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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得怛朴(부득달박)
夫:지아비 부, 得:얻을 득, 怛:슬프할 달, 朴:성 박.
어의: 부득과 박박이라는 두 성인을 가리키는 말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사람이 성불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유사 권3
신라의 백월산(白月山)은 구사군(仇史郡. 경남 창원) 북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빼어난데다가 백 리나 뻗은 진산(鎭山)이었다.
이 산 동남쪽 선천촌(仙川村)에 노힐부득(努肹夫得)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노힐부득의 아버지는 월장(月藏)이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달달박박의 아버지는 수범(修梵)이고, 어머니는 범마(梵摩)였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풍골이 범상치 않았는데 속세를 떠나 살려는 생각이 같아 서로 친하게 사귀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들은 치산촌 법종골(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있는 절이 수양할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 머물고, 박박은 유리광사(琉璃光寺)에 머물렀다. 이들은 모두 처가들이 있었으나 속세를 완전히 떠날 생각을 하고 서로 만나 의논했다.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옷과 음식이 원하는 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르며, 따뜻한 것이 더 좋다. 또 여자와 집이 좋기는 하지만 연화장(蓮華藏)에서 부처님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더구나 불도를 배웠으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참된 마음을 닦았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세속에서 벗어나 무상의 도를 이뤄야 할 터인데 어찌 속세의 무리들과 다름없이 지낸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각자 꿈을 꾸었는데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으로부터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이마를 어루만져주는 것이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두 사람이 서로 꿈 이야기를 해보니 그 내용이 똑같았다. 두 사람은 분명 부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백월산 무등골(無等谷)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岩) 위에 판자로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은 동쪽의 돌무더기 밑에 승방장(僧方丈)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을 구했고, 박박은 미타불을 공경하며 쉬지 않고 외웠다.
기유년(706년) 4월 8일, 날이 저물어 가는데 나이가 한 스물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 향기와 사향 향기를 풍기면서 홀연히 박박의 편방에 찾아와 자고 가기를 청하는 글을 지어 보였다.
길 가는데 날이 저물어 천산이 어두워지네.
길은 어둡고 성은 멀어 인가가 보이지 않으니
오늘 저녁 이 암자에서 묵어 가려고 하는데.
자비로운 스님께서는 굳이 꾸짖지 말아주오.
그러자 박박이 낭자에게 말했다.
“절은 경건해야 하는 곳이니 그대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오, 하니 지체 말고 떠나시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버려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낭자는 할 수 없이 남쪽 뇌방으로 가서 먼저와 같이 청했다. 부득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소?”
“저의 마음이 대허(大虛. 하늘)와 같은데 어지 오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스님의 덕행이 높다는 말을 들었기에 장차 보리를 이뤄주려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첩첩 산중에 날은 저문데
가고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한층 깊고
냇물 물소리는 한결 새롭게 들리는데.
길을 잃어 찾아 온 것만은 아니리오.
스님께 큰 길을 일깨워 주려 함이니
부디 내 청을 따라주시되
내가 누구인지 묻질랑 마시오.
부득이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며 말했다.
“이곳은 부녀자가 함께 있을 곳은 아니지만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 또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이고, 더구나 깊은 골짜기에 밤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불편하겠지만 하룻밤은 머무실 수 있을 테니 그리하시오.”
부득은 그를 암자 안에 머물게 했다.
밤이 깊어지자 아름다운 낭자가 한 지붕 아래 머무는지라 부득은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벽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염불을 외웠다. 이윽고 날이 샐 무렵에 낭자가 부득을 불렀다.
“스님! 죄송하오나 내가 갑자기 해산 기미가 있어 그러하니 짚자리를 좀 깔아 주십시오.”
부득이 조심스럽게 짚자리를 마련해주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촛불을 밝혀주자 해산을 마친 낭자가 이번에는 목욕을 시켜 달라고 했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운 심정으로 욕조를 마련해 낭자를 그 가운데 앉히고 목욕을 시키자 욕조 속의 물에서 향내가 풍기며 금빛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스님께서도 함께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하니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고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언제 만들어졌는지 연화대(蓮花臺) 하나가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거기 올라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실은 내가 관음보살이오. 대사를 도와 큰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온 것입니다.”
