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동 청백아파트 단지에 있는 정간공 이명 묘역 이정표>
<각심재 표석>
<정간공 이명 신도비>
<각심재 뒷산에 있는 정간공 이명 부부묘>
<월계동 초안산에 있는 승극철 부부 묘 안내>
<초안산에 있는 승극철 부부 묘>
일상탈출 짧은 여행 80 (정간공 이명 묘역 - 내시 승극철 부부묘)
오늘 향토문화탐방은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정간공 이명 묘역과 내시 묘를 탐방할 계획이다.
하계역 5번 출구에서 회원들과 만나서, 마을버스 15번 종점 월계동 청백아파트까지 15분 정도 갔다. 청백아파트 단지 뒷편으로 조금 돌아가자 각심재라는 표석을 만나고, 담장 안에는 품위있는 한옥이 보였다.
각심재는 1930년 경 일제시대 대표적인 건축가 박길룡씨가 설계한 것으로 종로구 경운동에 있던 정순주 가옥이었다, 도로 개설로 헐리게 되자 예안 이씨 종친회에 기증하여 월계동으로 옮겨와서 복원된 가옥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와나 담의 모양은 한옥을 닮고, 내부시설은 일본식 설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예안이씨 종친회에서는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정간공 이명의 묘역이 있는 월계동에 <각심재>라는 현판을 걸고, 문중 재실로 활용하고 있다.
정간공 이명은 연산군 시대에 태어나서, 중종 때 과거급제한 후, 명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이명은 조선시대 손꼽히는 청백리로 백성을 위해 왕께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강직한 인물이다.
명종 때 문정왕후 윤씨 일가가 세도정치를 펼 때에도 왕에게 충언을 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그의 강직함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울 정도였다고 한다. 월계동은 능골이라는 옛 이름이 있는데... 이명의 묘가 너무커서 불려진 지명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각심재 뒷산으로 조금 오르니 정간공 부부 묘소가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문인석이 두 개 좌우에 있고, 묘비와 상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각심재에서 나와 맞은 편 아기 소망을 담은 초안산으로 20분 정도 오르니 정 3품 당하관을 지냈던 내시 승극철 부부 묘가 있었다.
내시 묘들이 많이 있었다는 초안산이 아기 소망로라고 불리는 것은 자식을 얻을 수 없는 내시들이 아기를 얼마나 절절하게 소망헀을지를 비해서 쓰는 지명이다. 그래서인지 초안산에 와서 아기를 소망하면 임신이 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승극철 부부 묘는 겨울 끝이라 그런지 잔디가 거의 벗겨진 봉분이라서 관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묘비도 총알이 뚧고 간 것 같이 훼손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다.
향토탐방회 인솔교수님께서는 노원구와 문화원이 협조해서 초안산 내시묘들을 재정비를 하기로 했다고 했다. 교수님의 자문으로 역사적 자취를 산뜻하게 정비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꽃샘추위에 감기가 걸릴 것 같은데에도 끝까지 함께한 많은 회원들의 열정에 감탄하며 돌아왔다.
첫댓글 서울 곳곳에 숨겨진듯 자리한 역사의 가르침이 울려옵니다. 내시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다시금 다듬어집니다. 감사합니다.....*
내시는 고려시대까지는 환관이라고 해서 지금의 비서실장급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무심히 지날 칠 곳에 있는 역사적 현장을 찾을 때마다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노원구 쪽에 이런저런 역사적 자취가 곳곳에 남겨져 있음을 목후배님의 문화 탐방기로 인해 비로소 알게됩니다..
그중에도 초안산에 내시묘가 많이 남아 있나본데 정비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니 반갑고 기대가됩니다.
내시라는 특성상 후손이 있을수 없기에 보살피는 후손없이 여태껏 보존되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거든요.
내시묘들이 집중적으로 많은 초안산... 수양아들을 들여서 대를 잇는 내시들도 부부의 연을 맺는데.... 내시의 벼슬에 따른 재물이 많아지므로 시집오는 처자들이 친정도 돕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 혼인을 맺었다고 합니다.
@목필균 (18회) 내시가 임금의 지근에서 총애를 받을수 있었던 자리이니 어느정도 권력과 부를 축적할수도 있었기에 가능했겠군요..
조선초기 4대 임금을 섬겼던 김처선 상선의 일생을 보더라도 나라와 임금을 위해 공헌했다는 자부심이 꽤나 컷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