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朴鍾哲(1964~1987)】
"돈, 승차권, 목도리 아낌없이 주던 '자선사업가' 박종철"
1964년 4월 1일, 부산직할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빠 박정기, 엄마 정차순의 2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남매로는 형 박종부, 누나 박은숙이 있다.
부산 토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와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1년 재수해서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 단짝이었으며 서울대학교 84학번으로 재수해 입학한 김치하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로서는 귀티 나는 친구"라고 한다. 더불어 회고하기를 "아주 성실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종종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최인호 역시 그의 첫인상에 대해 "외모나 인상이 순진하고 해맑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동기들보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다"고 설명했다. 1987년 1월 14일 이후 31년, 박종철을 기억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
1979년 중학교 3학년 때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사회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의 남다른 사회의식에 영향을 준 형 박종부 씨는 운동권 학생으로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직후와 같은 해 11월 '서강대 유인물 사건'으로 두 차례 체포된 후 1981년 3월 군에 입대했다.
박종철이 대학에 입학한 1984년은 전두환 정부의 학원자율화 조치가 시작된 첫해였다. 학도호국단 대신 총학생회가 다시 결성됐지만 정권은 프락치를 동원해 서울대 총학생회를 와해시키려는 공작을 벌였고 박종철은 언어학과에서 2학기 중간고사 거부 투쟁을 주도했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에서 체포되어 5일 구류를 살았고 석방된 지 3일 만에 구로동맹파업 관련 시위에서 또 체포돼 3일간 구류됐다. 여름방학에는 공활(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했다가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에서 체포, 구속되었다. 7월 15일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다음은 박종철이 옥중에서 부모님께 쓴 편지 중 하나다.
아버지, 어머니.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1986년 7월 8일
학생 시절의 박종철 생활상이다.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철이는 서울로 올라갔다. 아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러 명의 선후배들이 ‘5·3 인천항쟁’으로 구속되고 없었다. 철이는 법대 친구와 토론하며 새로운 이론들을 익혔다. 이때 읽은 책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 복사본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읽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철이가 마지막으로 부산에 내려왔을 때, 누나 은숙은 일본어를 공부하는 동생을 보고 의심했다.
“니 공산주의 서적 볼라고 일어 공부하는 거 아이가?”
“그래, 맞다. 와? 니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돈, 승차권, 목도리 아낌없이 주던 '자선사업가' 박종철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직분을 맡았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자정 경 하숙집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불법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는데 이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우리는 그를 의인 또는 열사라 부른다. 시대의 아픔을 남의 것이 나닌 내 아픔으로 받아드리고 나누고 분노했던 의인 박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