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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작품세계 Ⅰ
[1855~1869]-Edgar Degas
(Edgar Degas : French, Impressionist, 1834~1917)
인상파의 고립자
Self-Portrait 1855
드가는 인상파 그룹에 참여했지만 대상의 정확한 묘사보다 물체를 둘러싼 광선의 흐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앵그르식의 사실주의에 입각해 야외 풍경보다는 인간 동작의 한 순간을 스냅 사진처럼 탁월하게 잡아내었다. 이렇게 정확함을 추구하는 그의 예술적 감각은 파스텔화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정을 구사한다. 그는 대상을 중시하며 정확한 소묘 능력으로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도시적 삶을 묘사하고 우아하게 그것들을 표현했다.
Self-Portrait
에드가 드가 (Edgar Degas)는 프랑스 인상주의에 포함되는 화가이다. 하지만, 다른 인상파와는 구분되는 드가만의 확연한 특징들이 몇가지 있다.
첫째, 드가는 전통적인 고전회화에 관심이 아주 많아서 그림에다 구도의 문제, 전체 화면의 조형의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연구도 많이 한 화가다. 드가의 그림에선 마치 우연히 셔터가 눌려서 찍힌 스냅사진처럼 인물이 화면의 중심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드가의 철저한 구도 계산에 의한 것들이다.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신이 표현하고자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구도를 연구했다. 인상주의의 구도연구에 있어서는 드가와 세잔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둘째, 드가의 작품에는 실내 풍경이 많다. 마치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미어처럼 실내에서의 인물을 많이 그렸다. 물론, 카이유보트나 르노아르도 실내풍경을 많이 다뤘지만 드가에 비교하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드가는 태양의 자연광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비쳤을 때의 색의 변화를 아주 잘 표현하는 화가이다.
셋째, 드가의 작품에는 발레리나를 그린게 많다. 물론, 드가의 그림 중에는 폴로 경기를 하는 모습이나, 경마하는 모습같은 말이 등장하는 그림과 주점이나 실내의 풍경, 당시 프랑스 브르쥬아지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들도 많이 있지만 그보다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드가의 유일한 청동조각작품도 바로 발레리나였다.
넷째, 드가는 전통적인 유화 이외에 파스텔을 재료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마치 당대에 툴루즈 로트렉이 석판화에 자주 손 댄 것처럼 드가는 파스텔을 자주 그렸다. 파스텔의 부드럽고 불투명한 색조는 유화의 색상조합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만큼 섬세하게 다루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재료다. 드가는 파스텔 그림을 통해 유화 제작을 위한 많은 습작을겼다.
다섯째, 드가는 그리는 대상에 따라 작품의 스타일이 약간씩 다르다. 초상화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절제된 색을 사용하고 전통기법에 충실하다. 주로 초기에 많이 그렸다. 폴로 경기나 경마, 사냥등을 다룬 말 그림에서는 대체로 거칠고 대담한 붓터치와 화사한 색상이 등장한다. 경주마가 주는 다이나믹한 느낌과 에너지가 그래서 더 강조된다.
발레리나 그림들에서는 화사하고 세련된 색이 사용되곤 한다. 전체적으로 약간 가볍다싶을 정도로 밝은 색과 따스한 색이 강조되고. 반면에 실내 풍경들이기때문에 명암의 변화는 말 그림들에 비해 더 강하다. 누드 그림들은 빛에 의한 피부색의 변화에 촛점이 마추어졌고, 그래서인지 상황에 따라 일정한 특징을 갖지는 않는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소양을 지닌 애호가였기에 그는 일찍부터 예술적인 분위기에 접할 수 있었다. 앵그르의 제자로 역사화가로서 출발했으나 색채, 테크닉, 구성상의 대담하고 기나긴 실험작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인상주의전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 자신은 인상파로 분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고전주의 영향으로 날카로운 관찰을 통한 훌륭한 솜씨의 데생과 사물형태의 윤곽을 명확히 선묘하려는 것, 그리고 강한 명암 및 채도 대비의 효과 등에 치중하였다. 바른말 잘하는 독신남으로, 1876년 동생 르네의 파산때문에 상속받았던 유산의 상당 부분을 잃어 버렸다. 사망할 때는 거의 실명상태였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변화에 따른 사물의 다양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변화에 따른 사물의 다양한 인상을 포착하려 한 반면, 드가는 동작이나 자세, 선 등 끈질기게 형태의 분석에 매달린다.
