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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8일 화요일 [(녹)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여러분의 앞날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1,10-16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10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11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12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제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하지요.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박해가 따르겠지만, 그와 달리 형제자매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실현되었지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처참한 박해와 함께 집과 가족마저 잃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지요. 새로운 삶도 얻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주어지는 시련과 희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에 못지않게 새롭게 얻는 것도, 축복도 많았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름으로써 잃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그와 다른 차원의 보상을, 이 현세 생활에서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의 판단 기준과 우리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선입관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바로 보는 식별력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든 사건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릴 수 있으리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에 맞춰 시복되신 124위 순교 복자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중국 소주(蘇州)출신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1752~1801)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조선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인물인데,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해외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당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께서는 당시 북경 교구 내에서 외모가 조선인과 흡사한 사제를 찾았는데, 바로 주문모 신부님이 당첨되셨답니다.
아직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정조 즉위 18년, 1794년 조선 초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집회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제 우리도 외국인 신부를 모셔 와서 포교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신자들이 크게 동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황이라는 사람을 북경으로 파견하였는데, 북경 천주당(天主堂)에 머물고 계시던 주문모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황은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는데, 유심히 사연을 전해들은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42세 때인 1794년 북경을 떠나 의주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조선인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안내로 마부로 변복을 한 후, 약 일년여 만에 드디어 조선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목적 열정과 탁월한 다재다능함, 놀라운 덕행으로 조선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신부님에 대해 큰 존경을 표하며 한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셨습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사목에 헌신하셨습니다. 밤에는 전국을 떠돌아다니시며 성사(聖事)를 집전하셨습니다. 낮에는 조용히 번역이나 집필 작업에 전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틈만나면 단식과 고행을 거듭하셨습니다.
조선 교회에 끼친 주문모 신부님의 영향력은 수치상으로만 봐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사목활동을 시작하신 1795년 부터 순교하신 1801년까지, 6년여 동안, 수차례에 걸쳐 삼천리 방방곡곡을 순회하셨습니다. 신부님 입국 당시 4천명이던 신자수가 6년여 만에 두배 이상인 만여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거듭되는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오늘날로 치면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혹은 ‘가톨릭 교리 연구회’ 격인 ‘명도회’를 창립하여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이끌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초대 남성 회장으로는 정약종을, 여회장에는 강완숙을 임명하여 교우들 신앙의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지 않았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습니다. 정조에 대해 사무칠 정도의 원한을 품고 있던 정순왕후가 순조에 대한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인사들이 하나 하나 제거되었습니다. 결국 순조 1년(1801) 정순왕후는 하교를 내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며, 동시에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
자연스레 주문모 신부님의 목숨도 경각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조선 교회 뿐만 아니라 조선과 조선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주문모 신부님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고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우여곡절끝에 드디어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압록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이요,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고향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님은 국경을 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내가 목자로서 어찌 사랑하는 조선의 양떼를 버리고 강을 건널 수 있으랴?” 라고 외치며,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한양으로 되돌립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 발로 관아로 나아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그리도 애타게 찾아헤매던 그 주문모 신부요!”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까봐 스스로 순교, 다시 말해서 십자가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의금부 이송된 주문모 신부님은 4월 19일, 50세의 일기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군문효수형이란 조선시대 사형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죄인에게 내렸던 중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사형수를 백성들 앞에 세운 후, 죄명과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양쪽 귀에 화살촉을 꿰었습니다. 그리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긴 다음 목을 베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어진 목은 다른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는 그런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순교 직전 이런 말씀을 남기셨답니다.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합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애정과 사랑의 차이>
노이나와 낟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아본 신랑 낟의 어머니.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되어가니?”
“준비는 다 되었고, 마지막 점검 중이에요.”
낟의 어머니는 며느리 노이나와 단 둘이 설거지를 한다.
“너 그거 아니? 낟이 어렸을 때 정말 말을 안 들었어. 세월 참 빠르지... ”
“요즘도 말을 안 들어요.”
낟의 어머니는 배불러서 괜찮다는 낟에게 떠날 때 또 비닐봉지에 과일과 음료수를 넣어준다. 노이나가 대신 받아준다.
운전하고 있는 낟을 보며 “자기 어렸을 때 ‘노이나’ 먹다가 씨가 목에 걸린 적이 있었다며?”
