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37만 7915㎢)............
일본열도와 홋카이도[北海島]·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네 섬과 이즈제도
오가사와라제도 [小笠原諸島]·류큐열도로 구성.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하고, 영어로는 ‘Japan’
수도 도쿄. 인구 1억 2691만 9659명(2015년 현재)
대부분이 아시아몽고인종에 속하고,
원주민 아이누설· 코로포크설이 있으나,
일본석기시대인이 일본인 조상이라는 설.
.
동경어를 기반으로 하는 표준어 사용.
지역마다 방언이 있어 언어차이가 극심.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정치 마감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제도 확립,
근대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
1889년 제국헌법을 공포하여, 입헌군주제 기틀 마련.
1890년 7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의회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승리.
대만과 남사할린을 차지하고, 1910년 조선 침탈.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강점,
1932년 상해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40년 독일 및 이탈리아와 3국동맹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과 싸웠다.
1941년 12월 진주만을 습격,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한때 동남아 일대와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점령하나,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
.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군점령지 일본은 급격한 변화.
1947년 5월 3일 전쟁을 부인하는 평화헌법을 공포.
천황을 상징화 하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밝혔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및 비공산권
49개국과 강화조약을 맺어 1952년 4월 주권을 회복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 미국과의 유대를 굳혔다.
1956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일본경제는 종전 후 경제기반의 파괴와
악성 인플레이션, 해외귀환자 등으로 침체.
.
그러나 미군정하의 재벌해체, 농지개혁
등의 개혁으로 경제기반이 재건되었으며,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경기와 특별수요,
미국의 민간경제원조에 힘입어 부흥, 재건을 한다.
그뒤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국제사회 지위 확립.
미국·유럽공동체와 함께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다.
2015년 국민총생산은 4조 1233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2481 달러 기록.
2015년 수출 5735억 $, 수입 5983억 달러.
.
1947년 개정된 「교육기본법」에 의하여 6·3·3·4제.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취학률은 99% 이상이다.
고교진학률도 70% 이상에 달하며 교육열이 높은 편.
.
일본인은 두 가지 이상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다.
1999년 현재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은 불교가 48.2%,
신사(神社) 중심으로.,신사신도(神社神道) 51.2% 등.
.....................................................................
일본은 우리 겨레와 역사의 천년 숙안(宿案)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 지리적 관계에서 연유.
.
일본적인 것은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앞으로 수세대를 통하여 우리 겨레의 중요한 문제가
한일관계라는 것을 달관하고, 올바른 한일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지나온 한일관계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신석기시대 일본열도의 최초의 문화는
그 토기의 문양과 모양에 따라 조몬식토기
[繩文式土器]의 문화, 줄여서 조몬문화라 한다.
조몬문화는 기원전 3세기∼2세기경까지
유적·유물은 일본열도 각지에서 출토된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어렵채집경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금속기의 발명도 없었다.
한반도는 중국 및 북방계통 청동기문명 영향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는 농경 및 철기 사용이 시작되고
그 철기문명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퍼져간 것이다.
한편,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로부터
북구주(北九州) 해안지대에 조몬토기와는
계통이 다르며 그보다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를 사용하여 도작(稻作)과 금속기를 이용.
.
이 문화는 그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지역 이름을 따서 야요이문화라 한다.
야요이문화는 우리나라의 문화,
비중국적인 북방계 청동기문화와
중국 계통의 철기문명이 전래된 것.
이로써 고대일본 문화는 비약적 발달.
이와 같이, 역사의 시작부터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문화 전수자적 위치였다.
수천 년에 걸쳐서 대한해협은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문명 통로.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 의하면,
변진에서는 철이 특산이어서 마한·진한·예·왜가 모두
물건살 때 철을 사용한 것이 중국에서 돈쓰는 것과 같다.
삼국시대 삼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
특히 백제문화의 동전(東傳)은 현저하였으니,
4c 말 근초고왕 때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
등은 처음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후진적인 일본이 한자를 쓰는 유교권에 들게 했다.
성왕 때인 552년 불경과 불상을 보낸 것이
오늘날 일본불교의 시작이었으니 이른바
일본문화의 양대 지주는 백제문화를 옮긴 것.