말을 마치더니 금세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은 낭자가 떠난 뒤에 생각했다.
“어젯밤에 부득이 아마 파계했을 것이니 가서 위로를 해주어야겠다.”
그러나 가서 보니 부득이 미륵존상이 되어 연화대에 앉아 있는데 몸빛이 모두 금빛이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셨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하자 박박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서 부처를 만나고도 모시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질어 먼저 뜻을 이루셨습니다. 바라건대 도반의 정을 잊지 마시고 부디 소승도 계도해주소서.”
부득이 말했다.
“욕조에 아직도 금액이 남아 있으니 목욕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박박도 목욕을 하니 역시 부득과 같이 무량수불이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夫於第一(부어제일)
夫:지아비 부, 於:어조사 어(늘). 第:차례 제, 一:한 일.
어의: 남편이 제일이라는 말로, 조선 중종 때 정승을 지낸 홍인필의 부인에게서 유래했다. 조건이 모두 같아도
내 남편이 제일 좋다는 지어미의 도를 깨우쳐 주는 말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때 영의정 송질(宋軼.1454~1520은 점잖기로 유명하고, 그의 정경부인(貞敬夫人)은 투기가 심하기로 유명하여, 그 내외는 이 유명, 저 유명을 합쳐 더욱 유명했다.
그러나 송 정승의 유명은 세인의 존경을 받는 유명이었으나 부인의 유명은 남편과 집안의 체면을 rkR는 유명으로, 그 행실이 정승의 부인으로서는 심히 도가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번은 시중을 드는 계집아이가 송 정승의 세숫물을 떠다 놓고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정승이 세수를 하고 수건을 받으려다가 계집애가 귀여워 별 생각없이 ‘그것 참 귀엽기도 하다.’ 고 하면서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음날 아침, 송 대감은 밥상의 밥 뚜껑을 열다가 기겁을 했다. 밥그릇 속에는 밥 대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계집아이의 손가락이 담겨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부인의 소행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대감은 그 아이의 아비를 불러 종의 문서를 내주고, 토지 몇 마지기를 떼어주며 사과하고 돌려보냈다.
송 정승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모두 외탁을 하여 어머니를 빼닮았다. 송 정승은 이런 딸들을 다잡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먹물 세 사발을 타 놓고 딸들을 불렀다.
“너희들도 너희 어머니처럼 투기를 한다면 패가망신할 것이 분명하니 마음을 그리 쓰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든지, 아니면 이 약을 먹고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여라!”
그러자 위로 두 딸은 투기를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막내딸은 ‘제 성미로 못 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 면서 먹물을 마시려고 했다. 두 언니가 깜짝 놀라 사발을 빼앗기는 했지만 송 정승은 막내딸의 장래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 성미를 누를 수 있는 사윗감을 고르는 중에 홍언필(洪彦弼.1476~1549)을 만났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였으나 이미 상처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송 정승은 그의 늠름함이 능히 한 여자를 제어할 수 있는 사윗감이라고 생각되어 자기의 셋째 딸과 혼인할 것을 제의했다. 홍언필도 정승의 딸에게 새 장가를 가게 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혼사 전날, 송 정승이 홍언필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내 딸이 다 좋지만 한 가지 성미가 사나우니 그 애의 성질을 누르기 위해서는 이러저러 하라.”
그러나 정경부인은 사윗감이 상처한 경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怒)했다.
“내 딸이 어떤 딸인데 재취로 보내다니요. 재상가의 체통이 안 섭니다. 예단을 물리세요.”
장모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홍언필도 화가 치밀어 말했다.
“내가 비록 상처한 몸이기는 하지만 장인어른께서 결정하신 일을 장모께서 뒤엎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 댁 딸 아니면 장가를 못 들 것 같습니까?”
그러자 송 정승이 나서서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소견 좁은 아낙네와 같이 행동하면 안 되네. 자네가 참게나.”
사위는 장인의 말에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처가에 머물기는 했으나 신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3년 동안, 홍언필은 처가에는 얼씬도 안 했다. 그러나 장인과는 은밀하게 소식을 주고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자 그제야 정식으로 처가에 들렷다.
뒤늦게야 사위의 됨됨이를 알게 된 정경부인은 자신의 경솔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했다.
