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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글다는 가설을 굳게 믿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492년 8월 3일 세 척의 배로 탐험대를 꾸려 에스파냐 남서부에 위치한 팔로스(Palos)항을 출발했다. 당시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팔로스시에 탐험대를 적극 지원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 차출된 세 척의 배 가운데 기함으로 쓰인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는 항해가 후안 데 라 코사(Juan de la Cosa)의 배였다.
코사의 출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1460년경 에스파냐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의 산토나(Santoña)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배를 탔던 그는 1487년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의 서아프리카 탐험항해에도 참가했다. 그는 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 때부터 산타마리아호의 선장을 맡았고, 1493년 제2차 항해 때는 마리가란테(Marigalante)호의 선장 겸 지도제작자로, 1498년 제3차 항해 때는 라니냐(La Nina)호의 선장으로 줄곧 콜럼버스의 항해에 함께했다.
1499년 5월에는 콜럼버스의 제2차 항해 때 동행했던 알론소 데 오헤다(Alonzo de Ojeda)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원정대의 선장으로 대서양을 횡단해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 최대의 강인 에세퀴보(Essequibo) 강에서 베네수엘라 북서부의 파리아만(Golfo de Paria)을 지나 콜롬비아 북부의 벨라곶(Cabo de la Vela)까지 항해했으며, 1500년 6월 항해를 마치고 카디스 항에 귀항한 코사는 그동안 항해에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신대륙(Nova Terrarum)을 담은 세계지도를 제작해 국왕에게 바쳤다.
이 지도는 가로 96cm, 세로 183cm 크기의 제법 큰 양피지에 채색으로 그렸다. 다른 지도와 달리 서쪽이 위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럽에서 서인도제도 쪽으로 항해할 때 배의 진행 방향과 지도의 방위가 일치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지도 정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른 갈색의 선은 북회귀선이고, 그 좌측의 또 다른 위선은 적도를 가리킨다. 녹색 선으로 그려진 이 지도의 유일한 자오선은 교황자오선(Line of Demarcation)이라고도 하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세력 분할선이다.
- ▲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국립해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코사의 세계지도. 독일의 지리학자 알렉산더 훔볼트는 19세기 초 남미를 다녀온 뒤 코사의 지도야말로 라틴 아메리카를 정확하게 보여 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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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수호성인과 무사귀항 기원하는 성모자 상 그려져
아프리카 서쪽 해상에 위치한 카보베르데제도로부터 서쪽으로 100리그(league, 약 480km) 지점을 통과하는 이 자오선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고무된 에스파냐가 신대륙을 독점하기 위해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하여금 선언케 한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교황의 중재로 1494년 6월 7일 에스파냐의 토르데시야스(Tordesilhas)에서 카보베르데제도로부터 서쪽으로 370리그(약 1,800km) 떨어진 해상에 다시 분할선을 정했다. 이 조약으로 경계선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이, 서쪽 지역은 에스파냐가 차지하게 되었으나 이때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다.
지도 맨 위쪽에 그려진 그림은 어린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는 남자의 그림인데, 이 남자는 어린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포로(Christophoro) 성인으로 순례자나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이 그림 밑에 있는 커다란 방위반 내에도 성모자(聖母子) 상이 그려져 있어 당시 탐험항해의 안전과 무사 귀항을 빌기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방위반 밑으로 크게 쓰인 ‘MARCOCEANUM’이란 글자는 ‘MARE OCEANUM’의 오기로 대양, 즉 대서양을 뜻한다.
지도의 내용은 지도를 돌려 북쪽을 위로 놓고 보아야 이해하기 쉽다. 우선 교황자오선을 기준해 서쪽은 신세계로 거대한 대륙이 짙은 녹색으로 드러나고, 그 동쪽은 구세계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일부가 밝은 색으로 그려져 강한 대조를 이룬다. 구세계는 당시까지 확인된 지리정보가 그런대로 드러나 있지만, 아프리카 동쪽은 유난히 부풀어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형태도 명확하지 않고, 인도 반도 역시 돌출되지 않았다. 더욱이 아시아 동쪽은 밋밋한 해안선으로 적당히 뭉뚱그려 놓은 모양새다.
종래의 포르톨라노와 같이 크고 작은 방위반을 중심으로 방위선이 지도 가득히 분사되고, 육지 내부는 지명이 없는 대신 유럽 서부와 지중해, 아프리카 해안에는 지명이 빼곡하다. 육지의 공백부에는 1375년 제작된 카탈루냐 지도첩(Catalan Atlas)을 참조한 듯 도시를 나타내는 건물과 각 지역의 군왕, 전설적인 인물 등이 그려져 있고 북아프리카에는 아틀라스 산맥이,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보인다.
서쪽 신세계는 카리브해 주변의 쿠바섬과 아이티섬, 자메이카섬은 거의 현재의 모습과 흡사하게 그려졌고, 코사가 탐사했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해안에도 많은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지리정보가 밝혀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남아메리카 대륙 동쪽에 그려진 가상의 섬은 형태로 보아 토스카넬리(Toscanneli) 세계지도의 성 브랭당(St. Brandan's)섬이나 지팡구(Zipangu)를 나타낸 듯하고, 쿠바 섬 북쪽의 북아메리카는 미답의 거대한 대륙이 동쪽으로 뻗어 위치상으로는 그린란드까지 이어져 있다.
코사는 이 지도를 제작한 뒤인 1500년에도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와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 등과 함께 대 선단을 꾸려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의 벨라곶을 지나 우라바(Uraba)만(현재의 다리엔만) 연안을 따라 파나마 동해안 북부까지 탐사한 후 돌아 왔다. 1501년에는 베네수엘라 연안부의 지도를 제작하는 한편 남미 북쪽 해안을 따라 파나마 지협(地峽)까지 항해한 후 1502년 에스파뇰라섬(아이티)으로 돌아왔다. 이 때 제작된 지도에는 베네수엘라의 지명이 처음 등장한다.
1503년 코사는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우라바 대집행관에 임명돼 우라바 만의 펄제도(Pearl Is.)에 원정했고. 1509년에는 7번째 마지막 항해로 세 척의 배에 200명의 이주자를 태우고 오헤다의 배와 합류해 아이티섬에 도착했다. 이때 오헤다와 니쿠에사(Diego de Nicuesa) 사이에 선착한 이주자 문제로 말썽이 생기자 코사는 좀더 안전한 우라바만으로 이동해 이주자를 상륙시키려 할 때 저항하는 원주민이 쏜 독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코사가 태어난 산토나항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