그 뒤에도 백제의 많은 예술가·기술자·승려들이
일본에 건너가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7세기에는
이러한 현상의 최종열차라 할 만한 대이동이 있었다.
백제멸망 때, 백제인들이
거의 한 나라가 이사를 하듯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한 것.
그 중 한자문명을 풍부하게 지닌 지식인도 많아
이주하자마자 문부대신, 관리가 된 사람도 많았다.
.
통일신라시대에도 관계가 지속되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 시대에
동해를 엿보는 왜적이 유일한 근심거리였다.
문무왕은 국태민안을 기원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고자
동해 대왕암(大王巖)에 묻힌 것.
대왕암은 문무왕의 웅지이며
왕년의 한일관계를 대변해주는
세계 유일의 해중릉(海中陵)이다.
대왕암 수중릉
대왕암 일출
대마도
............해동제국기............
1471년(성종 2) 신숙주(申叔舟)
일본의 지세(地勢)와 국정(國情),
교빙내왕(交聘來往)의 연혁, 사신관대
예접(使臣館待禮接) 절목(節目)을 기록.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명에 따라 찬진.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구주 및 대마도·
이키도(壹岐島)와 유구국(琉球國)를 총칭하는 말.
찬술 당시의 내용은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의 본국도(本國圖)·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
이키도도(壹岐島圖)·대마도도(對馬島圖)·류큐국도(琉球國圖)
일본국기(日本國紀)·유구국기(琉球國紀)·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그뒤 2, 3편의 추록(追錄)이 첨가되어
1473년 전산전 부관인 양심조 궤향일 정서계
(畠山殿副官人良心曹饋餉日呈書契)가 권말에 부록.
이듬해 3월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삼포왜호(三浦倭戶)의 실화(失火)를
진휼할 때 왕명을 받들어 삼포 지도 모사.
또 항거왜인(恒居倭人)의 호구조사.
웅천제포도(熊川薺浦圖)·동래부산포도.
(東萊釜山浦圖)·울산염포도(蔚山鹽浦圖)
3매가 권두의 지도에 첨가, 삽입되었다.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왕년(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 대한
후세의 궤범(軌範)을 만들기 위해 찬술한 것이다. 따라서
추록된 부분도 연산군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첨가.
조선 초기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 가장 정확한 근본적인 사료.
일본에서도.,에도시대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
.....................................................................
신숙주는 해동제국을 다녀올때
한 여인과 함께 귀국을 했었는데
그녀는 게이샤(芸者)로 추정된다.
기록 상, 그녀는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일본 여성(신숙주의 첩).
게이샤는 일본 에도시대 조닌문화 중 하나,
음악, 무용 등에 능통했던 일본의 전통 기생.
게이샤는 일본요정이나 연회석에서 술을 따르고
전통적인 춤이나 노래로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역할.
"게이샤"라는 단어는 일본 한자로
예술을 의미하는 芸(게이) +者(샤)
교토
교토 청수사 가는 길.
오사카
조선 전기.,조선통신사
게이샤(藝者, geisha)는 예술을 의미하는 芸(게이)
사람을 뜻하는 者(샤)로 '예술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게이샤는 전통적으로 일본인에게 존경을 받아왔고,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게이코(게이샤)"는 교토에서 만들어져 사용되는 말이다.
견습 게이샤는 '마이코',
이는 춤을 의미하는 舞(마이)와
아이를 뜻하는 妓(코)가 합쳐진 단어.
흰 화장과 화려한 기모노를
차려서 입고 있다면.,마이코.
단순한 기모노에 화장도 특별한 때만 하면.,게이샤.
일본 에도 시대의 조닌 문화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로
음악, 무용 등에 능통한 일본의 전통적인 기생이.,게이샤.
옛날에는 남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지만
요즘에는 사업상 파티나 요정에서 술자리 흥을 돋우는 역할.
게이샤는 문자 그대로 '예술인'을 뜻하는 말이며
노래, 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이샤가 인기높다.
화술만 뛰어난 경우가 일반적이며 그들의 본래 역할은
세련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으로서, 아름다운 옷차림
예절 바른 태도를 갖추고, 동서고금 멋진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
게이샤들의 생활에서 풍기는 화려함을 동경해
자진해서 이 일을 시작하는 여자들도 있었겠지만
가불금에 따라 연한을 정하는 인신매매제도가 근간.