그 후 홍언필이 정승에 오르니 그의 부인으로서는 친정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훗날 영상에 오른 아들까지 부(父), 부(夫), 자(子) 모두 세 정승을 맞았다.
말년에 사람들이 세 정승을 보시니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정승이었을 때는 젊은 탓에 그냥 좋았고, 남편이 정승이었을 때는 내가 정승이 된 것 같아 좋았으며, 아들이 정승이 되었을 때는 내 나이가 들어 비록 늙었으나 마음이 피어오르는 구름 같아 좋았소. 그래도 남편이 정승이었을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소.”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糞如大鼓(분여대고)
糞:똥 분, 如:같을 여, 大:큰 대, 鼓:북 고.
어의: 똥덩어리가 커다란 북 만하다. 즉 똥덩어리가 크니 따라서 그 똥을 눈 사람의 신체도 클 것이라는 말이
다. 어떤 한 가지로 미루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유사 권1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은 상이 김(金)씨였으며,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또는 지철로(智哲老)라고 했다. 지증(智證)은 시호였는데, 시호가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부른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런데 지증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그에 걸맞은 왕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전국에 왕후가 될 배필을 구하는 방을 붙였다.
모량부(牟梁部)의 한 관리가 동로수(冬老樹) 아래 개울가를 지나는데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앞에 놓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관리는 그 동을 싼 임자가 여자라면 왕의 짝이 될 만하겠다고 생각하고 수소문하니 한 소녀가 말했다.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면서 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여 그 상공의 집을 찾아가 보니 놀랍게도 그 딸의 신장이 일곱 자 다섯 치나 되는 거인이었다.
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왕이 친히 수레를 보내어 그 딸을 궁중으로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뭇 신하들은 왕의 경사를 축하했다.
이 지증왕 때 박이종(朴伊宗)이 우릉도(于陵島)의 오랑캐들이 깊은 바닷물을 핑계 삼아 조공을 하지 않자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싣고 가 그들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不可尙書(불가상서)
不:아닐 불, 可:옳을 가. 尙:높을 상. 書:글 서.
어의: ‘아니오’ 라고 말하는 상서라는 뜻으로, 고려 선종 때 왕의 정치가 옳지 않을 경우 그 부당함을 직언했던
상서 위계정의 행실에서 유래했다. 사실대로 직언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
고려 제13대 선종(宣宗.1049~1094) 때의 상서(尙書) 위계정(魏繼廷.?~1107)은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잘못하면 ‘불가(不可)합니다.'라고 아뢰는 지조있는 선비였다.
선종이 총애하는 애첩 만춘(萬春)이 자기 집을 지나치게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왕의 총애를 받는 애첩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그 부당함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언을 했다.
“만춘이 폐하를 속이고 백성들을 고생시켜 사사로운 개인 집을 너무 거대하게 짓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것을 헐게 하소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인데도 거침없이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 계정에게 한번은 왕이 연등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서 춤을 추어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계정은 주저하지 않고 소신을 밝혔다.
“광대가 있는데 대신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사람 앞에서 춤을 춥니까? 아무리 전하의 명령이라 해도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듣고 있던 다른 동료 대신이 계정의 행동에 끼어들어 참견했다.
“폐하의 말씀에 ‘아니오’ 라고 말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닐 것이오. 그러니 전하의 말씀대로 춤을 추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러자 계정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일찍이 증자는 ‘전하의 말이라고 ’예‘’예‘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셨소.” 하고 끝내 춤을 추지 않았다.
위계정은 그 후 정직성과 청렴성이 인정되어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나이가 들어 사표를 냈으나 허락하지 않고 200일의 휴가를 줄 정도로 왕의 후한 대접도 받았다. 자연히 백성들에게도 신망이 두터웠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不屈必成(불굴필성)
不:아닐 불, 屈:굽힐 굴, 必:반드시 필, 成:이룰 성.
어의: 굽히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고려의 장수 박서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힘이 모자라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종래에는 성공한다는 뜻이다.
