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애국지사
박용만 · 이강훈 선생을 그리며...
우리 강원도에는 400여명의 독립유공자와 가슴 벅찬 나라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활동을 한 우성(又醒) 박용만 선생 일가 및 일생을 조국광복 및 민주사회 건설에 헌신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한인소년병학교 교장 우성 박용만이 특별한 점은 박용만 한사람뿐만 아니라 그 집안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는 구국일가(救國一家)의 빛나는 전통을 청사에 남기었다는 것입니다.
박용만(1881~1928)의 족숙인 박건병과 6촌인 박용각·박용철은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민족운동과 항일투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위 이용화는 청산리 대첩에 쓰인 체코군 무기를 공급했으며 공명단 사건의 주역입니다. 이용화의 아들인 이홍근(육군 제32사단 부사단장)은 광복군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박용만 선생 일가(6인)는 이회영 형제 및 안중근 일가와 비견할 만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문이며 광복정신(光復精神)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재미독립운동계의 3대지도자인 박용만(朴容萬)은 1881년 7월 2일(윤) 강원도 철원 중리 109번지에서 무관(武官)인 박선병과 경주김씨 사이에서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박용만은 개화 선비이며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간부였던 숙부 박장현(1871~1907)의 영향으로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했으며,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1912년 졸업)하였습니다.
의병정신(義兵精神)의 맥을 이은 박용만은 한말의 풍운(風雲) 속에 1905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어 1909년 6월 역사상 해외 최초의 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에 설립하여 조국광복(祖國光復)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 소년병학교는 미국인들도 ‘조선의 웨스트포인트’라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1914년 8월 19일,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국민보(國民報) 주필로 활동하면서, 또 하나의 독립군 기지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여 300여명의 군사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광복운동의 본류인 인재양성과 무장독립운동의 진원지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와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은 당시 조선민족에게 무한한 긍지와 구국의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박용만과 재미동포들로 인해 독립운동사에서 1910년대는 국권을 빼앗긴 겨레의 망연자실한 비탄의 세월이 아니라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조선독립전쟁의 여명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의 거목(巨木)인 박용만의 또 다른 진면모는 망국의 시대에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열게 한 그의 정치사상입니다. 1911년 3월,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인 박용만은 민족의 복리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무형의 국가 즉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한 임시정부(假政府)가 필요하다는 힘찬 논설을 발표합니다. 이는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신호탄이 되어 1912년 해외한인단체를 통합한「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게 되며, 7년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박용만은 지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비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한꺼번에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다재다능(多才多能)의 인물이었습니다.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의 설치와 운영은 그가 1908~1912년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던 와중에 추진한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인 1911년「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았고, 1911년에는「아메리카혁명(亞美里加革命)」과「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및「군인수지(軍人須知)」를 저술하였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가운데 하나도 제대로 성취하기 힘들었겠지만 박용만은 불과 4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그의 저서가 하나같이 깊이 있고 수준 높은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그는 한글가로쓰기와 필사체 사용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국어교과서인 조선말 독본(1927)의 삽화도 직접 그린 화가이기도 합니다.
박용만은 북경(北京)에서 신천지 개척 및 광복달성에 매진하던 중 배일조선인의 영수로 지칭하던 일제의 이간으로 1928년 10월 17일 48세의 나이로 서거합니다. 참다운 대장부로 주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였던 그는 이렇게 사라졌으나 그 운동의 성과는 위대하였습니다.
남은 동지들(문양목·백일규·정두옥)은 미국과 하와이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며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제자들도 조선독립에 노력하며 민족의 인재로 성장합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김용성(맹호군대대장), 이희경(대한적십자회 초대회장·임시정부 외무차장), 정한경(철학박사·주일대표부 대사), 김현구(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유일한(유한양행·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 구영숙(초대 보건부장관) 등이 있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으며, 2003년부터는 고등학생들의「한국근현대사」교과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향인 철원에서는 1991년 12월 30일, 그의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의 높은 뜻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철원초등학교에 작은 비를 세웠습니다. 미주 조선독립운동의 태동지인 헤이스팅스대학 교정에도 한국독립운동가 박용만을 기리는 기념비(2002. 7. 12)가 세워져 있습니다.
