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 집착의 끝과 선택
오늘 선우의 공판이 있는날이었다.
지난 3개월동안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사건이다 보니 법정안밖은 벌써 취재차 온 기자들로 인산인해였다.
현서 자신도 증인의 한명으로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진운이 떠나고 난 5년의 시간도안 자신에게 많은 힘이되어준 사람이었다.
그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 수 없었기에 그가 저토록 뒤틀린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것을 현서도 알고 있다.
곁에 두면서 사랑하지 않고 버려둔 책임을 피하고 싶지 않아 현서는 선우를 위해 증인석에 앉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어제 진운에게 가서 허락을 받았다. 결과는 안 좋게 끝났지만 자신과 동온을 그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보살펴 준 사람이니 용서하자고 그래달라고...
재판은 장래가 촉망되던 서울지법의 박선우차장검사의 몰락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진 그의 무서운 집착의 결말을 세상에 알려주고 끝이났다.
피해자의 아버지인 하변호사가 선처를 원했고 증인으로 참석한 현서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기에 과실치상죄로 집행유예 2년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검사직을 유지할 수 없어 그만두고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지어졌다.
떠나는 날 선우가 진운의 병실로 찾아온 것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물론 현서도 놀라긴 했지만 선우를 마지막으로 환송해 주었다.
“현서씨 내가 한 짓들 용서할 수 없었을텐데.... 이렇게 날 용서하고 도와준 일 잊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잊지 못할꺼예요. 현서씨와 동온이... 그애의 어린시절을 잠시나마 같이 할수있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건강해요. 그리고 저사람 꼭 일어날꺼예요.
현서씨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알테니...
내가 저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저사람은 알까요? 자신이 어떤행운을 가진사람인지.....”
그렇게 선우가 떠남으로써 현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한사람이 또 사라졌다.
그만큼 현서는 더 외로워 진우의 곁에 앉아 많이 울었다.
선우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많은 의지를 했었다는 걸 선우가 떠나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진운을 먼저 만나 마음을 빼앗기자 않았더라면 어쩜 선우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현서는 진운의 손을 잡고 잠깐 눈을 붙였다.
“현서야.. 그만 들어가봐 벌써 삼개월이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매일 이러고 있음 네몸도 버티지 못해... 얘기 들어보니 몇 년가는 사람도 있다던데... 우리 천천히 가자 응?”
“예 그럴께요.. 천천히 해요. 우리 진운씨가 자고 일어나서 피곤에 절어있는 모습보고 또 도망가면 안돼니까...”
“ 그래 그러니까 좀 쉬어 내일은 주말이니까 동온이데리고 놀러도 가고 그래... 응 ?”
“ 네 그럴께요 그럼 내일도 언니만 믿을께요..”
진운의 병원을 나온 현서는 어두운 밤거리를 한참 걸었다.
미령의 말처럼 이싸움이 자신의 경우처럼 3년이 될수도 있고 어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수 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모와 그고모처럼 결혼 후 남편을 여윈 이씨가문의 여자들 처럼 현서의 남은 평생을 진운없이 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현서가 갑자기 아버지 이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논 할 일이 있으니 빨리 들어와 달라고....
딸의 결연한 목소리를 듣고 집으로 들어오는 이교수는 딸이 오늘 무언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의 준비는 벌써하고 있었으나 받아들이기가 힘들것 같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자시신의 딸 현서는 진운의 곁으로 가려고 할 것이다.
지난 27년동안 하루도 진운 없는 세상을 살아본적 없는 딸이었다.
10살 어린소녀가 사랑한 그녀의 남자는 그녀가 살아온 세월동안 큰 산이 되어 이젠 그녀가 그를 향해 움직인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젊은시절 이교수의 누나가 그의 자형을 선택하던날 그날도 오늘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기류같은 것을 느끼며 누나를 보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뼈만 앙상히 남아 정신조차 놓고 돌아온 누나가 그래도 행복해보였던것을 이교수는 알고 있었다.