부모가 나이 어린 딸을 유곽에 팔면,
그곳에서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몇년 동안
게이샤로서 필요한 교육과 예능을 전수받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화류계에 진출하여
그동안 생활비와 몸값을 갚으려 돈벌기 시작.
가무가 서투른 게이샤들은 벌이가 신통하지 않지만
유명 게이샤들은 혼자 한번 춤 춰도 많은 돈을 받는다.
.
게이샤들은 종종 극단과 공연도 했는데,
여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쓰여지기도 했고
실제 남자 배우와 결혼하는 게이샤도 많았다.
결혼을 하면 게이샤는 현직에서 물러나며
결혼하지 않은 경우 유곽의 주인이 되거나
어린 게이샤들에게 춤이나 악기를 가르쳤다.
일본 문학에서는 게이샤가 남녀의 애정이나
상인(商人)의 생활이 주요 소재로 이용되었으며
대중 연극 가부키, 가면극 노가쿠가 크게 유행하였다.
인기 있는 게이샤나 배우, 또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그림인 우키요에 등은 조닌 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
이외에도 정원 장식이나 도자기 등 일본 고유의 예술로 발전.
다른 도시에도 게이샤가 있지만 교토와는 많이 다르다.
도쿄에서는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 6개월~ 1년쯤 소요.
도쿄의 견습 게이샤는 "한교쿠" (半玉),
또는 술 접대부라는 뜻의 "오샤쿠" (御酌)
도쿄 게이샤는 교토 게이코보다 나이가 많다.
현대 게이샤는 "하나마치" (花街, 꽃마을)
"오키야"라는 전통 게이샤 저택에서 생활.
그러나, 성공한 게이샤들은 자기 집을 소유.
게이샤가 속하는 고상한 세계를
"카류카이" (花柳界)라고 부른다.
유명한 게이샤 이와사키 미네코는 이 용어에 대해
"게이샤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자신의 길을 지녔고,
버드나무처럼 공손하고 나긋나긋하며 강인하다." 설명.
.........................
.........................
집집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일본.
공중질서 지키기는 세계에서 No 1.
남편이 친구와 새벽 3시까지 집에서 바둑을 두면,
그 옆에서 밤새 무릎 꿇고 시중드는 일본의 여인들.
세계 제2차대전이 패색으로 기울 때,
거침없이 치마 폭에 어린 것들을 안고
절벽을 뛰어내려 옥쇄한 일본의 여인들.
日本人의 성씨 족보의 유래를 살펴본 바로는,
일본 여자는 성인이 되면, 아이를 생산하기 위해
등에 담요를 매고, 속옷은 입지 않는 기모노 옷차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랜 내전으로 남자들이 너무 많이 전쟁에서 죽자
천황(天皇)이 일본의 모든 여자들에게 내린.,명(命).
천황(天皇)의 명을 따르는 것이
곧, 일본에서는 애국(愛國)정신.
그 바람에 다행이도 전장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어떤 여자이든 합의하면, 수태의 특권(特權)을 부여.
그 결과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이름을 지을 때는
그곳이 전래되어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의 姓이 되었단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성씨가 많은 나라.
일본에는 살제로 10만 성씨(姓氏)가 넘는다.
1.木下(기노시타) - 나무 밑에서
2.山本(야마모토): - 산 속에서 만난 남자.
3.竹田(다케다); - 대나무 밭에서.
4.大竹(오타케): - 큰 대나무 밑에서.
5.太田(오타): -콩밭에서.
6.村井(무라이): - 시골 동네 우물가에서.
7.山野(야마노): - 산인지 들판인지 가물가물..
8.川邊(가와베): - 끝내고 보니 개천이 보여서.
9.森永(모리나가): - 숲속에서 오랜동안 만난 뒤 잉태.
10.麥田(무기타): - 보리밭에서.
11.池尻(이케지리): - 도랑옆에서.
12.市場(이치바): - 시장(공방)에서.
13犬塚(이누즈카): - 개무덤에서.
14.田中(다나까): - 밭 한가운데.
15.內海(우츠미); - 가까운바다에서~
16. 奧寺(오쿠테라): - 절에서~(카도야 : 코너)
17.柏木(카시와키): - 측백나무 아래서~
18.桐本(키리모토): - 오동나무 아래서.