철원의 한사람으로서 박용만과 그 동지들의 애국독립의 뜻에 공감하여 큰 도움을 주신 네브라스카주와 헤이스팅스(hastings) 대학교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편 슬플 따름입니다. 예부터 모든 영웅과 열사들이 비록 나가서 죽는데도 죽어서는 그 몸이 제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건마는 박용만 선생은 찾는 이가 없어 그 유해가 못 돌아오고 있습니다. 또한 찬란한 정치사상과 민족정기가 담긴 저서(아메리카혁명·국민개병설·조선말 독본·제창조선문화일이어 등)는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복(光復)된 오늘 우성 박용만 전집의 간행을 통해 그의 혼(魂)이라도 고국(故國)에 돌아와 위로 받고 웃으시길 바랍니다.
독립투사인 이강훈 전 광복회장(1903~2003)은 바른 삶과 화목이「제2광복」이며, 민족통일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주장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우리나라는 독립되지 않았다며, 역사를 보면 통일은 된다고 보며, 무력으로는 안 되고 대화로써만 통일된다고 예견하신바 있습니다.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일본은 극우근성을 버려야 하며,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사상이 혼란이 시기일수록 독립사상(獨立思想)이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강원도 김화(金化)에서 태어난 이강훈의 부친은 한말(韓末)에 종이품(從二品)까지 오른 문관(文官)으로 김화군수(金化郡守)를 지냈습니다. 17살 소년으로 3․1운동에 참여했으며, 18살에 자유를 찾아 북간도로 떠났습니다.
1924년 북간도사범학교(北間島師範學校)를 졸업한 그는 김좌진(金佐鎭)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재만 교포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1933년 3월 17일, 이강훈 선생은 동지인 백정기․원심창과 함께 일본천황의 밀명을 받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폭탄으로 저격하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45년 10월까지 동경에서 옥살이를 하다 맥아더 장군의 석방으로 풀려나왔습니다.
1946년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송하였고, 일본 거류민단 창설기에 재일동포의 단결과 권익증진에 노력하였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광복회장을 지내셨습니다. 귀국 후 독립사상가(獨立思想家)로 저술에 매진한 이강훈 선생은 1969년부터 1983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 등을 지내며 27권짜리「독립운동사」편찬에 중심역할을 하였고, 틈틈이 많은 책들(무장독립운동사, 마적과 왜적, 한말의병장 김도규 실기, 민족해방운동과 나, 항일독립운동사, 이강훈 역사증언록 등)을 써냈습니다.
독립운동도 위대하지만 독립운동사를 올바른 기록으로 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은 더 중요하며 지난한 일입니다. 1990년, 학구적인 이강훈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갑신정변부터 광복 때까지의 민족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한「독립운동대사전 Ⅰ․Ⅱ」를 완간해 20년 공든 탑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2백자 원고지 7천여장 분량의 이 역작(力作) 속엔 946건의 사건과 1100명의 인물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 독립운동대사전은 이강훈 선생의 조국애와 민족애의 결정체로서 17살부터의 독립운동체험과 연구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우리 시대의 보전(寶典)입니다.
그는 관련 자료를 찾아 형무소창고에서 사흘밤낮을 먼지에 묻혀 지낸 일도 계십니다. 1991년 2월 완간 된 독립유공자 43,000명의 개인별 공적과 활약상을 집대성한「독립유공자 공훈록(전8권)」의 편찬위원으로도 참여한바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 포상위원이었던 이강훈 선생이 발굴해낸 숨은 애국지사만 4천 7백여명에 이릅니다.
2003년 1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강훈 선생의 명예장례위원장을 맡으셨으며,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추서하여 고인을 애도하였습니다.
저는ꡒ인간사회의 가장 큰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양심을 팔지 않고 살며 장수하는 것ꡓ이라는 선생의 말씀(1994)이 마음에 새롭습니다.
이강훈 선생의 “사람은 지조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권력에 아부하거나 곡학아세해서는 안 되지요. 죽을 때 이름 하나만이라도 깨끗하게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말씀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우성 선생과 청뢰 선생이 다시금 그리워집니다. (2011년 2월 23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