문헌: 고려사(高麗史), 이야기 한국사(韓國史)
고려의 제23대 고종(高宗.1192~1259) 12년,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일행이 고려에서 공물(貢物)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가던 중 압록강 함신진(咸新鎭.의주.義州)에서 여진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몽고에서는 이것이 고려인의 짓이라 여겨 국교를 단절하고 고종18년에 몽고의 태종(太宗.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이 장수 살리타(撒禮塔)로 하여금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살리타는 함신진을 포위하고 이렇게 위협했다.
“나는 몽고의 장수다.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짓밟아 버리겠다.”
그러자 겁을 먹은 부사 김한(金僩)은 방어 책임자 조숙창(趙叔昌)과 함께 항복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함신진을 장악한 몽고군은 철주(鐵州)로 길을 잡았다.
가는 중에 항복한 조숙창이 살리타에게 말했다.
“나는 원수(元帥) 조충(趙沖)의 아들이오. 우리 아버지는 일찍이 귀국의 원수 합진(哈眞)과 형제의 의를 약속한 바 있었소. 그러니 나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삭주 선덕진(宣德鎭)의 성주에게 찾아가 함께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하여 여러 성을 쉽게 점령한 몽고군은 가는 곳마다 조숙창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는 책임자에게 항복을 권유토록 사주했다.
철주성(鐵州城)에 이르렀을 때, 몽고군은 사로잡은 서창랑장(瑞昌郞將) 문대(文大)로 하여금 통역을 하게 했다.
“진짜 몽고 군사가 왔으니 속히 항복하라.”
그러나 문대는 몽고인들의 말을 반대로 통역했다.
“가짜 몽고 군사가 왔으니 성문을 굳게 닫고 항복하지 말라!”
그러자 몽고군은 문대를 죽이고 성을 공격했다.
성안에서는 양식이 다 떨어져 상황이 매우 위급했다. 그러자 판관(判官) 이희적(李希勣)은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적에게 욕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처리하리라 생각하고 창고로 들어가게 한 다음 불을 질렀다. 그리고 장병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이길 가망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써 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 해 9월, 무신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는 몽고군을 무찌르기 위해 대장군 채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아 군사를 모았다. 그 결과 귀주병마사 박서(朴犀), 삭주 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정주, 삭주, 위주, 태주의 수령들과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성으로 집결했다.
몽고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없이 공격했다.
고종 19년 정월, 박서(朴犀) 등은 몽고군이 누차(樓車)와 대포차(大砲車) 그리고 운제(雲梯) 등으로 공격해오자 한 달 동안이나 버티어 이들을 물리쳤다.
김경손 역시 결사대 12명과 함께 분전, 격퇴했는데 대군이 다시 몰려오자 귀주(龜州)로 가서 박서와 함께 싸웠다.
몽고군은 귀주를 도저히 공략할 수 없게 되자 개성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함락시키고 다시 귀주를 쳤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눈물을 머금고 항복했다. 그때 몽고군 장수가 말했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 수없이 싸웠지만 이렇게 공격을 당하고도 끝까지 버티는 장수는 보지 못했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은 후일 반드시 유명한 장수나 재상이 될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박서는 뒤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었으며, 김경손은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가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不立我碑(불립아비)
不:아닐 부, 立:설 립, 我:나 아, 碑:비석 비.
어의: 나의 비석을 세우지 말라. 조선의 대학자 이황이 자신의 묘지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한 데서 유래
했다. 공연히 불필요한 일에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진성(眞城) 사람으로, 조선 명종(明宗) 때 우찬성을 지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고,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의 태두가 되어 동방의 주자(朱子)라 불렸다. 율곡 이이(李珥)와 함께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시와 문장은 물론 글씨도 뛰어났다.
그는 한양 서성문(西城門)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정성 성(誠)을 기본으로 일생동안 공경할 경(敬)을 실천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핵심 사상으로 삼았으며, 이원론을 반대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에 대응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끌었다.
그의 생각을 전해주는 좋은 예화가 있다.
이웃집의 밤나무 가지가 자기 집 담을 넘어와 가을이면 앞마당에 알밤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아이들이 주워서 먹을 것을 염려하여 그 밤을 주워 담 너머로 훌훌 던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말했다.
“저절로 떨어진 알밤인데 그냥 주워 먹으면 되지 구태여 되돌려 던질 것이 뭐 있습니까?”
그러자 퇴계가 말했다.