드가는 무희들의 생활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 자신이 발레를 특별히 좋아해서도 아니며 또한 여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도 아니다. 단지 무희들의 움직임과 광선, 시각의 다양한 변화 등이 그의 관심을 끌게 한 것일 분이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오직 작품 제작에만 열중했다.
Portrait of Rene De Gas, 185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on, DC, USA
Portrait of Rene De Gas, 1855, Oil on canvas,
Smith College Museum of Art, Northampton, MA, USA
René de Gas, 1855 , oil on panel , 29.1 cm X 22.5 cm ,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1855, Oil on canvas , Musée d'Orsay, Paris, France
Candaule's Wife, 1855-1856, oil on panel , 29 cm X 22 cm , Private collection
Degas in a Green Jacket, 1855-1856, Oil on canvas , Private Collection
Male Nude, 1856 , oil on canvas , 34.9 cm X 61.6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NY (United States - New York)
Self Portrait, 1855-1856 , oil on paper laid down on canvas , 40.6 cm X 34.3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 New York, NY (United States - New York)
A Roman Beggar Woman, 1857, Oil on canvas , 100.3 x 75.2 cm, Birmingham Museums and Art Gallery, Birmingham, UK
Achille de Gas as a Naval Cadet (detail), 1857, Oil on canvas , 64.4 x 46.2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on, DC, USA
Portrait of Rene-Hillaire De Gas, 1857, Private Collection
Dante and Virgil at the Entrance to Hell,1857-185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in a Soft Hat, 1858, Oil on canvas , 26 x 19 cm
Sterling and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at Williamstown, MA, USA
Portrait of a Young Woman (after Bacchiacca), 1858-1859,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Canada
New York City
Woman Ironing, 1869, Oil on canvas , 92 x 74 cm
Neue Pinakothek, Munich, Germany
Rising Tide, 1869 , pastel on paper , 23.5 cm X 31.5 cm ,Private collection
Race Horses in a Landscape 1894
경마의 주제는 1862년부터 드가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드가는 1870년경에 이르러서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되풀이하여 다루기 시작했다. 19세기에 경마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 특히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산업혁명으로 절대 빈곤이 사라지고 시민혁명으로 신분제 질서가 무너지면서 여가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상류 계층의 스포츠였던 경마는 점차 사회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는 행사로 발전했다.
화가들에게는 스포츠 경기와 사회적 현상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인상파 화가들 중 드가와 마네, 그중에서도 드가는 경마를 새로운 그림의 주제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그림을 통해 움직임과 속도감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Race Horses 1885
Race Horses at Longchamp
1862년 드가는 롱샹 경마장의 기수들과 말타는 모습, 멋지게 차려 입은 관중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순간을 포착한 스케치와 같은 드가의 붓질은 경마장의 역동적인 장면들을 말의 빠른 움직임과 함께 감각적으로 전달했다.
사진과 일본 판화에 영향을 받은 드가는 인물의 배치를 바꾸고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단절과 원근법을 이용하여 순간적인 광경을 표현했다. 드가는 워낙 뛰어난 감각과 기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힘겨운 주제들에 균형감을 부여할 수가 있었고. 드가는 경마장을 그린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 간과하기 쉬운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이 가진 잠재력을 드러내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드가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할 때, 동물 모델과 인간 모델을 똑같이 냉정한 눈으로 본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Race Horses Before the Grandstand 1868 캔버스에 유채 46x61cm
Musee d'Orsay, Paris
인상주의가 빛과 색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드가는 공간 혹은 구도의 자유를 추구했던, 말하자면 구도의 미학의 소유자였다. <경마들의 행진>은 드가가 추구했던 이러한 예술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경마들의 행진>은 경마를 시작하기 전 기수들의 흥분된 서성거림을 정돈 없이 화폭에 담고있고 그림 상부는 하늘이 그려져 있다.
중앙은 필드로 비어있고 관중은 왼쪽 한쪽에 쏠려 있고, 정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수들은 양편 가장자리에 배치되어있어 마치 그림의 주제가 필드를 가득 메운 그림자들인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다. 잘린 것 같은 우연적인 효과 또한 보여주고 있어 이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특이한 구도였을 것이다.
