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열전(史記 列傳), 평원군우경열전 중 모수자천, 낭중지추

*得十九人, 餘無可取者, 無以滿二十人, 門下有毛遂者, 前, 自贊於平原君,,,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左右未有所稱誦,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 先生不能, 先生留”, 毛遂曰, “臣乃今日請處囊中耳, 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平原君已定從而歸, 歸之於趙, 曰, “勝不敢復相士, 勝相士多者千人, 寡者百數, 自以爲不失天下之士, 今乃於毛先生而失之也, 毛先生一至楚, 而使趙重於九鼎大呂, 毛先生以三寸之舌, 彊於百萬之師, 勝不敢復相士”, 遂以爲上客(득십구인, 여무가취자, 무이만이십인, 문하유모수자, 전, 자찬어평원군,,,평원군왈, “부현사지처세야, 비약추지처낭중, 기말입현, 금선생처승지문하삼년어차의, 좌우미유소칭송, 승미유소문, 시선생무소유야, 선생불능, 선생유”, 모수왈, “신내금일청처낭중이, 사수조득처낭중, 내영탈이출,,,평원군이정종이귀, 귀지어조, 왈, “승불감부상사, 승상사다자천인, 과자백수, 자이위불실천하지사, 금내어모선생이실지야, 모선생일지초, 이사조중어구정대려, 모선생이삼촌지설, 강어백만지사, 승불감부상사”, 수이위상객).
열아홉 명의 선비를 얻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 미처 스무 명을 채우지 못했다. 당시 문하에 모수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평원군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를 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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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군이 말했다. “무릇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낭중지추, 囊中之錐)처럼 곧바로 그 끝이 드러나 보이게 마련이오. 지금 선생은 나의 문하에 있은 지 오늘로 3년이 되었지만 내 주변 사람이 선생을 칭찬한 적도 없고, 나 또한 들은 적도 없소. 이는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기 때문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그냥 남아 있으시오”.모수가 반박했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군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했으면 그 끝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오는 영탈(穎脫)의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평원군이 마침내 모수를 데리고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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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군이 합종을 결정짓고 귀국한 뒤 이 같이 말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선비의 관상을 보는 상사(相士)를 언급치 않을 것이오”. 내가 상사한 숫자는 많으면 1,000명, 적어도 수백명은 될 것이오. 천하의 선비를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한 이유요. 그러나 지금 나는 하마터면 모 선생을 잃을 뻔했소.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로 가 조나라를 하나라 우왕 때 만든 구정이나 주나라 종묘의 큰 종인 대려(大呂)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소.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100만 대군보다 강했소. 이후 나는 감히 상사를 언급치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다.
*위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史記 列傳)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조승열전(평원군의 이름이 조승) 중 일부를 옮겨 본 것입니다.

*사기 열전(史記 列傳)은 사기 중 압권으로 불리며 내용과 문체가 만연체로 모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사마천이 해당인물의 특징적인 면모만 선별적으로 기록해 놓은 덕분이라고 하며, 사기 총 130편 가운데 절반이 넘는 70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열전에는 백이와 숙제를 시작으로 한문제때까지 활약한 귀족. 관료. 장군. 책사. 자객. 토호. 은자. 미희 등 온갖 유형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기준은 선(善)과 의(義)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고 이치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원망의 취지를 담고 있고, 그리하여 열전은 이상과 현실의 괴뢰를 따지는 데서 출발한다고 하고, 모택동은 중국에는 두 편의 대작이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은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과 그의 친구 우경에 관한 전기로, 조승은 조혜문왕과 조효성왕 때 재상을 지냈으며, 세 번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세 번 복직되었습니다.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왕은 초나라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평원군을 사자로 보내는데, 평원군은 출발 전 지용을 겸비한 열아홉 명을 선발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고, 이 때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였고, 초나라로 간 평원군은 선발한 19명의 식객으로부터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였으나 오로지 모수의 기지 덕분에 마침내 원군 약속을 얻어내어 합종책에 성공하였고, 이후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으며, 여기서 모수자천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모수자천(毛遂自薦)은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했다는 뜻(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는 것)으로, 부끄러움 없이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을 빗대어 가리키는 말이라 하고,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위 내용 중에서 평원군의 대사 마지막 부분은 사람의 능력은 결코 관상이나 외모 또는 기존의 평판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마천(司馬遷, 자는 子長, 기원전 145년~86년, 한경제의 치세인 기원전 145년 전후에 사관으로 재직한 사마담의 아들)의 필생의 역작 사기(史記)(太史公記, 또는 太史公書로 불리기도 함)는 오제부터 한무제까지 제왕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 역대 제왕과 제후의 연표를 기록한 표(表), 고대 중국의 역법, 치수, 경제를 기록한 서(書), 역대 제후와 공신들의 연대기인 세가(世家), 정치가, 학자, 군인, 자객, 해학가 등 각종 인물의 흥망사를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사마천은 한무제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후 49세 때 황제를 무고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부친의 유한과 사마천 개인의 통한을 승화시킨 작품인 사기를 작성하기 위해 당시 죽음만도 못한 것으로 여긴 굴욕적인 궁형(宮刑, 거세형)을 자청해 죽음을 면한 후 세기의 역작 사기를 저술하여 후대에 역사를 거울로 삼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를 깨닫는 사감(史鑑)의 전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기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대의멸친(大義滅親)으로, 치국평천하의 대의를 위해 친인척으로 상징되는 소의(小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마천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극도로 싫어하는 호리오해(好利惡害)를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했고, 사기 중 열전은 사기 총 130편 중 70편에 달하는 것으로 사기의 꽃에 해당한다고 하고(열전을 읽지 않으면 사기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열전만 따로 번역한 책이 많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