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 인피니티워를 보고 나서」
빌런의 주장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은 후에 혼자서 그것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영화들을 보았지만 그중 영화를 보고 난 후 꽤나 오랜 시간동안 혼자 생각을 했던 영화가 있다. 인간의 타락에 관해 나온 다크 나이트와 조커, 로봇임에도 더 인간 같은 로봇들이 나오는 A.I, 월e, 바이센테니얼맨 등 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본 후 가장 오랜 시간동안 고민했던 영화는 다름 아닌 마블의 어벤져스:인피니티워 이다.
이 영화는 마블의 10주년 이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껏 나왔던 모든 영웅들이 총집합하여 전우주의 절반을 없애려는 ‘타노스’라는 빌런과 맞서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이 타노스라는 빌런은 전우주의 절반을 없애기 위한 힘을 가지기 위해 ‘인피니티 스톤’이라는 것을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이를 영웅들이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라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오래 생각한 이유는 바로 이 빌런인 타노스 때문이다. 타노스는 전우주의 절반을 없애려고 하지만 절대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타 다른 영화들은 단순히 내가 그들위에 서서 군림하기 위해서, 그들을 죽이는 행위를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주인공의 입장에서의 악행을 저지른다. 타노스는 그의 악행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를 ‘우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주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식량들의 양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인구)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으니 언젠가 자원고갈로 인해 온 우주가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우주의 절반을 없애야 한다고 그리고 그 역할은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자신이 해야만 하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지금까지의 대다수 악당들과 타노스의 차이가 들어난다. 그는 대사를 통해서도 관객들에게 확인시킨다. 그는 이 일을 집행하면서 재미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행위에 일말의 우월감, 선민주의, 사욕 등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종족멸망을 막는 선의의 행동, 전 우주를 살리기 위한 대의적인 활동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그는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은 휴식을 취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오히려 어벤져스 같은 히어로들보다 더 굳은 믿음과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다.
영화를 본 후 리뷰들을 보던 중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 경제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의 토버트 로버트 맬서스이다. 그는 인구 통계학자이자 경제학자로써 인구론이라는 책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 인구론은 간단하게 “식량의 생산속도가 인구수의 증가나 인류가 소비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식량 고갈로 인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아마 감독들은 이 사상을 현대식으로 풀어 만들어낸 인물로 타노스를 내세운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을 더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타노스가 대단한 캐릭터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를 되짚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타노스에게 공감은 하지 못하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영화를 본 후에도 계속해서 혼자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를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치부하고 단순히 타노스가 나쁜 놈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신념과 대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인피니티 스톤 중 하나인 ‘소울 스톤’을 얻기 위한 조건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하는 것을 희생하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던 장면 중 하나로 그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소울스톤을 얻어낸다. 그 소울스톤을 얻어낸 후 자신이 딸을 잃었다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만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일어나 다음 단계로 향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스톤을 다 모은 타노스는 결국 손가락을 튕겨 온 우주의 인구 절반을 소멸시킨다. 손가락을 튕긴 후 조금 놀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타노스는 자신의 제외시킬 수 있음에도 자신 또한 희생당할 각오를 하고 손가락을 튕긴 것이기에 자신이 죽지 않은 것에 놀란 것이라고 한다. 즉 이 인물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기준에서의 대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과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 히어로들이나 시민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음에도 행동 하나하나를 이해하려 하고 존경심을 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이 인물을 단순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걸 보면서 위화감이나 악당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이 인물에 대한 이해심을 넘어 신념을 믿는 순수함에 경이롭기 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대의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자신의 행성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만이 어떻게든 견뎌 살아 남았고 다른 행성들은 자신의 행성과 같은 최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맬서스는 식량의 부족에 중점을 두었다. 맬서스나 그의 인구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고 하면서 자신들은 제외하며 거지나 사회적 가치가 낮은 자들을 숙청하자고 하였다. 더 나아가 빈곤층들은 그대로 죽어나가야 하고 오히려 불결한 생활습관을 권장해 전염병 등으로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위선적이고 매우 차별적인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맬서스와 타노스의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타노스는 자원 고갈의 피해자인 자신의 경험을 중점에 두었다. 또한 성별, 능력, 나이, 신분들을 가리지 않고 말 그대로 무작위로 소멸시키는 심지어 자신까지도 그 확률 안에 넣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의견에 반박하기도 하였다. 인구의 절반을 없앴다 한들 결국은 다시 늘어날 테고 한정되어 있는 자원은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영화를 본 가족들은 인구 수를 절반으로 줄일 힘으로 자원의 수를 늘리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풀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원을 늘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빈부의 격차가 나뉘고 자원을 독점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자원이 늘어난다고 하여 해결이 될까? 나는 인간의 욕망이란 걷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원이 늘어난다고 하여 공평하게 사정에 맞추어 배분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어떻게든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극단적으로는 자원을 놓고 전쟁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생각해보았다. 타노스의 의견에 반대하자면 그는 전우주의 균형과 질서를 추구했다. 그의 뜻과 사상은 고결했다 치더라도 결국 우주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일개 생명체에 불과하고나와 우주의 가치 사이에서 객관적으로 저울질하지 못하며 나의 생존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살기 위한 본능을 모조리 자신이 믿는 ‘구원’의 행위로 말살하는 것은 결국 생존한 사람들에게도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을 남겨주어 제대로 된 생활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자연적인 균형이 무너져 멸망의 길로 더 가까워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반대로 타노스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해보자. 결국은 한정된 자원과 증가하는 인구수로 인해 지구가 멸망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는 죽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또한 꺼려할 것이다. 이때 타노스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그를 단순히 사이코로 치부하고 말까? 오히려 당장의 멸망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하는 인물이라면 ‘나는 아닐꺼야’라고 생각하며 내가 꺼려하고 힘들어했던 일을 대신 하는 이를 그 순간만큼은 구원자라고 여기지 않을까? 정말 50%가 사라짐으로서 생존한 나머지의 생명체들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다른 이들을 죽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다면 멸망을 앞둔 우리는 그 행위를 앞장서 말릴 수 있을까?
현재의 지구 또한 인구의 증가, 자원의 고갈과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화에선 매우 극단적인 모습으로 이를 해결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러한 방법을 현실에서 쓰면 안된다. 하지만 우리 또한 인구의 증가,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도 앞서 언급했던 문제들과 이를 돌파할 타개책에 대해서, 그리고 두 입장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첫댓글 1.빌런(villain)이 악당을 가리킨다는 것은 자기소외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본래 영국의 봉건제도 하에서 장원 농민의 중핵을 이룬 예속농민[Villein]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 악당이었다가 이제 어떤 가치, 의미에 집중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빌런의 주장이 어딘가 부족하고,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무한증식하는 인류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기 위해 절반을 죽인다는 주장은 물론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