“어허. 무슨 소리! 아무리 저절로 떨어진 밤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임자가 있지 않은가. 또 아이들이 밤에 맛을 들이면 나중에는 나무에까지 올라갈지도 모르잖는가.”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때 교육 사업에 뜻을 두었으며 나중에 도산서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현실세계와 학문의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죽는 날까지 학자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만년에 임종할 무렵이 되자 자기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 ‘진보(眞寶) 이씨(李氏) 퇴계의 묘’ 라고 표시나 해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미 알려진 사람의 이름을 어찌 어리석게 비석에 새기려 하는가? 사람들 입으로 전하는 말이 비석보다 좋은 것이다.(人之大名 豈刻愚石 路上行人 口勝於碑.인지대명 개각우석 로상행인 구승어비)’ 라는 이은보감(二恩寶鑑)의 말을 실천했던 것이다.
자손들이 조상의 비문에 과장하지 말고 사실대로 기록할 것을 깨우쳐주는 말이기도 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不事二君(불사이군)
不;아니 불, 事:섬길 사, 二:두 이, 君:임금 군.
어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로, 강한 지조와 굳은 충절을 뜻한다. 길재가 조선 태종의 입각 권유를 거
절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한국의 인간상(韓國의 人間像)
고려 말의 충신 길재(吉再.1353~1419)는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재부(再父)이며, 호는 야은(冶隱)으로,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냉산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보성의 원님으로 있었는데 생활이 어려워서 아내를 잠시 친정에 가 있게 했다. 때문에 먼 타향에 있던 길재는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이런 일화를 남겼다.
하루는 그가 시냇가에서 놀다가 자라를 잡자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해서 살려주며 말했다.
“자라야. 내가 너를 삶아 먹고자 했는데 너도 나와 같이 어머니를 잃은 것이 안타까워서 그냥 돌려보내주마.”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떨어져 후처를 맞아들여 어머니가 슬퍼하자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정중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비록 부당한 일을 하였더라도 아내된 사람이나 아들이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크게 감동했다.
그런 얼마 후 이방원(李芳遠. 후에 태종)이 그를 등용하려고 불렀으나 처음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원의 명령을 받은 그 고을의 원이 그에게 이방원을 만나도록 종용하자 마지못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방원은 자기 형인 정종(定宗)에게 청하여 그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게 했으나 길재는 거절하며 자기의 뜻을 글로 올렸다.
“저는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고, 문하주서(門下注書)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예로부터 아낙은 두 남편을 섬기면 아니 되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겨서는 안 된다(不事二君.불사이군)고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저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서 노모를 봉양하다가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정종은 그의 지조와 효성을 가상히 여겨 예를 다하여 대접하고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가게 했다.
훗날,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이 된 태종이 분부했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신이다. 그러니 그의 아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그에게는 충절의 정문(旌門)을 세워 주도록 하라.”
세종은 태종의 분부대로 그의 아들 길사순(吉師舜)에게 종묘부승(宗廟副丞)의 벼슬과 함께 정문을 세워주게 했다.
길재는 고향에서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교육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학통을 잇게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佛心築寺(불심축사)
佛:부처 불, 心:마음 심, 築:지을 축, 寺:절 사.
어의: 불심으로 사찰을 짓다.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불심이 있어야 절을 짓는다는 뜻.
어떤 일에 뜻이 있어야 그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삼국유사 신라사화(新羅史話)
경주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있는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22년(535년)에 창건되고, 경덕왕(景德王) 10년에 개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현재 목조건물은 조선 영조 때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석조건물인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은 불국사 개축 당시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세워졌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온다.
모량리(牟梁里)의 경조(慶祖)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는 크고 이마가 넓어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대성의 어머니는 가난하여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거나 더부살이를 하며 겨우 생활을 해 나갔다.
어느 날, 그의 집 앞을 지나던 고승(高僧) 점개(漸開) 스님이 그녀에게 시주(施主)를 하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집은 가난하여 부처님께 바칠 것이 없군요.”
대성의 어머니가 안타깝게 말하자 옆에 있던 대성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그동안 남의 집 더부살이로 장만해 두었던 그 밭이라도 시주하시죠.”
그러자 어머니도 크게 감동하여 이를 허락했다.
