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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갔구나
[知音, 伯牙絶絃]
중국 춘추시대에 백아(伯牙)라는 초(楚)나라 출신의 악사가 있었다. 그는 거문고의 명인 성련(成連)의 문하에 들어가 탄금(彈琴)을 배웠다. 성련은 3년 동안 백아에게 음악의 기초와 기본적인 연주 기법을 가르친 뒤 그를 동해(東海) 봉래산(蓬萊山)에 보내어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등을 듣게 했다. 대자연의 장엄한 경관과 이에 화합하는 청정한 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그 속에서 스스로 음악을 터득하게 한 것이다. 거기서 백아는 자연의 소리와 자신의 감정을 일치시켜 이를 악상(樂想)으로 정리, 연주하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였다. 이러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백아는 높은 수준의 금곡(琴曲)을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의 거문고 연주 실력은 오묘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 깊이가 남달라 이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다시 스승을 찾아갔지만 성련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난 후였다.
백아는 매우 상심하여 고향 쪽으로 강을 따라 배를 저어가던 중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구슬프기까지 한 어느 강어귀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거문고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 한참을 연주하다 보니 이상스럽게도 어디선가 바람결에 사람의 탄식 같은 것이 들러왔는데, 그것은 마치 백아의 거문고 가락에 화답하는 듯했다. 잠시 연주를 멈추자 나무 그늘 뒤에서 가난한 나무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종자기(鍾子期)였다. 처음 보았는데도 오래된 지기(知己) 같은 친근감이 느껴져서 백아는 그를 위해 정성껏 거문고를 연주했고 종자기 역시 백아의 거문고 줄에서 튕겨 나오는 유유자적하는 흥취에 푹 빠져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백아는 모처럼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기에 몇 곡을 더 연주했고, 이윽고 둘이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 이후 백아가 거문고 연주를 하면 종자기가 그 감상을 말해주곤 하는 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자주 이어졌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켜자 종자기는 그 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굉장하네. 태산이 서운(瑞雲)을 뚫고 우뚝 솟아 있고 자네가 그 봉우리 위에 의연히 서 있는 느낌일세.”
또 한 번은 백아가 거침없이 흐르는 강을 떠올리면서 거문고를 켜니 종자기가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대단해. 도도한 큰 강이 눈앞에 흐르고 그 위에 소슬바람이 지나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이처럼 종자기는 백아가 품고 있는 생각을 거문고 소리를 통해 척척 알아맞혔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커다란 바위 밑에 몸을 숨겨 머무르게 되었다. 백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울적한 기분을 거문고에 담아 연주했다. 한 곡 한 곡마다 종자기는 척척 백아의 미묘한 감정의 굴곡까지 다 알아맞혔다. 이에 백아는 거문고를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정말 대단하네. 그대의 머리에 떠오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곧 내 마음 그대롤세. 그대 앞에서 거문고를 켜면 도저히 내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네.”
그러나 둘이는 마냥 같이 지낼 수만은 형편이어서 1년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서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다음 해 백아는 약속대로 거문고를 가지고 종자기가 사는 곳에 찾아왔다. 그런데 종자기는 보이지 않고 그가 얼마 전 병으로 죽고 말았다는 전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백아는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그를 위해 1년 동안 준비한 곡을 연주해 올렸다. 그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대성통곡하며 소리쳤다.
“아, 단 한 사람, 내 소리를 알아주는 그 사람이 갔구나!”