“누가 그래?”
그러자 노이나는 신랑의 어머니가 준 노트를 보여준다. 운전은 노이나가 하고 낟은 어머니의 노트를 조용히 읽는다.
“1987년 3월 19일,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 몸무게 평균 이하(괜찮아, 내가 있잖아.) 애가 도대체 먹지를 않는다. 어떡하지? 1993년 9월 4일,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우유 한 컵을 다 마셨다. 1994년 3월 19일, 낟이 초콜릿을 좋아해서 초콜릿으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1988년 11월 22일, 아들이 캠핑을 간다. 밤에 배가 고플까 걱정이 된다. 2000년 8월 6일, 아들이 농구 시합에서 이겼다. 대견해. 역시 내 아들이야! 우리 아들은 수박, 오렌지, 망고, 바나나를 좋아하지만 ‘노이나’를 싫어한다(씨가 목에 걸린 적이 있었다). 롱빈이 들어가지 않은 치킨바질을 좋아한다. 내 아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생선 머리를 좋아한다.”
‘엄마는 꼬리가 좋다고 하셨는데...’
아들은 어머니가 준 비닐봉투를 다시 보며 눈물을 흘린다.
노이나는 낟의 어머니가 이 노트를 주고 자신을 안아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노이나, 내 아들 잘 부탁해.”
마지막 장에 어머니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고 이렇게 쓰여 있다.
“너를 보살피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단다.”
[출처: ‘큰 보살핌은 작은 한 입에서’, 태국광고, 유튜브]
예전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왜 떠나가야 해,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아들을 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아들을 빼앗아간 것처럼 며느리를 구박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낼 수 있어야합니다. 보낼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애정과 사랑은 반대말에 가깝습니다. 애정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로 나를 채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위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언제든 보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금대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금대접으로 여깁니다. 금대접은 식탁을 장식할 수 있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그릇에 음식을 담느라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금대접이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은 금대접이 옆에 있다가 사라지더라도 다른 곳에서 더 빛나겠거니 생각하며 한 편으론 기뻐합니다. 자신은 여전히 금대접이고 떠난 금대접은 또한 다른 곳에서 금대접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질그릇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담기는 음식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에게 담겨있는 것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합니다. 이것이 애정입니다. 애정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감정입니다.
사랑도 아닌 애정 때문에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애정을 끊어야만 합니다. 만약 순교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인이 걱정되고 아이들이 걱정되고 어머니가 마음아파 하니 안 되겠다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상태로는 아직도 내 행복이 애정에 의해 좌지우지되기에 주님이 가신 길을 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애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애정은 묶이는 것이고 사랑은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버리지 않고는 받을 수 없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묶이지 않은 독립된 한 사람과 또한 독립된 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애정을 사용하지 않기에 애정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옥으로 간다고 떠나면 어쩔 수 없어하십니다. 그렇다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초대하십니다.
낟이 자신을 며느리에게 맡겨버리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을까요? 자신을 독립시켜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더 감사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지금 놓아줄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이란 명목으로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애정을 강요하지 않을뿐더러 애정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때 발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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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시지니오와 성 마르띠리오,성 알렉산델 순교자
San Sisinnio, San Martirio, Sant’ Alessandro Protomartire trentino
St. sisinius, St. martyrius, St.alexander. 397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밀라노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까파도치아 태생들인 시지니오 그리고 마르띠리오와 알렉산델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알렉산델은 ’인간의 옹호자’란 뜻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들을 트렌트의 주교, 성 비질리오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지니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띠리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니지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띠리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델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복자 윤지충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지난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124위 순교 복자들의 기념일이다.
이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부들 가운데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7년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그 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29일은 한국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지만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8일이지만, 이 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29일로 정한 것이다.(매일미사 2015년 5월29일 전문)
복음: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즉 죽는 것과 같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땅속에서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혼자이셨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 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열매인 부활로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고 옳지 못한 사랑은 피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을 거절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고 하셨다.
우리 순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나 자신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으며,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욕심을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였던 분들이다. 박해의 시간을 살면서 한 순간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신앙으로 순교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자선을 할 때에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태 6,3 참조) 이러한 섬김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며, 마땅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체험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26절) 순교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며 그분만을 올바로 섬겼던 분들이었다. 우리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