정말 사랑이라고 불리는 놈의 그 끝없는 힘을 이교수는 이미 경험한바 있기에 자신의 딸인 현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거기다 이미 둘사이에 동온이라는 연결고리까지 있으니 말리 수도 없는 일임을 탄식하며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한켠에서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현서가 내린 결정이 어떤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했던대로 담담히 진운과 혼인신고를 하겠다며 허락해 달라고 말하는 딸애를 이교수는 그저 묵묵히 안아 주었다.
이제 딸아이의 27년의 사랑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던 지금 이현실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음을 알고 있는 이교수였다.
“이 아비가 하변호사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마.
네 상각이 그렇더라도 그집안 어른 생각은 다를 수도 있으니 어른들끼리 만나 좋은쪽으로 결정되도록 해보마.
그러니 그때까지만 경거망동하지말고 기다려라.
이아비 마지막 부탁은 이것 뿐이다 . 들어 줄 수 있지?”
“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드려요. 제 생각을 아버님께 잘 전해주세요. 기다릴께요...”
의연히 말하고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가는 현서를 바라보며 이교수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진운의 아버지 하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만나자고 약속을 한뒤 서럽게 우는 아내의 등을 두들겨주고 일어나 서재로 들어갔다.
“난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사람과 2년을 살았으니 그것으로 됐다.
그사람 닮은 아이하나 있었으면 더 행복했을텐데 그래도 그사람이 온전히 내것이었다는 것에 남은 내 평생 행복할 수 있어.. ..
그러니 날 걱정하지마. 사랑은 그런거야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고 전부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거야. 난 2년동안 200년동안 받을 사랑을 받았으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야...”
누나가 그렇게 얘기할 때 이교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에, 외로움에 지쳐 누나가 정신을 놓고 고로워할 때 더욱 더 그집안 사람들이 미웠고 현서가 진운이랑 결혼하겠다며 대학 3학년 봄 진운을 소개했던 그날, 또 다시 사랑스런 딸을 그 가문에 주어 고통속에 살게 하고싶지 않아 진운에게 모진 말과 가문끼리의 얽힌 비운을 들려주었다.
그날 저녁 .
술에취한 진운이 현서를 불러내 사고가 일어났을때 현서가 다시는 깨어 날 수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래도 그집에 시집가 청상과부가 되는것 보단 나을 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현서를 죽은아이로 만들면서까지 진운을 떼어놓았다.
물론, 진운의 아버지도 대찬성이었었다. 그런데 세월이 15년이나 흘러 또다시 그때와 같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하고 보니 사람의 의지로 안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하늘의 뜻에 맡겨보기로 했다.
저토록 딸아기가 놓지 못하는 사랑이니 그 결말도 그 아이가 선택해서 받아들이는게 오히려 나을것 같았다.
양쪽집안 모두 두아이들의 끈질긴 사랑에 손을 들어 중환자실 병상에 누운 진운과 말간 얼굴의 현서가 담당의사의 허락을 얻어 결혼식을 병실에서 했다.
신부님의 혼인선언이 있고 눈물를 훔치며 어른들이 나간 병실에 현서는 하얀 드레스자락을 곱게 접으며 진운 곁에 나란히 누웠다.
그의 약지에는 현서가 끼운 그의 어머니 유품인 반지 한쌍이 끼여져 있었다.
“선배.. 아니다 이젠 이렇게 부름 안되겠지... 여보 우리 오늘이 신혼첫날밤인거 알아?
옛날 우리 결혼하면 신혼여행 내내 나를 안고 호텔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노래를 부른사람이 당신이잖아.
그런데, 뭐야! 이렇게 곁에 누우있어도 손도 잡아주지 않고 사랑이 식었나봐... 바보 ”
현서와 진운의 첫날밤은 그렇게 현서의 눈물로 시트를 적시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