그런 다음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 버리고는 두 번 다시 거문고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이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위 이야기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내용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인데, ‘지음(知音)’과 ‘백아절현(伯牙絶絃)’은 바로 이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나에게도 B라는 ‘지음’이 있었다. B와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고, 군대생활도 함께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21번이었고 B는 28번이어서 한 교실의 바로 앞뒤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연히 그와 내가 번역자는 다르지만 저자가 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급속히 친해졌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독서에 관한 한 조숙하여 ‘학원사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위인전은 진즉에 완파하고 본격적으로 고전작품 읽기에 들어섰었다. 나는 그 무렵 이미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B는 자기는 진로를 확정하진 않았지만 과학 쪽으로 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문학과 영화는 그쪽에서 자기를 버리지 않는 한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책을 서로 바꿔 보기도 하고 영화를 함께 보러 다니기도 했는데, ‘화신’, ‘미우만’, ‘동영’, ‘시네마’ 같은 동시상영관이 우리의 주된 단골 영화관이었다. <피크닉>, <젊은이의 양지>, <바이킹>, <흑과 백> 같은 영화들을 그때 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 집은 상도동에 있었고 B의 집은 불광동에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양쪽 집에 자주 놀러 다녔고, 두 집안의 부모님들도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우리는 한 쪽 집에 놀러 와서는 헤어지기 싫어서 서로 배웅해준다고 상도동과 불광동 사이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한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이른바 ‘무전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했는데, 장항역에서는 무단가출소년으로 몰려 파출소까지 끌려갔었고, 제주도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장비나 침구도 없이 무모하게 한라산에 등정한다고 올라가다가 관음사 조금 지나서 날이 어두워져 밤새 떨면서 바위틈에서 일박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나는 수필이나 콩트 같은 습작품을 쓰기도 했으나 B가 어떻게 생각할까 겁이나 보여주지 않았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내가 장원을 하는 바람에 그가 내 작품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B는 대뜸 “너무 관념적이야. 뼈와 살만 있지 그 안에 피가 흐르지 않잖아!”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여 나는 몹시 서운했다. 그래도 장원을 한 작품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 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생이 인생을 얼마나 안다고 깨달은 척하고 구체적인 경험의 뒷받침 없이 현학적인 용어만 잔뜩 나열한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대학은 나는 철학을 공부하여 깊이 있는 소설을 써 보겠다고 서울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고, B도 같은 단과대학의 물리학과로 올라왔다. 문과와 이과로 전공이 다른데도 우리 둘은 대학 캠퍼스에서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하였고, 한번은 둘이 함께 문리대 연극회에 같이 가입해보려고도 했는데 시종 A, B 역을 맡으라고 하는 바람에 포기했다(나는 나중에 <유희는 끝났다>라는 희곡을 써서 공연을 했으니 문리대 연극회와의 인연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대학시절에도 곧잘 영화도 함께 보러 다녔는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콜렉터>를 보고 가두는 자와 갇힌 자, 외곬이고 내성적인 교양 없는 졸부와 훌륭하게 교양을 갖춘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와는 영원히 합일할 수가 없는가 하는 문제로 한참 서로 의견을 토로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와 나는 취미까지 비슷했지만 대체로 그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우선 키가 중2 때는 별로 차이가 안 났었는데 그 이후 그는 부쩍 크고 나는 거의 제자리걸음이었기에 나중에는 15센티미터 가까이 차이가 나 함께 가면 ‘꺼꾸리군・장다리군’의 모습이었다. 키가 크니 그가 농구 슛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구도 내가 하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점수는 같이 놓고 쳤지만(나중에는 250을 같이 놓았음) 승률은 그가 70퍼센트 이상 차지할 정도로 높았다. 바둑은 내가 8급 정도에서 그만두었는데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1급까지 올라갔고, 담배는 서로 비슷하게 피워댔으나 술만은 나는 소주 한두 잔으로 끝나는데 그는 아무도 그의 끝을 모를 정도다. 나는 고교 백일장으로 내 글을 들킨 이후 가끔 내가 쓴 작품의 초고를 그에게 보여줬는데, 글 쓰는 재주만은 확실히 그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내가 쓴 글을 면밀하게 검토한 그는 성실하게 의견을 말해줬는데, 그의 적확(的確)한 지적에 나는 매번 감탄했다. 어쩌다 그가 “이건 정말 소설다운 냄새를 풍기는군.” 정도로만 평을 해줘도 나는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은 초등학생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 역시 분명히 글을 쓰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서운하게도 그는 자기 글은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문학과 영화에 관하여는 B는 나보다도 더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007 위기일발>과 <007 골드핑거> 두 영화를 보고 나서 첩보물에 푹 빠져 페이퍼백으로 된 이언 플레밍이 쓴 007 시리즈의 소설(원서였는데 제목은 지금 기억이 안 남)을 읽고 있는 걸 보더니 그걸 빼앗아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자기 가방에서 조지 기싱의 『The Private Papers of Henry Ryecroft』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시간에 ‘Spring’ 부분 몇 대목을 텍스트로 배우기도 했던 그 수상집은 한동안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줬다. 