또한 가만히 걷거나 뛰는 말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드가가 단순히 뛰어난 관찰자였을 뿐 아니라, 말을 촬영한 사진을 그림 그리는 데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열리기 전이어서 아직은 느긋해 보이는 기수들과 말에 대한 애착이 섬세한 필치로 표현된 이 작품은 독특한 구도와 자연스러운 생동감으로 드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소묘 등에도 능했던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에 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립했던 화가였다. 인상주의가 빛과 색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드가는 공간 혹은 구도의 자유를 추구했다. <관람석 앞의 경주마>는 독특한 구도와 자연스러운 생동감으로 드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다.
비록 제작은 아틀리에에서 기억에 비추어 했지만, 작품들을 보면 마치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직접 그린 듯한 실감을 준다. 그림은 경마를 시작하기 전 기수들의 흥분된 서성거림을 정돈 없이 화폭에 담고 있다. 상부는 하늘로 차 있으며, 중앙은 필드로 비어 있고, 관중은 왼편 한쪽에 쏠려 있으며, 그리고 정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수들은 양편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마치 그림의 주제가 필드를 가득 메운 그림자들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경마의 주제는 1862년부터 드가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1870년경에 이르러서야 드가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되풀이하여 다루기 시작했다.
At the Races 1877 ~ 1880 Museed Orcay Paris
At the Races 1877
Race Horses 1899
Les Courses 1904
Jockeys in the Rain 1886
Jockys Pastel on Paper Hill-Stead Museun, Farmington, Ct
aux Courses en Province (at the Races in the Country) 1872
Museum of Fine Arts at Boston
목욕 후 1898
목욕 후 목을 말리는 여인 1898
‘목욕하는 여인’들의 연작이 시작되는데 특이한 것은 모델들의 얼굴이 전부 가려있다는 점이다. 드가는 모델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색과 선으로 표현된 하나의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드가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는 거의 장님 같은 삶이었고 끝 없이 파리 거리를 헤매다니 곤 했다고 한다. 특히 그와 친했던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았는데 그것이 그의 노후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했다. 인상파라고는 하지만 본인이 인상파라는 것을 부정했고 사실주의파로 남고 싶어 했다고 한다.
목욕 뒤의 개운한 일상을 그림으로 만나다
에드가 드가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 4전
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요즘은 때를 씻기 위해 목욕을 하는 일은 거의 드물어졌지요. 또한 우리의 목욕 문화도 많이 변해서 그런 일차적인 목적보다는 기분전환과 스트레스 해소, 또는 친교의 목적으로 목욕탕이나 사우나, 찜질방을 많이 찾습니다.
목욕은 몸만 즐거울 뿐 아니라 마음도 가볍고 상쾌하게 합니다. 더불어 목욕 뒤에는 몸이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거듭나는 듯한 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그런 흔한 일상의 느낌을 담아낸 결코 흔하지 않은 그림들을 찾아 소개하고,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순간적인 동작을 포착한 생생한 그림
아래 그림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 프랑스, 1834-1917)의 목욕을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우리에게는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주제로 한 드가의 그림들이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거리풍경이나 연주회장을 비롯하여 빈민가의 세탁부나 가정부, 재봉사와 같은 평범한 인물과 "목욕 뒤(After The Bath)"란 제목처럼 평범한 우리네 일상과 관련한 작품들도 다수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여인이 목욕을 준비하거나 목욕통에 들어가고 나오는 순간적인 표정과 몸짓, 자세, 감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는 목욕통 안에서 목욕하는 모습이나 목욕 뒤에 몸의 물기를 말리거나 닦는 모습, 또는 목욕 뒤 바로 머리를 빗는 모습 등 순간의 생생한 느낌을 실감나는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림을 감상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고자 옆에 드가가 직접 그린 자화상과 함께 간략하게나마 그의 약력을 덧붙입니다. 드가는 19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류 가문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47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화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1853년 그가 하던 공부를 그만 두고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 들어갑니다. 8년 동안의 중학교 수업이 학교 교육의 전부였던 그의 학창시절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공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일이 허다하고 주의가 산만한 학생이었습니다.
