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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묵상글 ( 연중 제3주간 월요일. - 때가 되면 거짓은 드러납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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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가 되면 거짓은 드러납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릇된 열심은 많은 상처를 만듭니다. 혼자만 잘난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이 돌고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아우구스티노). 얼마나 속이 깊고 마음이 넓은지,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지 상대를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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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적 식별을 한다면
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존재로 계속 의심받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잡으러 왔고,
이어서 어머니와 형제들도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며,
오늘은 드디어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까지 와서는 악령 들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고 특히
오늘 복음에서처럼 교회 기득권층에게는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보면서 율법 학자만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영적 식별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는 어떤 영이 있는지,
나는 어떤 영에 이끌리고 있는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어떤 영에 이끌려 하는 것인지 등.
북한 일이든 해외선교든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을 했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사실 그 일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은 이 일이 과연 하느님 일인지,
하느님께서 시작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일인지 식별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식별의 경험들을 통해 이제는 제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이 일을 하는지 아니면 성취욕 때문에 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는지 나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인지
-나의 비판이 시기 질투에서 비롯됐는지 정의에서 비롯됐는지
-나의 중재가 일치를 지향하고 일치를 낳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식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소분류 하지 않고 대분류적으로 식별한다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사랑이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아닌 것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화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렇게 질문하게 되겠지요?
‘성령이 아닌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육의 영’이거나 ‘더러운 영’이거나 ‘악령’일 것입니다.
늘 자기를 향하게 하는 ‘육의 영’이요,
늘 세상을 향하게 하는 ‘더러운 영’이며,
늘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선들을 파괴하려는 ‘악령’입니다.
이런 영들이 성령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지금까지와 다른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늘 무엇을 하며 그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지 아닌지 그 점에 대해서 식별했는데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가?
게으름의 영,
무기력의 영,
무관심의 영,
이런 영도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
그래서 무사안일하려는 영에 이끌리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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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주님!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여,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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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강론의 서두에 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안녕’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로 ‘How are you, Good morning!’과 같은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하는 인사로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문안의 인사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가 강론 때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처음 보는 분들에게 하는 인사도 아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늘 성당에 잘 오셨다는 ‘환영’의 인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편안하게 오늘 성서 말씀에 대한 강론을 시작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이별’입니다. 영어로는 ‘Good bye, See you later!’와 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지지만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말입니다. 저도 친근한 사람들에게 ‘안녕 다음에 또 봐요.’라고 인사하곤 합니다.
2023년 새로운 한해를 같이 시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뉴욕 동북부에서 함께 지내던 백운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도 12월 3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 2023년을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안녕,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나도 천국성인도 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퍼 마시고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요.”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을 모독하는 삶을 산다면 권력을 지녔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병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안녕할 수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 위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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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프랑스어로 헐렁한 옷이라는 뜻의 블루즈(Blouse)가 변형된 옷인 블라우스는 청순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이 블라우스를 남자인 제가 입는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옷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니스커트는 어떨까요? 이는 블라우스보다도 더 보기 싫은 모습이겠지요. 이제 아름답고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는 어떨까요? 분명히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제가 입는다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 할지라도 옷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의 가치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합당한 자세를 갖춰야만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들고서는 오히려 주님 사랑이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모습에 따라 세상에서 환하게 또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나의 많은 죄로 인해 주님 사랑을 끔직해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내가 받을 사랑만을 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늘 변함없이 내 곁에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내가 그 사랑을 거룩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을 전해줘서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를 표현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만 키우고 있었지요. 그들 자체가 변하지 못하니, 주님 사랑이 그들 안에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루카 3,28.29)
주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끔찍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상에 아름답고 멋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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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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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사랑의 전사
-성령의 사람-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하느님의 전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의 신원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를 더 분명히 하면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진리의 전사, 기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전사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먼저 세상 한 복판에서 성인처럼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성령의 사람 세분에 관한 감동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1."존경하는 이수철 신부님,
안녕하세요. 가톨릭신문 박지순 시몬 기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찾았던 ‘둥근마음, 둥근 삶’을 얼마 전에 한권을 구했습니다. 분도출판사에서 모르고 있었던 재고가 분도출판사에 있어서 바로 주문해서 소장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어제 새벽미사에서 하신 불광불급(不狂不及)을 듣고 저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제대로 미쳐서 성인이 되겠습니다.”
즉시 ‘여섯 자녀를 정성과 사랑을 다해 키우고 있는 형제님은 지금도 성인이다’ 화답하며 격려했습니다. 어느 수녀님이 소개한 치과의사에 대한 소개입니다. 말그대로 숨겨진 미담인데 수녀님의 자전적 일기를 보며 발견한 것입니다. 이 치과의사 하치양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제가 25년 동안 제 치아를 전담하고 있는 분인데 섬세하고 친절하고 한결같기가 성인같은 분입니다.
