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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게제] 이달의 말씀 -당신은 정상입니까? 비정상 입니까?
한번은 미국 어떤 시골에서 주유소에 들어갔는데, 20여 명의 오토바이 애호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나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옷과 화장과 헤어스타일이 전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발을 했고, 어떤 아이들은 머리를 면도로 밀어서 반들반들했습니다.
다들 검은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고 귀에는, 피어싱[piercing-귀에 구멍을 뚫어 장식]을 했고 손과 팔에는 문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화 속에 욕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이 어색했습니다. 그 오토바이 애호가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저 양복 입은 동양인이 왜 여기 있는가?”라는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당황했고, 불편했습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느꼈을까요? 왜냐하면 주유소 안에서는 그들이 정상이었고, 내가 비정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유소 밖으로 나가면 내가 정상인데, 주유소 안에서는 내가 비정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유소 안에 그들의 숫자가, 압도적[위협적]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입니까? 정상과 비정상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모여 있는가로 결정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로 결정됩니다. 이 세상에서 정상과 비정상은 내 마음과, 내사상과 내 신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멋진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유럽’의 어떤 ‘나체촌’에 가면 어떨까요? 거기선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비정상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성경대로 믿을지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비정상이 되고 맙니다.
심지어 우주의 왕,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정상으로 볼지라도,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와 사도들이 나를 정상으로 볼지라도, 이 세상 교회와 사람들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이 세상은 숫자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정말 성경의 신앙을 따르기 원하면, 이 세상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 대부분의 사람은 성경에, 반쯤 걸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든지 성경 안으로, 확실하게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비정상 취급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도 ‘유대교회’로부터 완전히 비정상 취급받았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이단[異端:자신의 신앙관이 다른 교리]의, 괴수[수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재 시대의]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생기게 될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수에 속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수에 속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색해서 많이 나오는 것이 정답이고,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전혀 아닙니다. 진실과 진리는, 투표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엘리사’와 사환이 조그만 마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새 ‘아람’ 왕이 보낸 수많은 병거와 군사들에 의해서 포위당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하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하고.”(왕하6:15~16). 이것이 어떤 상황입니까? 도무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면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환이 ‘엘리사’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어떻게 말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 선지자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군대숫자를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 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 말과 불 병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 도다.”(시 34:7).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약속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면, 여호와의 천사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믿으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있는데, ‘엘리사’는 바로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움직이는 천사들의 숫자가, 사탄과 악령보다 많을까요? 적을까요? 하나님 편 천사들 숫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주 전체에 비교하면 먼지보다 작은 행성입니다. 우주에는 엄청난 숫자의 하나님 편이 있습니다.
그 숫자는 사탄과 악령들의 숫자를 압도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구에도 압도적인 숫자의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기위해서 섬기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주 전체와, 등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주 전체에서, 소수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주에 있는 엄청난 숫자의 천사들이, 주의 백성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왜 하늘의 존재들이, 지구의 사람들을 구경할까요? 하늘 왕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매달려 벌거벗기고 모욕당하면서 죽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의 눈에는, 누가 정상으로 보일까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는 성도들입니다. 천사들의 눈에는, 그들이 정상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 천사들은 지구를, 정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 눈에는,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비정상입니다. 왜 비정상일까요?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까지, 진리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지구가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고, 정상 취급을 받는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천사들의 눈에는, 완전히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포인트(point- 핵심강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지구에서 정상으로 취급받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과 우주전체에서 비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 지구에는 진리에 관심이 없고,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상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진리를 붙잡고, 살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눈치를 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핍박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축될 필요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주 전체에서 보면, 하나님과 진리의 편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부터 지금까지 우주 전체로 볼 때, 절대다수는 항상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편에선 자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초월(超越:일반상식을 넘은 말씀 인식)해서,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를 보지 않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 숫자를 세면서 그들의 인정과 지지를 구하면서 살면,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요? 온 우주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나는 내 앞에 있는 상황만 보면서, 거꾸로 가고 있다면 그 모습이 어떨까요?
우주 전체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음도 감수하고 있는데, 우리는 넓은 길 가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고민한다면, 하나님과 천사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요? 정말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상상 이상의 것으로 보상하시고, 갚아주시고, 영생과 하늘을 주시고, 온 우주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실 텐데,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완전히 비정상으로 보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주 전체에서, 아주 극소수에 속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상황을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물론, 우주의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텔레비전에서, 드라마에서 항상 다수에 속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도 숫자로 결정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내 신앙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금세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시대는 절대다수를 상대해서,
반대편에 서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토해 내치고 싶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4~15).
하나님께서 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보면서, “토해 내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말하면서, 중간에 서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를 두더라도,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내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토해 내치고 싶은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사람을 보지 말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 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왜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는지 아시겠습니까?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사들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2~39).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으로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멋있어 보입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고, 의를 행하며 약속을 받고 사자들의 입을 막고, 누가 이런 삶을 싫어하겠습니까? 영웅처럼 보이는 삶인데…. 그런데 그들에게 정반대의 삶이 있었습니다. 믿음에는 양면이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5~39). 왜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했을까요? 그들은 지구에서 소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믿으면, 로마 황제로부터 악형을 받아야 했고, 조롱받아야 했고, 채찍질 받아야 했고, 옥에 갇혀야 했고, 돌에 맞아야 했습니다.
