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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청소년을 향하는 시선에 대하여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한 청소년 문제는 어쩌면 조급함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10대 그중에서도 가출·우범 청소년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문제’라는 표현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보편 명사로 자리 잡았다. 일단 문제를 지적하고 좌표를 찍으면, 그것을 목표 삼아 일종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문제적 좌표를 쉽게 설정하는 만큼, 우리는 사회가 규정한 좌표를 자기네 가족을 제외한 제삼자의 몫으로, 일반적 사회문제로 돌려세우는 일 또한 익숙하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에는 그 문제적 좌표가 없거나, 있어도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범 청소년’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을 드라마, 영화에나 나옴 직한 존재로 치부한다. 이 시선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 않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철 지난 판타지.
청소년 범죄를 향한 어른들의 조급한 시선
대통령 선거라는 빅 이벤트가 끝났다. 20대 대통령으로 낙점된 윤석열 당선자는 ‘갈수록 흉포해지는’ 10대 청소년 강력범죄 근절을 위한 해결책으로 손쉽게 촉법소년1)나이 하향 카드를 들고나왔다. 이 글에서는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촉법소년 나이를 현행 만 14세에서 12세로 낮추는 방안이 바람직한지를 논하지 않겠다. 우선순위가 그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정말 시급한 것은 처벌 강화나 현상 유지를 토론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21세기 이후 한국 사회에 청소년 강력범죄가 계속 증폭되고 있다2)는 인식과 그 해결책을 ‘타자의 문제’로 돌리기 위해 일부 우범 청소년을 희생양으로 설정한다. 그와 함께 이들을 일소해야 청소년 문제가 잠잠해지리라는 이른바 ‘본보기 효과’에 손쉽게 손을 들어준다. 이렇듯 촉법소년 나이 하향 카드를 꺼내드는 이들의 청소년 범죄를 향한 시선과 해결 방안이 지극히 손쉬운 좌표 찍기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확실히 조급한 것이다. 아니, 조급함을 넘어 터무니없다.
왜 우리는 조급한가. 학교 폭력, 미성년자 성매매, 편견으로 오염된 젠더 갈등, 왕따 분위기 고조, 폭력적 게임 콘텐츠 범람 등, 범죄를 유발한다고 추정되는 비윤리적 현상이 만연해져서인가? 아니면 이 현상들에 관해 기민한 시선과 인식을 갖지 못했기에, 잘 모르기 때문에 조급한 것인가. 이는 솔직하지 못한 답이다. 사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10대 청소년 문제의 본질을.
필자는 10년 동안 소년원 혹은 보호관찰을 받은 친구들과 어울려왔다. 어울렸다는 표현 외에 이들을 위해 적절히 행한 일은 많지 않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이다. 교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못한 부분이 태반이고,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적도 다반사였다. 이른바 가출 청소년의 탈선을 제대로 막지도 않았으며, 이들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소위 말하는 바른 교화의 길을 속 시원하게 열어준 적도 별로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교류해왔을 뿐이다. 이 정도가 이들을 지속해서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온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필자의 행동과 선택이 결코 가출 청소년 문제를 향한 일반적 대응일 수는 없다. 단지 이들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경험이 반영된 변명 섞인 소회일 뿐이다. 서툰 교화와 ‘꼰대’ 같은 가르침은 금물이라는 생각, 이들을 중립적 시선으로 지켜볼 용기가 절실했다. 여기에 또 하나, 기성세대가 품은 어설픈 조급함이 불러온 치명적 좌표 찍기를 경계하고자 부득이하게 가출 청소년을 향한 위 관점을 유지해왔다고 변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안타깝지만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지윤과의 만남
6년 전 일이다. 보호관찰 10호 처분을 받고 소년원에서 1년 넘게 생활한 뒤 사회로 나온 10대 후반의 친구, 지윤(가명)의 이야기다. 글쓰기와 검정고시 지원을 매개로 지윤과 필자는 멘티와 멘토의 관계로 교류를 시작했다. 처음에 지윤은 자신의 범죄 사실이나 유년 시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족에 대해서는 더더욱 함구했다. 마음을 온전히 여는 일은 기대하지 않았다. 어떤 사건을 겪었으며, 사건 현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듣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고졸 검정고시를 가까스로 합격하고 미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한 날,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지윤은 필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시작과 끝, 그리고 현재 심정을 밝혔다. 녹취나 인터뷰는 아니었기에, 있는 그대로 지윤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물론 그 말에 과장과 거짓이 섞여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교차 검증이 필요한 대목도 상당했다. 다만 설명 과정에서 과장된 말이 스며들었더라도 지윤의 짧은 생을 관통하는 비극의 정서만큼은 진실하다는 점이 중요했다.