대성이는 그 전에 흥륜사(興輪寺) 육륜법회(六輪法會)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여승이 삼베(마포.麻布) 50여 필을 시주하는 것을 보고 신심이 생겨 자신도 땅을 시주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뒤에 대성이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대성이가 죽던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꿈에 모량리의 대성이를 부탁한다는 현몽을 받았다. 기이하게 생각한 그가 다음 날 모량리로 찾아가 확인해보니 대성이가 방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아기가 태어나자 김문량은 이름을 현몽했던 대로 대성(大城)이라고 지었다. 죽은 모량리의 대성이가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윤화환생을 믿었던 것이다.
김대성은 무럭무럭 자라 늠름한 청년이 되어 가면서 사냥을 즐겨했는데 하루는 토함산에서 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토함산 밑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죽은 곰이 나타나 말했다.
“너는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죽였으니 원수를 갚겠다.”
김대성은 크게 놀라 곰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곰이 말했다.
“그럼, 나를 위해 절을 세워주면 용서하겠다.”
“좋소. 꼭 절을 지어 주겠소.”
김대성은 곰과 약속한 대로 장수사(長壽寺)를 세우고 곰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 뒤 김대성은 벼슬길에 올라 중시(中侍)가 되었다가 52세에 물러나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을 짓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님을 위해 짓고, 석굴암은 전생(모량리에 살았을 때)의 부모님을 위해서 만들었다.
불국사는 원래 2천 칸이 넘는 큰 절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대부분 없어졌고, 현재의 불국사는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불국사 앞쪽에는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의 돌층계가 있고, 그 옆에는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가 있었으며, 대웅전 앞뜰에는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마주 서 있는데, 이들 모두가 신라예술의 걸작품들이다.
이 두 탑은 아주 대조적이다. 즉 석가탑이 우아하고 소박하여 남성적이라면, 다보탑은 화려하고 섬세하여 여성적이다.
석굴암은 중국의 원강석굴, 일본의 호류사 사원과 더불어 동양 3대 예술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佛眼豚目(불안돈목)
佛:부처 불, 眼:눈 안, 豚:돼지 돈, 目:눈 목.
어의: 부처님의 눈과 돼지의 눈이라는 말로, 세상 만물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다 부처님같이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다 돼지같이 보인다. 즉 사물은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
문헌: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무학(無學) 대사(1327~1405)의 이름은 자초(自超)이고, 성은 박(朴)씨이며, 문하시랑 인일(仁一)의 아들로, 무학은 호이다. 합천군 삼기(三岐) 출신으로 18세 때 소지선사(小止禪師)에 의해 중이 되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으며,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에서 수도(修道)했다. 그 후 원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지공선사(指空禪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후 1356년에 귀국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한양을 수도로 정하라고 추천했다.
그는 조선 창업에 많은 기여를 한 까닭에 태조가 스승으로 대접하고 친구처럼 사귀었으며,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아끼었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시국이 안정되어 모처럼 만조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무학대사도 태조 곁에서 즐거이 동참하고 있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자 이성계는 좌중을 더욱 흥겹게 하려고 무학을 향해서 농을 걸었다.
“대사, 오늘은 우리 파탈(擺脫)하고 피차 흉허물 없이 놀아 봅시다.”
무학은 손을 합장(合掌)하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올 뿐입니다.”
태조는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오늘 대사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꼭 돼지같이 생겼소이다 그려.”
이 말을 들은 좌중은 일시에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무학은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고 나서 한마디 했다.
“소승이 뵈옵기에 대왕께서는 꼭 부처님을 닮으셨습니다.”
그러자 태조는 심드렁해서 말했다.
“아니, 나는 대사를 돼지에 비유했는데 대사는 나를 부처님이라 하시오? 오늘은 군신의 예를 떠나자 하지 않았소?”
무학은 너털웃음을 한참 웃고 나서 다음 말을 이었다.
“그건 대왕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무릇 세상 만물이 부처님 눈(佛眼.불안)으로 보면 다 부처님같이 보이고 돼지의 눈(豚目.돈묵)으로 보면 다 돼지같이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아연 긴장하여 태조의 눈치만 살폇다. 그러나 태조는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내가 졌소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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