드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루브르미술관(Musée du Louvre)에서 모사화 그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가업을 이어가리라고 기대했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는 비교적 빨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aean Dominique Ingres, 프랑스, 1780-1867)에게 배웠고, 1854-1859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오랜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동자 계급과 일상을 담아낸 드가
1859년-1865년 사이에 파리 미술계의 일원이 되었으며 비슷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진 마네(Edouard Manet, 프랑스, 1832-1883)와도 우정을 쌓으며 영향을 받습니다. 이 시기에 대중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살롱전에 출품할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주제로 한 새로운 표현방식의 작품제작에 몰두하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가는 아버지가 축적해 놓은 부 덕분에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며 그림작업을 할 수 있었고, 점차 그의 작품도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주위에는 완고한 비난자와 함께 지지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1873년 12월부터는 당시 신랄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있던 인상파 전시회에 세잔(Paul Cézanne, 프랑스, 1839-1906), 모네(Claude Monet, 프랑스, 1840-1926), 피사로(Camille Pissarro, 프랑스, 1830-1903)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조합을 결성하고 전람회를 엽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람회는 실패하였으나 뛰어난 데생 능력을 지녔던 드가는 잇단 전람회 출품으로 폭넓은 찬사도 받습니다.
미술품 수집에도 열중했던 시인, 조각가, 사진가
1880년-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드가는 명성과 부도 얻습니다.흙과 브론즈를 조각했던 조각가이자 시인이었으며, 사진작가로도 활동했던 드가는 동시에 당대의 가장 통찰력 있는 안목을 지닌 수집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시로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고갱(Paul Gauguin, 프랑스, 1848-1903),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등의 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드가는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그의 인간 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였습니다. 30대 중반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나이가 들면서 드가도 귀가 어두워졌고 모네와 마찬가지로 눈마저 기능을 잃었으나 말년까지도 매사에 집요하고 엄격하기까지 했던 청년시절의 생활에서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현 양식과 기법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고독하였지만 평화로운 가운데 1917년 12월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1876)"을 비롯하여 "무대위의 발레연습(1874,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다림질하는 여성(1884-6, 오르세미술관)", "목욕통(1886, 오르세미술관)"을 비롯한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목욕통(The Tub), 1886, Pastel on paper, Musée d'Orsay, Paris, France
야외의 태양 빛이 순간순간 그려내는 색채의 변화와 조화에 관심을 가졌던 동시대의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드가는 실내의 화실에서 마치 사진가의 시각으로 일상적인 순간의 움직임과 균형의 미묘한 조합을 포착하는데 흥미를 느꼈고 더 관심을 쏟았습니다. 재료나 방법의 제한 없이 인체의 미묘한 동작과 인간형상을 표현하는 속도감 있는 붓질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감상하는 것처럼, 위 두 그림을 그릴 당시의 드가는 복잡한 기법과 정확한 소묘 능력, 솔직하고 대담한 표현으로 처음 시도하는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의 초상화 작업은 감소하였고,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 그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과 같은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일상이 신선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같은 '인상파'로 분류되는 르누아르(Auguste Renoir, 프랑스, 1841-1919)의 화려하고 우아한 무용수와는 달리 드가가 그린 무용수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으로서의 무대 뒷모습과 순간의 표졍,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우아한 배경 대신에 구부린 채 다림질하거나 하품을 하고있는 여성노동자의 형상을 인간적인 연민을 담아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 두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목욕을 준비하거나 목욕하고 있는 순간의 아주 개인적인 표정이나 은밀한 일상조차도 전혀 천박스럽지 않게 진실로 가득찬 그림으로 담아 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구도에서 탈피한 새로운 시각과 커튼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빛과 명암이 더욱 신선한 채색으로 다가옵니다.
발을 닦고 있는 여인(Nude Wiping Her Foot), 1885-86,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머리를 빗는 여인(Woman Combing Her Hair), 1885-86, Pastel on cardboard.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더운물에 풍덩 빠져들면 마치 편안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라도 다시 들어온 듯 온 몸이 편안해지기도 하지요. 이렇게 우리의 일상 가운데 자신에 대한 방어자세를 풀고 원초적인 만족감에 젖어볼 수 있는 일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인상파 화가 드가의 화폭에 포착된 목욕하는 여인들은 그 동작이 매우 다채롭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또한 드가의 그림 가운데에는 목욕중인 여인뿐만 아니라 목욕 뒤에 몸에 남은 물기를 닦거나 말리는 모습도 그리고 있으며, 오늘 소개한 위의 두 그림에서 감상하는 것처럼, 목욕 뒤에 채 마르지 않은 몸의 물기를 구석구석 닦아내고 머리도 빗는 순간적인 형상과 그 때의 말끔하고 개운한 분위기와 느낌까지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내밀한 목욕의식이 경건한 느낌으로
특히 창을 커튼으로 가린 실내의 분위기를 자연의 햇살만큼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한 빛과 색채로 조합하여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드러운 명암에 파스텔그림 같기도 하고 거친 데생의 속도감 있는 붓질 같기도 한 독특한 기법을 통하여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더 실감나게 자아내고 있습니다.