먼저 기싱이 보여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한 한 지식인의 모습은 나를 가볍게 처신하지 않도록 해주었으며, 또 글 자체에 나타난 자연과 주변인물에 대한 섬세하고 적절한 묘사는 나의 문학수업에 좋은 전범이 되었다.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둘이 약간 취향이 달랐던지 B는 당시 대한극장 건너편에 있던 아데네극장에서 <나의 청춘 마리안느>라는 오래된 영화를 함께 보고 나서 꽤 오랫동안 ‘사랑앓이’를 하였고(그는 꼭 마리안느 같은 여자와 결혼한다고 했는데…), 나는 프랑스문화원인가에서 본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와 같이 시간이나 기억 같은 것에 관하여 병적인 집착이 얽혀 있는 짧은 사랑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고전적인 낭만파에 속한다면 아마도 나는 그때까지도 감성에 솔직하지 못한 채 그저 관념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ROTC 후보생 지원을 하자 그가 “넌 그냥 모범생 할 모양이지?” 하면서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이미 그는 내가 작가의 길을 접고 다른 쪽 길을 걷게 되리라는 걸 예측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드디어 그의 글을 보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말쯤 돼서다. 모 문학상 공모에 어쩌다 우리 둘 다 응모했는데, 심사 결과 당선작은 없었고 내가 가작, B가 장려상을 받았다. 우리는 둘 다 당선이 못 됐음을 분하게 생각했고(왜 ‘당선작 없음’으로 했을까…), 그 와중에도 나는 처음으로 그의 글과 나의 글이 비교 대상이 돼서 내 글이 한 급 위인 ‘가작’으로 평가됐다는 것에 은근히 기분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어 본 나는 금방 생각이 달라졌다. 그의 글이 분명 나의 글보다 한 수 위였다. 내 글은 뭔가 많은 걸 담으려고 욕심을 잔뜩 부렸지만 실체가 없고 관념만 뒤엉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의 글은 주제가 뚜렷하고 문체가 명징(明澄)하여 호소력이 있었다. 다만 글 내용 중 일부 표현이 주최 측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은 점이 있어 당선작으로 삼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자존심은 한없이 무너지고 나는 한동안 글 쓸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LMG 소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군대 전화로 연락을 받았는데 B가 신병교육을 마치고 보충대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힘을 써 일단 내가 소속된 사단까지는 오게 되었다. B가 이미 ‘우수자원’으로 분류되어 사단 작전참모부에서 미리 점찍어 놓았기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지만 간신히 B를 내가 소속된 연대로 돌렸고, 또 연대 인사장교를 공들여 설득한 덕분에 결국 내가 근무하는 중대까지 B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생활도 나는 소대장으로, B는 중대본부 작전병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나는 장교였기에 약간 불편한 정도였지만 B는 사병이었기에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떨어지는 것이 싫었기에 스펙이 좋은 B가 더 편한 좋은 자리로의 스카웃될 몇 번의 기회도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벗어났다(당시만 해도 일선 보병 사단에서 서울대 출신을 찾아보기는 정말 어려웠다). 아무튼 우리는 내가 중위 승진하여 통역장교로 미군부대에 파견될 때까지 1년 정도를 한 부대 내에서 남에게 책잡히지 않게 모범적인 ‘상하관계’를 유지했다. 기회가 될 때면 장교 1, 사병 1로 구성된 팀 음어(陰語) 경연대회 함께 나가 1등을 하는 등 부대의 평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여 대대장 등 상급자로부터 칭찬도 여러 번 받았다.
내가 먼저 제대를 했고, 휴가 차 나왔다가 고시생으로 변해버린 나를 보더니 B는 당연히 올 것이 왔다는 식으로 그냥 씩 웃기만 하고 “건강 잘 챙겨라.” 했다. 군 복무를 마저 마친 후 B는 당시로는 첨단이라 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쪽 업무에 종사했고, 정말로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마리안느를 닮은 여인과 결혼했다. 내 결혼식 때 접수를 맡아 수고를 해준 B가 “너는 퇴폐적인 여자와 연애만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청순한 여자와 결혼까지 하냐?”고 놀려댔기에, 나도 복수 삼아 “마리안느를 놓치지 말고 꼭 잡아!”라고 한마디 했다(아, 이 말이…).
검찰과 컴퓨터업계라는 다른 업종에 바쁘게 근무하면서도 우리는 학창시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만났고, 만나기만 하면 문학과 영화 이야기로 끝 모르게 이어갔다. 그러다가 내가 지방근무를 하게 되면 조금 소원해지고 서울 근무로 돌아오면 다시 옛 모습을 찾는 식으로 여러 해 이어졌는데, 아 그만 B의 마리안느가 먼저 가고 말았다. 어느 친구가 말했듯이 너무나 고결해 보여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던 마리안느가 영화에서처럼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장지까지 함께 갔던 나와 내 아내는 B와 마리안느의 어린 아들 Y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들판에서 고추잠자리를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후 다른 친구들이 아직 창창한 나이라면서 B에게 재혼을 권유하고 Y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적극 중매에도 나섰지만 B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의 뱅상처럼 마리안느를 잊지 못하고 모두 단호히 거절한 채 술에만 의지하며 지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자주 만나 예의 문학청년적인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폭음하는 모습이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 보여 나는 그를 만나기가 좀 두려워졌고, 지방 근무가 잦아지면서 아무래도 전과 같지는 않게 되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1999. 10. 8. Y가 대학 3학년생이고 내가 서울지검 형사1부장검사로서 모 대형 사건을 수사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쁘던 어느 날 B는 무심한 친구를 원망하듯이 황망히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마지막에 남긴 두터운 노트에 낙서처럼 갈겨 쓴 영화 시놉시스는 물리학도이고 컴퓨터업계에 오래 종사했으면서도 끝까지 문학과 영화를 사랑했던 그가 진즉에 그런 것을 버리고 현실적 속물이 되어버린 나를 책하는 듯해서 더욱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나의 문학소년 시절, 그리고 문학청년 시절 내 글을 제대로 이해해준 건 바로 B뿐이었는데….’ 필요할 땐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내가 그곳에 있겠다고 했건만 바쁘고 속물이 되어버린 나에겐 손을 내밀지 않고 술하고만 깊이 사귀다 그만 먼저 가 버린 것이다.