2."제 담당이 아니었던 봉사오셨던 치과 선생님이 저의 사진을 보고는 저에게 다가와 귀속말로 ‘수녀님, 제가 하는 개인병원에 오세요. 제가 임플란트 해드릴께요. 이곳에서는 임플란트까지는 못해 주거든요.’ 예수님! 저는 선생님의 이 말을 듣고 정말 감동했어요. 한 5년전부터 선생님 개인치과병원에 다니는데 어금니 2개씩이나 임플란트 해주었어요.
세상에 이런 치과가 어디 있겠어요. 선생님은 조용하고 꼭 수도승같아요. 아무튼 저에게 치료비 한푼 안받아요. 또 들은 이야기지만 여기 말고 수원 어디에 있는 에이즈 환자들에게도 봉사하러 나가신다고 했어요. 하느님 아빠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할 분인 것 같아요.”
무려 치과의사 선생님에 대한 미담이 대학노트 4쪽에 걸쳐 감동깊은 내용이 전개되어 있기에 즉시 복사하여 카톡으로 그 치과의사에게 전송했습니다. 그 수녀님이 교정사목에 함께 할 때 만났던 사형수들에 관한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3."아! 이들이 과연 사람을 살해한 일이 정말인가? 저 환하게 웃으면서 저 아름다운 미소가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갈 때마다 이 질문이 저에게 던져졌어요. 사막의 은수자도 그렇게 아름답게 미소를 짓지 못할거예요. 프란치스코, 토마스 형제예요. 이들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해요.
제가 질문을 가끔해요. 방의 크기는 어느 정도예요? 방 가운데 서서 두팔을 벌리면 양쪽 벽이 손가락에 딱 닿아요. 변기도 그 안에 있고요. 어째서 변기가 고장나면 그 악취가 대단해요. 벽꼭대기에 작은 창문이 하나있고 작은 선풍기 1개, 작은 TV 한 대 있고, 24시간중 낮에 1시간만 운동하러 나오고 그외 시간은 독방에 있어요.
이들이 하루 1시간 그 짧은 운동시간에 운동장 땅을 파서 채소 씨를 심어요. 그리고 짬방등 거름을 주고 길러서 이웃 재소자들에게 주고 자기들도 먹고, 우리가 미사갈 때 그 농사지은 것을 우리에게도 줄려고 갖고 나와요.”
이 치과의사 선생님이나 수녀님이나 성인같은 사형수들, 제가 볼 때 참 치열하게 제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사는, 참으로 하느님만이 아시는 주님의 전사들이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전사로 살아가는 어느 50대 초반 자매님이 보내준 메시지도 감동입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 주제가 넘 멋집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오늘 내일 숯가마에 알바를 하러 갑니다.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다만 하느님께 대한 첫마음 잃지 않도록 감사 겸손 깨어살기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가열加熱차게 알바하고 오겠습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저희 수도승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고 부단한 도전이 되는, 또 깨어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세상 곳곳에서 주님의 전사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성인聖人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예외없이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전사의 원조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사이들과의 영적전투가 참 치열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들면서 보기 좋게 이들을 제압합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영리한 사탄은 절대 일치하지 자기들끼리 분열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선의 연대 못지 않은 악의 연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분열하기 잘하는 사람은 사탄만도 못합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좋다 하는 마귀들을 제압할 수 있는, 참으로 성령의 힘으로 무장된 힘센 분은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떨어지게 된다.”
너무나 누구에게나 명명백백한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활동을 악령의 활동이라 왜곡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을 부인함으로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고집스런 편견으로 이렇게 안에서 닫아 걸고 있으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을 주시는 분이 새계약의 중개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이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효과는 영속적입니다. 늘 새계약의 중개자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대사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성령충만한 당신 사랑의 전사로 백절불굴(百折不屈),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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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들이 주님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많은 기적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주님을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우리는 지금까지의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질투를 목격하거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랑을 실천했을 때, 또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을 때 질투의 시선과 말들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 질투로 받는 상처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고, 우리는 움츠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질투는 군중이 되어 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일명 ‘왕따’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는 쪽도 받는 쪽도 모두 내적 파멸로 인도됩니다. 하는 쪽은 공격성과 두려움으로, 받는 쪽은 경계와 우울함의 내적 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바래봅니다.
초콜릿 한 개, 마음 하나
얼마 전 봉안당 안치 예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예식이 끝나고 유가족 중 한 분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드릴 것은 없고, 이거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초콜릿 하나를 손 위에 올려 주셨습니다.
저는 순간 그 초콜릿의 의미를 머리고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곳에서 사시게 된 저의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였습니다.
가끔은 짧고 깊은 말 한마디가, 작은 것 하나가 큰 의미를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말입니다.
짧은 말 ‘사랑해요’
작은 것 ‘초콜릿 하나’
오늘은 작은 것으로 큰 의미를 전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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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
2023. 01. 23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르코 3,22-30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선>
선은
악과 다투려
스스로를 악의
곁에 두지 않으며
오롯이
스스로를 늘
고이 지님으로써
그렇게 악을 사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은 선이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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