지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주변에 알려졌다.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 때는 저녁 9시에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초등학교 때 지윤을 지켜본 선생님들은 유달리 사교성이 좋아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지윤은 초등학교 때 기억을 악몽이라고 고백하며, 친구가 좋아서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무조건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는 점이 지윤이 밝힌 이유 전부였다.
더 정확히 말해, 지윤은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유는 확실했다. 울타리가 되어야 할 가정이 생지옥이었기에 그랬다.
지윤은 재혼 가정의 자녀였다. 지윤 엄마는 이혼 후 아홉 살 연하인 남자를 만나 재혼했는데, 새아버지가 된 남자 역시 사실혼 관계에서 낳은 딸이 있었다. 지윤과 또래였던 딸은 피가 섞이지 않은 자매가 되었다. 모든 재혼 가정이 결코 지윤이 가정과 같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새아버지는 지윤 엄마에게 빠르게 성적 흥미를 잃었고, 그렇게 잃어버린 성적 충동은 초등학생 지윤에게로 향했다. 지윤은 인간의 도를 넘은 성추행 사실을 엄마에게 즉각 알렸다고 말했다. 지윤 엄마는 ‘가족끼리 잘 지내보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구체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미 남자에게 경제적·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된 상태였고, 그의 그늘이 필요했다. 그 안정감에 취해 딸 지윤을 향한 성추행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지윤은 이해했다.
이 상황에서 지윤을 더 힘들게 만든 것이 있었다. 새아버지의 딸이 한심스럽고 더럽다는 듯 지윤을 향해 보내는 경멸의 시선이었다. 새아버지는 자신이 낳은 친딸이 보는 앞에서 지윤에게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추행을 자행했다고 했다. 그 장면을 안 보는 척하면서 지켜보는 그 친딸의 비겁한 시선이 지윤을 미치게 했다. 자신은 충격 때문에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종일 신경이 날카로워 미칠 것만 같은데,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도 포기하고 시험도 포기할 정도로 인생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는데, 그 친딸은 자신이 고통받는 시간에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며 좋은 성적으로 학교와 집에서 칭찬받는 모범생이 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지옥이었다고 지윤은 말했다.
엄마도 그렇고, 학교 선생에게 고통을 호소해도 그때뿐이었다고 말한 지윤은 결국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윤을 둘러싼 SNS의 덫은 은밀하고 비열했다. 채팅 앱을 통해 지윤과 같은 경계에 선 아이들을 향한 미성년자 성매매의 유혹은 손쉽게 찾아왔다. 어쩌면 그 세계만이 지윤을 인정해 주었으며, 적어도 지윤에게는 무조건적 희생과 양보를 강요한 가족과 달리 최소한 대가는 받았다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 채팅 앱에서 시작한 탈선은 곧바로 가출 청소년을 체계적으로 흡수하고 미성년자 성매매를 알선하는 조직에 합류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가출을 시작하고 초등학교를 그만둔 후, 일반인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서울 밤거리 안마 시술소와 노래방, 단란주점 2차 도우미로 돈을 벌 그 시점에 지윤은 첫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지윤이 학교를 그만두자마자 ‘몸 파는 아이’라며 악담과 조롱의 소문을 퍼트린 새아버지의 딸, 그 아이를 특수폭행한 일이 범죄의 첫 시작이었다.
사건은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배경 서사는 전부 생략하고 단지 지윤이 이복 자매의 얼굴과 목 부위에 상해를 가한 엽기적 범행을 저질렀다는 개요만 충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아울러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지윤이 촉법소년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만 강조했다.
이후 지윤은 본격적으로 성매매에 뛰어들었다. 집과 쉼터, 청소년센터에서 적지 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지윤은 두 번째 범죄를 저질렀고 보호관찰처분을 받았으며, 법무부로부터 관리받는 그 기간에 세 번째 범죄를 일으켜 끝내 소년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때 필자를 만난 것이다.
