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돋보기
주름진 하늘을
햇살로 펴놓은 가을이 오면
바람이 피워놓은 이야기들을 들으려
뭉게구름들이 떼 지어 펼쳐진 길을 따라
엄마는 병원에 왔는데요
“점점 볼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 겁니다...”
기대하는 일마저 지쳐버린 엄마는
장터에 들러 때늦은 찬거리를 두 손 가득 들고서
달빛 아래 어둠을 뜛고다니는 벌레들을
친구삼아 까만 가을밤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궁이 불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미자의 이마에 함께 쐬고 싶은 가을바람을 담아와
닦아내어 주는데요
“ 우리 미자 고생이 많네..
엄마가 퍼떡 저녁밥 차려주꾸마“
“엄마도 같이 묵자“
“내는 나가서 부엌에서 먹을 테니
니나 먼저 무라“
매일 똑같은 말을 밥상 위에 뱉어놓고
바람같이 나가버리는 엄마가 담겨있는
부엌 아궁이 불 앞에는 감자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모습만 한가득 그려놓고
있었기에 미자는 차마 숟가락을 들지 못합니다
“와이리 이 아까운 밥을 남갔노”
“엄마 무라...
난 학교에서 철수가 빵을 줘서 배가 부르다“
내 마음 뒷간에 앉아서
눈물 밥을 먹고 있는 엄마
미자는 이 아픔을 잊고 한 발 더 나아가길
바라보지만 한숨이 지워진 날들은 좀처럼
찾아오질 않는 것 같습니다
“시 꼬부라진 김치 삐 안 넣어주노?
내도 달걀후라이나 소시지 얼마나 좋아하는데“
엄마 나이
사십하고도 다섯에 낳은 딸 미자는
할머니 같은 엄마가 학교에 오는 걸 부끄러워도
했지만 가난에 찌든 도시락 반찬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엄마에게 화풀이해댄 게 미안해서였는지
십 년도 더 된 버려진 신문을 주워와
돋보기 너머로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가는 재미에
빠져 사는 엄마에게 선생이 되어주고 있었는데요
“이거는 무신 글자고..
요상하게 생겨가지고 암만 봐도 모르겠다“
“하늘……. 이다”
“우리 미자는 모르는기없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다정한 미자의 한마디 답변에 희망 꽃을 피워가며
신문을 읽어내려가다
엄마를 도와준다며
온종일 고추밭에서 일한게 힘들었는지
지쳐서 잠들어버린 미자의 얼굴을
쓰다듬던 엄마도 잠이 들고 있었습니다
“뿌지직.....”
“아야.!.“
새벽녘에 비친 달빛을 따라
대문 옆에 있는 뒷간에 가려던 미자의 발에
엄마의 돋보기가 깨어지고 말았는데요
“발 좀 보제이
어디다 친 덴 없나?“
“엄마 우야노...
돋보기 없으면 신문도 못볼낀데...“
"게 안타... 내 싸 여태껏 까막눈으로 살았어도
우리 미자랑 행복하게 잘 살아 왔다아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딸을 향해 쓰는 엄마를 보며
미자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게
한글을 가리키는 거 였기에
“엄마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돋보기는
내가 꼭 받을끼니까네“
“미자야...
고무신이 커서 헐적헐적하니까네
이 고물 줄로 꽉무까뿌라“
약속한 만큼 ...
꿈꾸는 만큼....
밤마다 엄마와 미자는
먼저 가려는 가을을 붙들어 놓고
함께 동네를 뛰며 내일모레 열릴 운동회를 위해
달님을 친구삼아 뜀박질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가을 운동회날
경품이 놓여있는 앞을 서성거리던 미자는 돋보기를
한 번 더 눈에 넣고는 출발선 앞에 섰는데요
탕....
“우당탕.....
고무신을 묶은 고무줄이 끊어진 것도 모르고
달리다 넘어져 버린 미자가 울고 있는걸
저 멀리서 바라보던 엄마가 뛰어와
치맛자락으로까진 무릎을 감싸고 있었고
“엄마...
우야노 돋보기 못 타서“
“게 안타..
니가 내 돋보기 아이가“
목멘 기다림의 시간은 가고
메케한 들숨 속에 바람이 수놓은 구름무늬 사이로
읍내에 있는 중국집에 온 미자에게
인생은 그리 공평한 놈이 아니라며
엄마는 위로를 건네고 있었고
신기한 듯 벽에 붙은
커다란 티브이만 쳐다보고 있는 엄마를 보며
단무지에 식초를 뿌린다는 것이
뚜껑이 벌어지는 바람에
엄마의 짜장면에 붇고 말았는데요
“엄마…. 우야면 좋노?”
“게 안타 퍼떡 무라”
중국집을 나온 엄마와 미자의 머리에
보석 같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팔짱을 낀 채 걸어가던 미자는
“엄마 억수로 세그러벗제?”
“아이다..
우리 딸내미 덕분에 이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새콤한 짜장면을 먹어봤데이“
때론 순응하며..
때론
극복하며 마주한 고단했던 하루를
지나가는
저 빨간 노을 사이에 걸어두고서
미자는 약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돋보기보다 더 큰 내 눈이
언제나 엄마와 함께할 거라고...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첫댓글 어린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코끝 시큰해져 갑니다
고운 댓글 감사합니다 ~~
엄마...엄마.. 부를 때마다 생각 할 때마다 저 깊은 곳에서 움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