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북도 대청댐과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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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2:45조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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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댐과 문의
백제 때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던 문의는 남쪽으로 금강에 접한다. 신라 때 연산군(演算郡)으로 개칭되었던 문의는 조선 말기까지 군이었다가 1914년에 청원군에 딸린 면이 되었다. 문의에 위치한 대청댐에는 제5공화국 시절부터 역대 대통령들이 휴가를 보내면서 국정 계획을 세우던 청남대(靑南臺)가 있는데, 2003년 4월 22일부터 일반에도 개방되고 있다.
청남대 © 유철상
5공화국 시절에 대통령의 휴가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든 별당이다. 청원군 대청댐 부근에 있으며, 청남대는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시인 신동문의 집에 문상하기 위해 문의에 왔던 시인 고은은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문의마을에 가서」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에는 천여 년 전인 고려 초기에 일륜대사가 제자들에게 남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방의 정기는 영명하기 이를 데 없다. 장차 이곳에 문(文)과 의(義)가 크게 일어나 숭상될 것이다. 뭍으로 난 길과 물길이 사통팔달했으니 마을과 인물이 모두 번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어인 조화인가. 앞으로 천년 뒤의 운세가 물밑에 잠겨 있으니 말이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니라.
문의마을 © 유철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은 조선시대에는 문의군이었는데 대청댐을 지은 이후로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어 현재는 마을을 옮겨지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곳의 지명을 문의라고 지었고, 정말 예언에 걸맞게 호수가 만들어졌다. 1975년 3월 강렬한 폭음과 함께 5년 9개월간 대청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대청댐은 당시 충남 대덕군과 충청북도 청원군 사이를 흐르는 물을 막아 만든 둑이라 하여 두 지역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청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고 전력을 생산하며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다목적 댐이다.
댐 건설로 충남과 충북 지방의 논밭 1,500만 평이 물에 잠겼고, 여기서 살던 4,275가구의 2만 5,925명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대청댐이 완공되자 금강 상류인 공주나 부여 부근의 하천 물높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류인 장항이나 군산의 하천 물높이까지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큰비가 와도 수해는 없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홍수로 농경지가 물에 잠기곤 하였다.
대청댐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 댐으로 1975년부터 6년여에 걸쳐 지었다. 대청댐 건설로 조성된 대청호는 주변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대청댐으로 인해 수몰되면서 옮겨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서 가까운 미원면에 구녀성이 있는데, 이곳에 구녀성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곳 산 밑에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둔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과 딸들이 목숨을 건 내기를 걸었다. 아홉 딸들이 성을 쌓는 동안에 아들은 굽 높은 쇠 신발을 신고 송아지를 끌고서 서울까지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딸들이 성을 다 쌓아 가는데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며 기다리던 어머니는 고깃국을 쑤어 먹이며 시간을 끌었다. 그때 마침 아들이 돌아왔고, 내기에 진 딸들은 모두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안 아들이 떳떳이 이기지 못했다고 한 뒤 죽어버리자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딸이 죽은 뒤 닭이 되어서 때를 찾아 우는데, 그 소리가 ‘꼬끼오 골’ 하는 것은 그 고깃국 때문에 원통하게 죽은 뜻이라고 한다.
구녀성 말고도 이름 높은 산성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낭비성(娘譬城)이다. 백제 때 쌓았다는 이 성에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 진을 치고서 미원면 종암리의 구녀성에 있는 태봉국의 궁예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고 한다. 병마산(兵馬山)은 오송읍 정중리와 상봉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토성과 장대가 있다. 고려 충렬왕 17년에 한희유(韓希愈)와 김흔(金忻) 등이 원나라 장수 설자간 등과 함께 이 산에 웅거하고 있다가 침입해온 합단(哈丹)군사를 이 산 아래에서 맞아 쳐서 크게 이긴 후 공주의 곰나루까지 추격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 리에 걸쳐 널려 있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또한 청원군 강서면 비하리와 용정리에 걸쳐 있는 부모성(父母城)은 산의 정상에 큰 못과 함께 석성이 있는데,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이 지역 사람들이 숨어 지낸 성이다. 그런데 늘 안개가 끼어 있어서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온전히 난을 피했으므로 부모와 같은 산이라 해서 부모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청댐과 문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