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렬의 그래서 산티아고 –2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25km
회색빛의 전형적인 중세 건물,이런 곳이 알베르게라니!
생장 ~ 론세스바예스 (S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25km
8월18일. 마침내 800km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으면 스페인이다. 바스크와 나바라, 카스티야 이 레온을 지나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까지 기나긴 여정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순례기를 읽다 보면 나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도 거뜬히 해내는 걸 보고 많은 용기를 얻기도 했지만, 이번 순례길 중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알려져 있어 조금은 긴장이 된다.
알베르게를 지나 1,060m의 오리손봉에 오르면 큰 돌무더기가 보이고, 성모 마리아상이 순례객들을 온화한 미소로 맞이해준다. 갈림길에서 십자가가 보이는데 서서히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시야가 좋지 않아 아쉽다. 높은 고산지대치고는 차량 통행이 매우 잦아 왜 그런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오늘이 산상 기도회가 열리는 날이란다. 가끔 열린다는 이런 기도회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첫날부터 따라주니, 이 또한 기분이 좋다.
정상부를 오르기 전에 스페인 나바라주 안내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게 프랑스와 국경표시인 모양이다. 철조망이나 커다란 경계석 정도를 상상했는데 의외다. 국경인 줄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오르막을 더 가다 보면 최고봉인 뢰푀더 안부(Col de Lepoeder)에 대피소 같은 건물이 보인다.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황량해 보인다. 운무는 더욱 심해지고, 비도 내린다. 모두 우의를 입고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안내서에는 멀리 론세스바예스가 보인다는데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묵묵히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갈 뿐이다.
정상부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오는 길은 거리에 비해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다. 내려오면서 무리하면 후유증이 오래가는 걸 잘 알기에 첫날부터 다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해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흐린 날씨 때문에 거의 도착해서야 건물들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회색빛을 띤 전형적인 중세 건물! 이런 곳이 알베르게라니…….
론세스바예스(프랑스어로 장미의 계곡)에는 알베르게(12유로)가 하나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세 건물이라 그런지 외관은 아름다우면서 묵직한 느낌을 준다. 옛날 수도원을 개조했다는데 수용인원은 120명이 넘고, 2층 침대가 설치되어 있다. 여유 공간도 많은 편이고, 화장실과 샤워실, 세탁실, 휴게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안내자들은 친절하고 연세가 많은데, 방 배정이나 식당 안내 등을 할 때 보면 숙련된 베테랑으로 보인다.
퇴임 후 인생 2막을 위해 여러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기 전에 푹 쉬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쉬는 동안 뭘 할까 생각하는데, 번뜩 떠오른 게 바로 산티아고였다. 영산강유역환경청에 근무할 때 이인영 의원을 통해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게 나도 모르게 가슴 속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32년간 고생한 나에게 스스로 위로와 격려의 선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것이 어쩌면 이번 여행의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누군가는 종교적인 이유로 가느냐고 묻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기는 하나 멀리 순례길을 떠날 만큼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기나긴 공직을 마치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고,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닥치는 대로 지내고 싶었다
(환경경영신문, www.ionestop.kr ,박응렬의 <그래서,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