첫 번째 범죄 이후 지윤이 저지른 사건도 매우 잔인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때의 친구를 거짓말로 유인해 성매매를 강요했으며,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긴 일이 두 번째 범죄였다. 시간이 지나 지윤은 술집에서 만난 대학생과 연애했는데, 알고 보니 그 대학생은 정식으로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지윤은 자기를 성적 유희 대상으로만 생각한 대학생에게 보복하지 않고, 대학교에 다니는 그의 여자친구를 특수폭행하고 협박했다. 이것이 세 번째 범죄였다.
누군가 지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더라면
지윤이 저지른 범죄의 잔혹성, 반성할 줄 모르는 태도를 보며 필자는 솔직히 어떤 것도 공감할 수 없었다. 지금도 물론 지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꼰대 같은 태도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적어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10대 청소년의 유년기 성장 과정 가운데, 아이 눈에 담긴 세상의 색채가 한없이 투명한 바다 빛깔에서 어떤 진실도 곤두박질치게끔 회칠되어 검은색이 돼버린 원인이 무엇인지는 생각해야만 한다. 범죄 이전과 이후, 행간에 대한 프로파일링 질문 하나가 남는다. 왜 지윤은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었던 새아버지의 성적 폭력을 문제 삼지 않고, 이복 자매, 동성 친구, 남자친구 애인을 향해 극단적 범죄를 자행했을까. 왜 악의 고리, 심연의 어둠을 보지 못했을까.
의문에 관한 조심스러운 진단은 안타깝게도 악의 모호성과 그 궤적을 함께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심각한 수준의 악의와 범죄 양태에 관해서는 많은 이가 혀를 차며 공분하고 가슴 아파한다. 이와 별개로, 악의 중심에 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악의 대상을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고 흐릿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악의 모호성이다. 만약 엄마에게 성추행 사실을 알린 그 순간, 이를 어떻게든 문제 삼고 공론화했다면 지윤의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까. 엄마가 침묵했더라도 기민하게 사회적 가족인 공동체·학교·교회가 예의 주시하고, 더 나아가 적극 개입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랬다면 지윤의 분노가 지금처럼 악의 중심이 아닌 악의 주변을 향해 파열되는 모호성으로 주저앉고 말았을까.
지윤의 이야기가 모든 가출·우범 청소년의 일반 사례는 될 수 없다. 하지만 필자가 10년 가까이 지켜본 경계 청소년의 삶 한 자락에 이것들이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왜곡되고 비틀린 가정환경, 무한 경쟁이라는 말조차 촌스러운 구호가 돼버린 대한민국의 공동체 의식 부재. 이 지독히도 건조하고 메마른 무정함에 더하여, 영화와 드라마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하는 폭력의 도구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하게 전시되고만 있는 성폭력과 젠더 불공정 심화…. 여전히 이상주의에 빠져있는 듯한 기독교의 사랑·용서·화해 같은 추상적 담론의 공허한 메아리는 또 어떤가. 이를 종합해보면 지윤의 사례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10대 청소년을 바라보는 한 시선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기도와 구제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일까
청소년 범죄를 결코 낭만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잔인한 소년범죄와 이해하기 어려운 설득력 없는 범행동기는 기성세대 생각과 기초 상식을 근간에서 뒤흔든다. 여기서,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은 기독교의 윤리적 시선이다.
무조건적 용서와 화해, 평화 등 기독교가 가진 윤리적 시선, 예수 사랑의 거시적 담론이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이 거시적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깊이 썩어가는 환부에 관한 중립적 성찰을 외면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0대 가출 청소년을 위해 기도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구제한다고 했을 때, 기도와 구제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일까. 가출·우범 청소년이 어떤 환경과 굴레에 있는지, 그 구조를 지배한 악의 모순은 무엇인지, 그리고 용서의 윤리와 별개로 이들이 저지른 범행 수위는 어느 정도인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의 지속이 가장 시급한 기도 제목이어야 하지 않을까.
잊지 말자. 가출·우범 청소년을 추상적으로 뭉개진 그저 그런 타인의 가족 문제로 보는 시선, 재범률이 높고 사회를 위협하는 위기 인자로 가출 청소년이 작동한다는 편견으로 오염된 시선 모두, 이들을 두렵고 우울한 검은 소년들로 재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색깔은 처음부터 검은색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떤 환경, 어떤 가족, 어떤 사회구조에 따라 충분히 다른 선택이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순백한 영혼들이다. 이 소년들의 몸과 영혼을 검은빛으로 메워버린 기성세대의 조급함과 위선을 들여다보는 5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처음부터 검은색이 아니었다..
참으로 안타깝다..
어른들이 더 잘해야겠지..
잘 살아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