왕 (王 )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는 인멸시켰으나, 같은 시대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에는 고구려, 신라, 왜와의 관계사는 비교적 상술하였으나, 5호16국 시절 동이족 분포 지역 내 식민지를 경영했던 백제에 관한 사실을 전혀 기록하지 않는 등 철저히 중국 민족 위주의 사서인 바 이는 금과옥조처럼 잘 보존하고 있고, 고구려를 구려 또는 하구려로 명칭을 변경시켰는가 하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빼앗긴 땅을 주었다는 등 기록으로 허위 조작한 사례가 있다.
(3) 일본인들에 의한 말살
1919년 3․1 운동의 발발로 인해 일제 초기 무단통치 정책을 실패로 간주한 일본은 1922년, 사이또 마꼬또[齊藤實]를 총독으로 부임시켜 문화통치를 표방, 적극적으로 조선사 말살․왜곡 작업을 주도한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총독부 직제로 설치, 조선사 35권을 16년간에 걸쳐 간행․배포하였다.
이는 식민사학의 결정판으로써 단군조선 말살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도 시조를 부정하는, 우리 민족사의 폄하․부정적 요소의 확대 등 민족사 훼손으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극악한 죄를 범하였다.
(4) 국내적 훼손
AD 927년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의 완산주(完山州)에서의 일전(一戰)에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급습하여 침탈해갔던 신라의 사서들 - 거칠부의 《국사(國史)》, 《단군기(檀君記)》, 《삼국고기(三國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이 소실되었고, 유일한 최고(最古)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조차 문제가 많은 사서이다.
우선,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신라계 귀족 출신으로 사대주의 유학자였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저술에 앞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한 관군 총사령관이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사건을 민족사 천년 이래의 제 1의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묘청 그룹이야 말로 고구려의 선인(仙人), 백제의 수사(修士), 신라의 화랑(花郞) 즉, 자주적이고 독립적이고, 상무적인 민족 주세력의 맥을 이어가는 그룹으로 보았는데 이를 사대주의 유학자 그룹 즉, 외세를 등에 업은 집권층에게 그 맥이 끊어진 것으로 통탄해하며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러한 민족 주체세력의 맥을 끊고 저술한 책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이고 보면 그 문제점은 훤히 보인다. 김부식(金富軾)은 주로 중국의 자료를 인용하여 저술하면서 고려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아서 제(帝)를 모두 왕(王)으로 폄하․수정해서 기록하는 등 우리 민족사를 축소․폄하․중국 예속화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나. 상고시대 민족의 우월성
중국 고전 《산해경(山海經)》에 "동이(東夷)는 군자국(君子國)…", 《산해 찬(山海 讚)》에는 "동방(東方)은 천성이 어질고 군자(君子)가 있으니…", 《왕제칙기(王制則記)》에는 "동방(東方)을 이(夷)라 하는데…".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중국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나도 구이(九夷;朝鮮)에 가서 살고 싶다" 라고 하는 등 우리나라는 중국인이 흠모했던 이상향이었고 군자의 나라였다.
또한, 제갈공명은 《제갈량서》〈동이편(東夷篇)〉에 "고려라는 나라는 나의 병법과 능력으로 가히 침략할 수 없다." 라고 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무력으로 동이(東夷)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기에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전략이 나오기까지 되었다.
문명 면에서도 1985년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청동기 연대 방사선동위원소 측정결과를 세계 학계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황하지역의 것은 4000년, 단군조선 지역인 길림성과 요령성의 것은 4400년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대 고천문학자인 박창범(朴昌範) 교수에 의하면 중국에선 천문현상 기록이 주나라 때 BC 776년에 처음 등장하나 우리나라는 단군조선 2대 단군 부루(扶婁) 임금 때인 BC 2183년에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천문현상기록이 중국에 비해 약 1400년 앞선 것이다.
이와 같이 상고시대 우리 민족은 군자국(君子國)이요, 무력으로 중국이 넘볼 수 없는 나라요, 청동기를 먼저 만들어 사용했으며, 하늘을 관측하고 개념화하는데도 앞선 이상향이요, 선진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했던 나라․민족이 외침에 의한 사서의 훼손, 중국사서에 의한 왜곡, 축소, 둔갑 등 사전(史戰), 일제에 의한 왜곡,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 의한 폄하 등으로 인해 호랑이에서 토끼나 고양이로 왜소하게 인식하고 열등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3. 민족의 슬기
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및 목판인쇄술 발명
문자의 소유 자체가 문화인과 미개인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진대, 문자에 의한 문장구성으로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 의사전달기록 등을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화행위이다. 또한, 이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이 인쇄술에 의한 책의 발행인데,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이를 실현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나. 한글의 창제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 미국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94년 6월 호. '쓰기․정확성' 제하(題下) 기고 (필자: 제어드 다이어먼드) 에서 한글이 우수한 이유가
① 모음과 자음이 쉽게 구별되며
② 자음이 입술, 입 및 혀의 위치를 확실히 해주는 한편
③ 28개 자모가 수직수평 조합 통해 반듯한 사각형을 이루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는 점을 들었다.
다. 손 재능, 눈썰미의 탁월성
한국이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12연승을 기록한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나라다. 손은 작은 두뇌라고도 하는데 손과 두뇌의 유기적 연관성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손재주, 눈썰미는 기초과학․과학기술이 밑바탕이 되어주면 과학 한국은 능히 미래세계를 이끌어 갈 것이다.
4. 결언(結言) - 우리세대의 사명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말살, 왜곡, 와전되었는가와 상고시대 우리나라 민족의 원형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점과 역사적 사실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슬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우리 스스로가 자부심과 긍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겠다. 그리고 우리 민족,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가 심어놓은 열등의식을 말끔히 씻어 버려야 한다.
스스로가 긍지를 가지고 자존심을 지키고자 할 때,
첫째 :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둘째 : 자기 자신의 일을 최고로 완수할 수 있다.
셋째 : 외국에 나갔을 때, 제품을 만들 때, 항상 민족의 자긍심을 생각하여 섣부른 행동, 조악한 제품을 만들 수가 없다.
이러한 자존심을 지키는 바탕 위에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키고 갈고 다듬고 발전시켜 세계에 이바지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25시》 작가 게오르규는 21세기 세계를 이끌어 갈 지도이념으로 한국에서 형성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인이 공존, 공영, 공생할 수 있는,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할 수 있는 이념이요 사상이다. 민족적 긍지를 확고히 한 연후에 세계에 문을 활짝 열고 한민족의 저력을 발휘하여 세계에 이바지하는 한국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첫댓글 우리나라역사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건 좋지만 지나친 민족주의는 안좋을것같습니다. 그리고 9000년의 역사 그건 우리순수한 한민족의 역사가 아닌 적어도 중국을 포함한 인류역사가 아닐런지요
그렇지요.. 백제왕족이 비록 일본이라는 국호로 일본을 열었다지만 그게 다 우리의 역사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7세기 이후로 일본의 역사는 지배층의 백제와 피지패층의 오키나와가 함께 일본을 발전시켰지요... 일본의 독창성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