세월이 또 흘러 2015. 10. 25. Y가 훌륭하게 자라(고아가 돼 버렸지만 고모가 잘 돌봐주어 아버지를 뒤이어 컴퓨터학을 전공했다) 어머니와 같이 문학을 전공한 참한 규수와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식 날 간신히 주례를 마친 나는 내 친구 B를 위해 마지막 일을 했다 싶으면서 집으로 돌아와 일부러 샤워를 틀어놓고 오랫동안 펑펑 울었다. 아, 내 친구는 어디 갔나? 내가 거문고를 버려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 기다리다 못해 먼저 가 버렸구나. 정말 보고 싶다.
오랜 사회생활을 한 관계로 나이가 제법 든 요즘까지도 나는 결혼을 알리는 기쁜 소식과 지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곧잘 많이 받는다. 그런데 요즘 들어오는 부고는 종전과 달리 친상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본인상에 대한 것이 훨씬 더 많다. 물론 내 나이가 이미 선친께서 돌아가신 때의 나이보다 더 되고 했으니 당연한 것이겠다. 그렇지만, 한 달 전 폐암으로 입원했다고 해서 문병을 갔었는데 그 뒤 다행히 초기라 수술이 잘되어 퇴원 후 집에서 잘 요양하고 있다고 직접 전화까지 했던 친구가 그만 간밤에 자다가 숨을 거뒀다든지, 심지어 사흘 전 동창 모임이 끝나고 내 차로 그의 집까지 태워줬던 친구가 오늘 새벽 골프를 치다가 퍼팅을 하던 중 “어, 어!” 하더니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면서 어이가 없고 가슴이 미어진다. 정말 싫다. 친구의 빈소에 갔다 오기라도 하면 내가 그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일 등이 떠올라 한 동안 우울증 환자라도 된 것처럼 일손이 안 잡힌다. 한번은 마음이 그지없이 착하고 곱던 친구였는데 빈소의 영정을 보니 잔뜩 찡그린 표정이 세상에 대하여 불만이 가득해 보이고 나한테도 똑바로 하라고 질책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오는 길로 허바허바 사진관에 가서 영정사진 찍으러 왔다고 하니까 나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사진사가 “아 예, 영정 사진 미리 찍어 두면 오래 사신다죠.” 하면서 촬영을 했다. 그것이 벌써 13년 전의 일이니 그 사진사의 말이 맞긴 맞는 건가….
이렇게 나를 알아주던 친구들이 하나 둘 죽어가니 참으로 안타깝고 괴롭다. 또 한 친구가 죽었다. 아내도 잘 아는 친구이기에 함께 문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여보, 너무 애통해하지 말고 편안히 가시게 보내드려요. 그분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나를 잘 알아주던 친구를 내가 어찌 그냥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한 달쯤 뒤 그 친구의 부인이 친구의 유품을 정리하다 나에 대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발견하고 보내줬는데 나는 한 번 더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 종자기가 떠난 뒤 거문고 줄을 끊은 백아의 마음을 이제 알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그 사진사의 말처럼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를 알아주는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날 때마다 마음속 거문고 줄이 끊기며 오래오래 애통해 한다는 것은 오히려 형벌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친구들에게 남기고 가느니 내가 끝까지 남아서 이러한 친구들의 아픔까지 다 안고 가는 것이 맞지 않은가. 물론 내가 그리 생각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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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편소설 잘 읽었어요. 공감이 공명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물리학과 출신 동창이 여러 해 전에 먼저 가신 이상명 군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오자 하나 "그러나 둘이는 마냥 같이 지낼 수만은 형편이어서 1년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서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에서 지낼 수만은 (없는) 형편이어서 ~가 아닐까요^^
能田 선사님, 친절히 오자까지 지적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상명 친구도 나의 知音임엔 틀림없습니다만, 여기의 B는 이니셜대로 방종철입니다.
그의 아들 Y(윤복)는 잘 자라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문가로서 넥슨 그룹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습니다.
참한 규수를 만나 아들 낳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방종철 군인가 보네......
그 당시 물리학과에 두 명이나 입학했군요~ 방종철도 일찍 고인이 되셨고~ 새삼 여러 사실들에 접하는군요~
감사합니다. 연세대 물리학과에 장영덕이라고 있었는데 이 친구도 일찍 고인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