몸의 물기를 닦거나 말리고 머리를 빗는 여인의 모습과 그 분위기를 묘사한 위 두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은밀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드가 특유의 귀족적인 표현으로 여성들만의 내밀한 목욕 의식을 차분하고 진실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남자에 비해 더 거룩하고 경건한 이미지로 바라보게 합니다.
더불어 위 처음의 두 그림은 목욕하는 여인을 통하여 자신만의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며, 마지막 두 그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발을 매만지는 여인의 모습은 한가로움과 넉넉함, 심지어는 졸음과 함께 찾아오는 안온한 행복감과 지극한 평화를 전해줍니다. 또한 목욕 뒤에 만나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 드가의 네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행복과 평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드가의 위 작품은 삶이 우리에게 언져주는 스트레스나 무게를 다 날려 버린 듯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희망을 얻은 그 한 순간의 표정과 동작, 그리고 그 때의 감정까지도 포착하여 표현한 그림들입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그 아름답고 평안하며 행복한 순간을 결코 흔하지 않은 그림으로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고전 미술의 정형화되고 박제화된 누드와는 달리, 위 드가의 그림은 정직하면서도 익숙한 우리 일상 한 가운데의 자연스러운 벌거벗음으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과 비누 냄새에 어우러진 피부의 개운한 느낌까지도 자연스러운 벌거벗음으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전해져 옵니다.
인상주의란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1874년 4월 25일 미술 비평가 르로이가 파리의 전시회에서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서양 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 예술운동의 한 갈래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조로 쓰이고 있다.
미술에서 시작하여 음악, 문학 분야에까지 퍼져나갔다.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아마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애호되는 화풍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상주의가 대중에게 커다란 호감을 주게된 중요한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손꼽는다.
인상주의 화가는 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와 기교에 얽메이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그림의 동기와 대상을 찾았다. 또한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색채, 색조, 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인상주의 화가는 사실주의 화가처럼 도시의 일상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시골의, 특히 프로방스 지방의 햇살 아래의 수시로 변화 하는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화폭에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생동감과 친근감을 주게된다.
인상주의 화가는 빛과 색의 조화, 대상과 면의 구성을 나름대로 실험하였으며, 이는 후에 나타나는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풀밭 위의 식사"를 비롯하여, 1863년 "풀밭위의 점심"으로 당시 비난의 대상이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인상파의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 세잔, 고갱, 고흐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 목용 뒤의 개운한 일상을 그림으로 만나다 / 오마이뉴스
Bathers on the grass, 1886-90
The Morning Bath, 1890
Edgar Degas - Bather Streched Out on the Floor
Room in a Brothel, c. 1879
여성혐오주의자 드가의 무희 사랑[예술가의 취향]
에드가 드가(1834~1917)는 전형적 까도남(‘까다로운 도시 남자’의 줄임말)이었다. 그는 아주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질로 악명 높았다. 드가를 만찬에 초대했던 유명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유별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잠깐만요. 저한테는 버터를 넣지 않은 요리를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식탁에는 꽃을 꽂지 말고, 저녁식사는 7시 반 정각으로 해주세요. 댁의 고양이가 식탁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주시고, 손님들도 개를 데리고 오지 않게 해주세요. 초대 손님 중에 여성이 있다면 향수를 뿌리지 말고 와달라고 해주세요. 아참, 조명은 아주 약하게 해주세요. 아시다시피 제가 눈이 아주 안 좋아서요.”
게다가 드가는 이 저녁식사에서 어린아이가 포크로 접시를 두드린다는 이유로 고함을 질러 아이를 기겁시켜 울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는데, 아주 위트 있고 재미 있는 입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가는 어린이, 강아지, 꽃을 싫어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장트로프(misan thrope), 즉 인간을 혐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드가의 인간 혐오에는 여성 혐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이었던 그는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어린 여자무용수들을 그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주 가까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어린 소녀들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드가의 무희 그림은 그들과 친밀하지 않으면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마치 창녀들과 동고동락을 했기에 가능했던 툴루즈 로트렉의 카바레 그림과 비슷하다. 아마 드가는 처음부터 무용수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고전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오페라극장의 관현악단 연주자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페라극장에서의 공연을 자주 관람하게 되었던 것! 더군다나 화가로서 형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발레 공연이 곧 움직이는 드로잉이라고 느껴 더욱 더 매혹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자 드가는 오페라극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연간회원권을 구입했다. 당대 상류층 사람들은 연간회원권을 구입해 오페라극장의 주요 좌석을 차지했다.
