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 무한한 타자에 대한 두 견해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었던 스릴러 웹툰(우)과 드라마화 된 작품의 표지(좌)
<스토리>
아는 형의 소개로 취직을 하게 돼 서울로 상경한 주인공 “종우”는 가격이 저렴한 고시원으로 숙소를 잡는다. 거듭 외면하려 하지만 고시원 주인부터 숙박하는 사람들 하나하나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소개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선배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낌새를 내비친다.
거듭되는 사소한 사건들 속에 “종우”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가고, 결국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 의 배경>
▲ 웹툰 연재 중
등장하는 제목의 기원 격의 대사
사실 스릴러의 진행 방향과 제목의 함의가 잘 맞아 떨어지는 편은 아니다. 따지자면 ‘굳이 연결시키려고 한다면 얼추 맞아 떨어지는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은 그 전까지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1905. 06. 21 ~ 1980. 04.15)의
대사로써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이는 그의 희곡 출구 없는 방(No
Exit.1944)에서 대사를 통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 L‘enfer, c’est les autres!)”를 통해 처음 등장했다. 다만 이번 웹툰에서와도
같이 ‘타인 = 악한 존재’와
같은 등식은 사르트르의 의도를 오독한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르트르 역시
직접 해명을 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궁금증을 품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르트르는 타인을 지옥이라고 했으며, 웹툰 작가(필명 김용키)는
왜 이러한 문장을 스릴러 웹툰의 제목으로 선정하게 됐을까?
<“타인은 지옥이다” 의 배경 : (1) 사르트르의
문장>
사르트르가 타인을 지옥으로 명명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실존 철학의 단면을 알아야 한다. 사르트르는 세상을 즉자적 존재(사물)와 대자적 존재(인간)로
분류했다. 단순히 한 가지 성질만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은 다르게 인식 될 여지가 없다. 의자는 의자고, 책상은 책상이며,
책은 책이다. 즉자적으로 존재의 양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자적 존재는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사회적인 ‘나’와 가정에서의
‘나’또한 다르다. 내가
어떤 존재인 지에 대한 규정은 정해질 수 없고, 이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무한한 ‘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인은 나를 즉자적(유한적)인 존재로 규정하려 한다. 택시
기사에게 욕설을 퍼붓는 손님은 그를 운전 기사로써 규정 내리고, 초등학교의 교사들은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문제아’로써 규정을 내린다. 이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지옥이다. 인간은 타인이 있는 한 그
시선과 판단을 신경 쓸 수 밖에 없고, 이를 의식하는 한 인간은 완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는 지옥인 것이다.
사르트르 또한 자신의 희곡(출구 없는 방)에 대한 강연에서 이와 같은 오독을 피하기를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 한 바 있다.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타인들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5년 자신의 희곡에 대한 강연 中)
<“타인은 지옥이다” 의 배경 : (2) 웹툰의
제목>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웹툰의 제목이 썩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르트르의 문장에 대한 고전적인 오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예 따로 떨어져,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또 아니다.
스릴러 장르의 특징적 연출이겠지만, 웹툰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속내를 알 수 없다. 폭력적인 날건달
같다가도 오히려 가장 멀쩡한 사람이고, 조금 모자라 보이는 사람 같다가도 섬뜩 하게 칼을 든 채로 주인공을
응시하며, 정 많은 집 주인 같다가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오히려, 대자적 존재를 즉자적 존재로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공포가 아닌, 즉자적으로 그 대상을 파악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즉자적으로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는 대상들을 마주 했을 때의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관찰자인
‘나’는 그들의 극히 일부 모습만을 보기 때문이다.
▲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 속 등장인물들. 하나같이 속내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무한함을 가진 타자는 우리를 즉자적으로 판단하는
존재이자 내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지옥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사르트르만 하더라도 이와는 전혀 상이한
답을 내놓았지만 ‘무한한 타자’에 대해 인상적인 견해를 제시한
철학자가 한 명 더 있다.
<타자의 철학 : 레비나스>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년 1월 12일 ~ 1995년 12월 25일)는 유대계 철학자로, 우리나라에서는 “타자의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레비나스는 젊은 날 온 가족을 나치에게 몰살 당하면서 기존 철학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레비나스의 주장은, 전체주의와 폭력이 비롯되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아닌 타인과 나와의 문제. 즉, 윤리학이 제일철학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무한을 내포하고 있는 소우주이며,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오히려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간격, 분리 된 존재의 상태에 대해
암시한다. 또한 레비나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다만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의 흔적이 발생하는 그 현상에 대해 기술하고자 하였다.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나’는 타인의 총체를 규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 철학은
타인,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dévotion)을 강조하였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마찬가지로 무한하고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지옥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과 책임의식, 우주와 같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결론>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는 대단히
성공한 웹툰이다. 연재 당시에 조회수, 별점 랭킹에 늘 상위권에
등재되어 있었고, 이제 그렇게 드문일은 아니라지만 드라마화까지 체결되어 OCN에서 실사화 방영을 하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타인은 지옥이다>의
성공 비결에는 현대인들의 공포와 불안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험한 세상이고, 온갖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볼 때 그가 악인(惡人)인 지 그냥 평범한 범인(凡人)인
지 유한한 우리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공포는, 어두운 밤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았을 때 보이는
타자의 그림자에서 기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타인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회적 인간을 외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자 무한한 소우주를 내포한 하나의 인격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닌,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주체임을 깨달을 때 타인이라는 지옥을 탈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철학과 2015105001 강귀형.docx
첫댓글 1."기사로써"는 "기사로서"로 바꾸어 써야 합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웹툰 제목을 연상시키는 샤르트르의 말에서 출발하여, 레비나스까지 즉자와 대자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군요. 즉자와 대자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출발한 개념입니다. '즉자'란 사물이 직접 드러난 현상이나 존재, 실체를 가리키며, 대자는 그 실체에 대한 객관화를 통해서 인식되는 행위이자 주체화되는 상태로서 변증법적 지양을 거쳐 개념화된 인식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즉자대자'는 발전하는 존재와 인식에서 그때마다의 최고의 단계이며, 대립의 배제나 은폐가 아니라 대립을 '계기'로서 보존한 상태의 통일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