19.小島(코지마): - 작은 섬에서.
20.小林(코바야시): - 작은 숲에서.
21.笹森(사사모리): - 조릿대 숲에서.
22.高柳(타카야기): - 버드나무 아래서.
23.皆川(미나가와); - 개천가에서.
24.水上(미나카미): - 물 위에서(온천).
특히, 밭 전(田) 字가 많은 것은
논에서는 곤란하니, 주로 밭에서
많이 愛國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 절대적인 애국정신의 뒤에는
천황을 축으로 하나가 되는., 민족성.
사카모토 료마(1836~1867) 사무라이 정신.
'사무라이 정신'은 막부로부터 명치유신을
일본에게 선사한 위대한 정신으로 자리매김.
게이샤 문화와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의 쌍벽.
교토 게이샤 거리
게이샤(藝者, geisha)
게이샤(일본어 芸者), 게이기 (일본어 芸妓).
예능에 종사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생이다.
게이샤는 나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
이들은 전통 음악 연주, 전통 무용 공연,
作詩와 같은 여러 가지 일본 예술에 능숙.
단순한 매춘부는 아니였지만, 요정이나 여관에 호출되어
시간을 정해 고객의 이야기 상대를 해주거나 노래나 춤으로
흥을 돋구는 일을 하고, 성매매를 하기도 하는.,'예술의 달인.'
"게이샤(芸者)" 일본 한자로는 '예술'을 뜻하는.,芸 (게이).
者(샤)는 남성이고, "게이기(芸妓)"에서 "기(妓)"는 여성이다.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힘든 수련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게이샤는 입문하여
수련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정식 '게이샤'의 길을 가기도 어렵다.
항상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높은 베개로 목을 받치고 잠 자야 한다.
만 6세 6개월 6일에 입문하여
게이샤 대모 아래, 10년간 수련 기간.
납 중독으로 사망에까지 이르는.,흰 화장.
'나이팅게일 분비물'로 만든 분.
목덜미를 하얗게 칠하는 분 단장.
TV를 보아서도 안 되고,
친구를 불러 와도 안 되며,
남자 친구와는 만날 수 없다.
이러한, 10년간 수련과정이 끝나야
재능이 있는 게이샤로 인정 받게 되며
게이샤가 되어야, 술자리에 나가게 된다.
게이샤는 고객들에게 최고의 전통음악과
춤, 맛좋은 음식, 술, 재치 있고 세련된 대화로
향연 분위기를 즐겁고 우아하게 이끄는 역활을 담당.
.
게이샤는 만 20세가 되어야
후견인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도나산(남주인)을 선택.
도나산은 대개 재벌이거나 정치가.
물론, 그들은 유부남이고, 게이샤에게는
매월 수백만원~수천만원 경제적으로 후원자.
그대신에 도나산이 원할 때마다
게이샤는 성 관계를 갖어야 한다.
.
도나산과 게이샤가 연인이 되는 방식도 특이하다.
서로 마음이 맞아 결합을 갖게 되는 의식., ‘미주아게’
도나산과 게이샤의 미주아게 의식은 7일 동안 계속된다.
첫날밤, 날 달걀 세 개가 있는 침실에 드는데,
도나산은 그 달걀을 깨서 노른자는 자신이 먹고,
흰자위는 게이샤의 허벅지에 발라주고나서.,성 관계.
이렇게 게이샤가 되기까지 힘든 과정을 겪고
도나산 유부남의 첩으로 살아야 하는 게이샤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게이샤를 존경한다.
게이샤가 기생이란 개념보다는 연예인이라는., 경외심.
한때, 게이샤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때가 있었다.
1989년, '일본의 수상' 우노와 게이샤와 스캔들 사건이 그것.
평생 우노의 정부(情婦)로서 살아왔던.,게이샤.
어느날, 일본의 수상 우노가 그녀를 등한시하자
매스컴에 우노와 자신이 내연 관계임을 폭로한 것.
이 사건으로 우노는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정치가와 게이샤의 스캔들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것은 매스컴의 흥미거리로 등장하다가.,흐지부지.
그러나, 이 사건은 달랐던듯 하다.
상대방이 평범한 보통 여성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는 신비스러운 존재.,게이샤.
