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43
9월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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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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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개별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직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라는 표현 앞에 큰 부담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구심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라 초능력도 없는데, 나같은 사람에게 무슨 예언을 하라는 말인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본질적인 직무는, 미래에 다가올 뭔가 대단한 일을 알아맞추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중차대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 모범이 되는 스승이요 교사, 안내자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외침이나 멸망, 큰 환난이나 대기근이 다가왔을 때,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여러분들, 바로 이 길이 정답입니다!’라고 외치며 길을 열어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언자라고 해서 다 제대로 된 예언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과 판단으로, 위기 상황 앞에 서 있던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을 건넸지만, 사실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삯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관은 확실했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복음 6장 39절)
사이비 예언자들을 추종하고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삯꾼들과 함께 우르르 집단적으로 심연의 구덩이,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 이 시대 역시 인류 역사 안에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자연스럽게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릇된 가르침과 감언이설로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소멸해갔던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했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성전지상주의, 지나친 성직주의, 극단적인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인류나 국가 공동체의 공동선이나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깊이 함몰되어, 다들 집단으로 멸망의 길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거짓 예언자들, 그릇된 목자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교’라는지‘애국’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듣는 사람들 민망하게 만들면서, 나라 전체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이나 아픔 앞에 고민하고 근심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정 반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요 치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과 얼굴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훌륭한 목사님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나라를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선량한 목회자들께서 겪고 계실 참담함과 부끄러움이 참으로 크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목회중이던 예배당을 과감하게 처분해서 신자들에게 돌려준, 경기도 한 작은 교회 목사님의 말씀과 결단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집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죠.
지금은 콘크리트에 갇혀서 자기들만의 리그, 자기들만의 행복한 예배 공간, 예배 나눔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입니다.”(이규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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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u27lDtOT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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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질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을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자신이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