우주 전체에서는 다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이었지만,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는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에 맞아야 했고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소수였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토굴 속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이 통과해야 할 경험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로마’ 황제의 핍박도 없고, 옥에 갇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에 진리가 정확하게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붙잡으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조롱받게 됩니다. 코너에 몰려서 불편함을 당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함께 교회 다니던 친구들이 떠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에 순종하려고 하면, 다니던 교회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만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그대로를 붙잡고 살았던, 성도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어떤 경험을 했습니까? ‘아벨’은 제사와 예배에 대한 진리 때문에, 순교 당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 11:4). ‘가인’과 ‘아벨’ 사이에, 제사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의롭다는 증거를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온 우주의 천사들은, ‘아벨’을 의인으로 보았지만, ‘아벨’은 같은 교회에서 같은 하나님을 믿던, 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하늘이 인정한, ‘아벨’의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아벨’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벨’은 ‘가인’과 함께, 악인의 반열[신분등급]에 이름을 올렸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하셨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순종했습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고향과 집과 땅을 버리고, 목적지도 모른 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다 놓고 떠난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고향사람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아버지와 친척들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완전히 비정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모세’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왕의 보좌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즐겨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주변에서 말렸을까요? ‘모세’는 ‘애굽’ 전체에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모세’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사람들(‘아벨’,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말씀 속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의인들이 갖고 있던 믿음의 3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그들은 하늘을 가까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멀리서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것은 멀리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렇게 좁을 길 걸으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실까?
정말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의인들의 고생과 고통을 보상하실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영적인 것은 멀리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실까?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고민을 정말 아실까? 하늘은 정말 있는 것일까?”
여기까지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과 우리의 믿음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째 단계로 갔습니다. 여기서부터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 11:13). 믿음의 첫째 단계는 하늘을 멀리서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에서는 하늘을, 실제적인 것으로 확신하며 받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멀리 있는 하늘을, 멀리 있는 부활을, 확신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고, 예수께서는 정말로 재림하실 것이고, 이 땅에서 좁은 길을 걸으면, 반드시 보상하실 것을 실제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둘째 단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두 번째 단계까지 오셨습니까?
예수께서는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고, 죽은 의인들은 부활할 것이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 땅에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둘째 단계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까지, 믿음이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인생이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거룩한 능력이 우리 속에서, 죄와 세속을 쫓아내 버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믿음이 이 두 번째 단계까지 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까지 온 사람이, 진리를 거절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늘과 진리와 말씀을 확신하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을 멀리서 희미하게 보면서, 고민하는 단계입니까? 아니면, 하늘을 실제로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왔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할 때, 이 믿음은 두 번째 단계까지 온 믿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두 번째 단계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만일 두 번째 단계까지 왔다면, 믿음의 세 번째 단계가 자연스럽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 하였으니.”(히 11:13). 믿음의 세 번째 단계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 땅에서 ‘이방인‘(異邦人:외국인, 순례자, stranger), 낯선 사람이 되고, 나그네’가 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비정상[세상 아닌 하늘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믿음의 세 번째 단계까지 오면, 왜 이 세상에서 비정상처럼 보일까요? 왜냐하면 이렇게 믿는 사람이,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늘에서는 지극히 정상인데, 이 땅에서는 비정상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자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믿음이었고,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믿음의, 최종 단계를 사모하십니까? 요즘 ‘유 튜브’에서 “마지막사명” 설교를 듣는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살려고 하니까, 사람들과 멀어지게 됩니다. 다니던 교회에서도 외롭게 됩니다. 진리를 붙잡으려고 하니까, 내가 아주 소수에 속하게 되는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아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런 고민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정상이 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낯선 나그네가 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 11:14). 무슨 뜻입니까? 믿음의 세 번째 단계까지 온 성도들은, 하늘 본향을 정말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성도들이 되려면, 이 땅에서 비정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과, 이 세상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하늘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비정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아주 가까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끌어당기는 힘이, 아주 강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나옵니다. 12장 1절에는 어떤 말씀이 나올까요?
우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 장면은 경기장의 장면입니다. 관중석에는 우리를 지켜보는, 구름 떼 같은 수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관중석에는 하늘의 존재들이 있고, 이 땅에 사는 우리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입니다. 경기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무거운 죄, 넘어지기 쉬운 죄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말 승리하기 원하면 버려야 합니다. 말씀과 주님만 바라보고 뛰어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증인이 무엇을 볼까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봅니다. 우리가 왜 돈을 버는지 봅니다. 왜 그 옷을 사는지 봅니다. 무엇을 위해서, 공부하는지 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나타내는지 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때, 가장 행복해하는지 봅니다. 백 년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이 좁은 길과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 있다. 좁은 길[하늘 길]은 영원한 생명[영생복락]으로 이끌며, 넓은 길[오감의 자유방종 쾌락]은 영원한 멸망[지옥 불에 완전 소멸함]으로 이끈다. 두 길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으며, 그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점이 분명했다. 두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성품과 생애와 의복과 대화와 [생각]에 있었어도, 서로 반대된다.
독자 여러분께서 좁은 길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날마다 인도해주시길 기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는, 비밀휴거가 없습니다.
***** “마지막 사명”(앤드류 강 목사)의 [더 미션 1호]에서 발췌정리 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