그래서, 대중은 '게이샤 스타'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게이샤 만이 갖고 있는 품위, 품격 같은 것에 경외심을 갖기에
이 사건은 매스컴을 통하여 일본 국민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게이샤를 무참하게 버린.,수상의 비인간성.
일본 국민들은 대대적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
'일본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본토에 진주한 미군 병사들을 통하여
폐허 일본을 재건한 애국자로 인식한걸까?'
'아니면, 일반 일본인들이 정치인 보다
게이샤를 대중적인 스타로 여겼던걸까?
일본인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겼던걸까?'
게이샤는 일반 대중에게는
예술인이자 인기 높은 연예인.
일반인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
그래서, 그당시 게이샤는
일반인들에게 경외의 대상.
본디, 게이샤는 남성, 게이코는 여성.,연예인.
'게이코(芸子)'는 게이샤를 달리 부르는 말인데,
이는 교토에서 통용되고, 교토에서 만 쓰이는 호칭.
교토(京都)는 794년 일본의 수도., 헤이안(平安京).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와 문화'.,중심지.
6~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에서 도래인들이 정착.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
일본 천황은 불교권 영역에서 먼 곳으로 수도를 이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교토 소사대(京都所司代)를 두어 교토를 다스렸다.
교토는 에도, 오사카와 더불어 3도(三都)라 불리운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 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 이상 수도로서 지위를 상실하였고
문화 도시로 바뀌었지만, 천황 즉위식은 교토에서 거행.
교토는 길고도 영향력 있는
'게이샤' 전통을 간직한 도시.
교토에서 게이샤, 게이코가 되려면,
5년 이상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견습생 게이샤 마이코(舞妓)는
舞 (마이), 妓 (코).,춤추는 아이.
게이샤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떠올리는 흰 화장과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 기모노 차림.,'마이코'의 모습.
단색 기모노를 입고 화장도 특별한 때만 하얗게 칠한다.
교토.,마이코.
다른 도시에도 게이샤가 있지만 교토와는 많이 다르다.
도쿄에서 정식 게이샤가 되려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소요.
도쿄 견습 게이샤는 "한교쿠" (半玉), "오샤쿠" (御酌 : 접대부).
도쿄 게이샤들의.,시가 행진.
도쿄 게이샤는 교토 게이코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까지 하나마치(花街, 꽃마을), "오키야" 저택에서 생활.
그러나, 성공한 게이샤 대부분 '자신의 집' 요정(料亭)을 소유.
일본의 게이샤 세계는.,"카류카이(花柳界, 화류계)".
"게이샤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자신의 길을 지녔고,
버드나무처럼 공손 나긋하며 강인."- 미네코 이와사키-
1800년 경, 게이샤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게이샤 등장 전 헤이안 시대 (794년~1185년)부터
예능인 여성은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교토 야나기초'에 유곽을 건립.
이 유곽은 후에 '시마바라'로 이전.
예술 향유, 음주, 고급 매춘이 이루어졌다.
유곽의 오이란들은 비싼 화대를 받고 매춘.
많은 예능인들 또한 같은 장소에서 일하였다.
음악, 무용, 작시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예능인들.
게이샤(예능인), 호칸(어릿광대), 다이코모치(고수).
다른 일본 문화처럼 매춘의 세계도 매우 복잡해져갔다.
유곽의 '오이란'과 함께 하고 싶은 남자들은
모두 까다로운 의식과 예법을 따라야 하였고,
매우 부유하거나 귀족층 사람 만이 이것이 가능.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찻집 (오차야)이
시마바라 근처에 생겼다.
여성들이 저렴하게 매춘하는 일부 찻집., "산차조로"
그러나, "오도로키" 여성들은 무용가와 연주가로 활동.
'단단하고 딱딱한 복숭아'의 대명사.,오도로키.
"오도로키" 여성은 등장한지 얼마되지 않아 대중화되고,
시마바라에서 일하는 남성 예술가처럼 "게이샤"라 불리운다.
1700년경 게이샤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다.
몇 년 후에는 거의 모든 게이샤가 여성으로 이루어졌다.
조정에서는 게이샤들의 매춘부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
"게이샤"는 전문 예능인으로만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당시 제정된 법 중에는 오비 (帯, 사시)를 뒤로 묶어
기모노를 쉽게 벗는 것이 어렵도록 하는 법도 있었다.