그들은 단순히 공연을 볼 수 있는 1층 앞자리나 귀빈석뿐만 아니라 무대 옆 공간이나 기둥 사이사이의 은밀한 공간, 공연 시작 전이나 막간 혹은 끝나고 나서 배우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배우휴게실 등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드가 역시 무대뿐 아니라 탈의실, 대기실, 연습실 등 무용수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쫓아가서 스케치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드가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무희 그림을 그릴 때는 공연을 본 것과 상상한 것을 더해 그렸다. 그것은 드가가 원하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극장에서 무용 오디션이 있는 날,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디션 장면을 그리기는 했는데, 실제 장면을 본 적이 없어서 부끄럽다”는 겸손한 부탁과 함께! 그리하여 1870년대 초반부터 발레 그림을 부쩍 많이 그리기 시작했는데, 무대 위의 무희들을 그린 그림도 있지만 그보다는 발레 연습과 휴식 장면을 더 많이 그렸다.
사실상 드가가 이런 무희 그림에 천착하게 된 것은 단순히 발레 동작의 미학적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를 더욱 매혹시켰던 것은 무대 뒤 무용수들의 은밀한 세계였다. 예컨대 우아한 백조의 수면 아래 천박한 발길질처럼, 피나는 노력을 숨기도록 훈련받는 무용수들의 실상에 더욱 끌렸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아름답고, 육감적이고, 우아하고, 고상한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긴장감과 피로, 숨어있는 고통 등에 신경이 쓰였다. 뿐만 아니라 드가는 그녀들을 둘러싼 남성 관람객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무대 뒤의 은밀함’이란 무용수들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 관련된다. 당시 무용수들은 주로 노동계층에서 선발되었고, 일고 여덟 살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정식교육을 받지 않아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었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일주일에 엿새씩 늦은 저녁까지 수업과 연습에 몰두했다.
무용수들의 엄마들 또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들 중 대다수는 드가가 즐겨 그리던 세탁부들이었다. 그들은 집안살림을 갉아먹는 딸들을 위해 가장 밑바닥 직업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딸을 젊은 무용수로 키우는 것만이 노동계급의 가난에서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늘 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딸의 처녀성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비싼 값을 부르는 고객(후원자)을 찾을 때까지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오페라를 세련된 탐욕과 겁 많고 헐벗은 희생자를 엮어주는 곳에 비유했다. 돈 많은 후원자들은 발레리나를 마치 우리에 갇힌 사냥감이나 시녀 정도로 여겼던 것! 한 전직 무용수는 “일단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서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창녀로 길러지는 것”이라고 탄식했다.
드가만큼은 무용수들 앞에서 반듯하게 행동했다. 그는 무용수를 비롯한 모델과 잠자리를 같이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드가는 오페라극장 단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레단을 자신의 가족처럼 느낀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무용수가 돈이 없어 힘들어 하자 영향력이 있는 친구에게 그 무용수를 잘 봐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하면, 모델 한 명이 결핵으로 죽어갈 때에도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무용수들은 그런 드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드가가 자기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 무용수는 “조용하고 친절한 노인으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파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층계참에 서서 오가는 무용수들을 그리곤 했는데, 지나가는 무용수들에게 잠깐만 멈춰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렇게 서 있는 동안 재빨리 그 모습을 스케치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하여 드가가 포착해낸 무용수들은 거식증에 걸린 오늘날의 무용수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기 몸을 핥는 고양이처럼 무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단단하고 건장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런 그림은 드가와 모델의 물리적 거리는 아주 가까웠지만, 심리적 거리는 조금 소원했음을 드러낸다.
심리적 거리란 최소한의 환상을 유지해줄 수 있는 거리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드가가 그녀들을 섹슈얼리티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혐오주의자 드가의 사랑법 혹은 취향이었다
[출처] 에드가 드가의 작품세계 Ⅰ[1855~1869]-Edgar Degas |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