머리모양, 화장, 기모노 또한 오이란보다 단순해야 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몸이 아닌
예술 행위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
이후, 게이샤는 '오이란'보다 인기인.
1750년이 되면서.,오이란은 사라졌다.
유곽.,오이란.
'에도 시대 대표적인 유곽' 요시와라., 유녀(遊女)
그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유녀 호칭이.,오이란(花魁)
오이란 주위에서 잡일을 도맡아 하는.,가무로(禿, かむろ).
관 또는 유곽에서 관리하는
게이샤, 예능기인(藝能妓人)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오이란(花魁).
오이란을 돌보아주는 상급 유녀가.,아네붕.
'오이란' 유녀가 성장하면.,'후리소데 신조'.
어린 보조유녀의 선생 또는 관리인이 된다.
'유녀들 중에서 꽃 중의 꽃.,'오이란'.
에도시대 오이란은 15,16세.,어린 유녀.
교토 & 오사카., 다유(太夫)에 해당된다.
'최상급 유녀.'.,오이란(花魁).
교토와 다른 도시에서는 새로운 게이샤 마을이 생겨났다.
19세기 게이샤는 일반 여성보다 나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빈민들이 딸을 하나마치 찻집으로 팔아 넘겼다.
단나(후원자)로 불리는 부유한 남성이
개인적으로 게이샤에게 많은 돈을 지불.
게이샤가 예술의 달인이 될 때까지.,스폰서.
게이샤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단나'를 두어 지출을 충당.
처녀성 경매 '미즈아게'를 치르기도 했다.
게이샤에 대한 평판과 존중은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면서 상승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이샤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소녀들이 찻집에 팔리는 일이 없어졌고,
게이샤의 처녀성이 팔리는 일도 사라졌다.
이때부터 게이샤를 희망하는
여성 만 게이샤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게이샤 활동무대 대부분은
교토 (기온 하나마치) & 도쿄 하나마치.
두 지역 외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920년에는 8만명이 넘는 게이샤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이보다 훨씬 적은 수만이 남아있다.
일본 내 게이샤 감소 주요 원인은 서양문화의 유입.
오늘날, 게이샤의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1,000명에서 2,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한 게이샤 또는 '마이코' 분장 배우 등.
게이샤가 되고자 하는 어린 여성은
보통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후
수련에 들어가며, 활동은 어른이 된후 시작
게이샤는 전통 가요와 샤미센, 샤쿠하치, 전통 악기
연주, 일본 전통 무용, 다도, 문학, 작시 등을 배운다.
견습생은 또한 다른 게이샤의 감독 아래 복장, 화장,
고객과의 거래처럼 까다로운 예도 숙련을 쌓아야 한다.
게이샤는 행사나 연회 같은 모임을 위해 고용되기도 한다.
보통 찻집이나 전통 일본 식당에서의 모임.
향을 태워서 고용 시간을 재어 돈을 받는데,
센코다이(선향대).또는 교쿠다이(玉代, 옥대).
교토에서는 "오하나" (お花, 꽃),
"하나다이" (花代, 화대)로 부른다.
고객은 게이샤 조합 (検番, 겐반)을 통해
게이샤 출장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조합은 스케줄, 접대와 수련 일정을 관리.
전통적으로 게이샤는 어린 나이부터 수련을 시작.
과거에는 어린 나이에 팔려온 소녀들도 있었지만,
평판이 좋은 하나마치에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게이샤의 딸은
게이샤로 대를 이어
전통을 잇는 경우가 많았다.
수련의 처음 단계는 "시코미"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소녀가 처음 오키야 (찻집)에 오면,
하녀로 시작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이 일은 고되었기에
이 단계에서 수행 과정을
그만두는 소녀들도 많았다.
저택의 연소자 시코미 대부분은
연장자 게이샤가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또는 새벽까지 기다려야했다.
이 수련 단계 동안 시코미는
하나마치 게이샤 학교에서 수업
지금도 이 단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에 비해 힘들지는 않지만
시코미는 "카류카이" (화류계)의
전통과 복장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게이샤 예술을 완벽히 숙달하고
마지막으로 고난도의 무용 시험을 통과한
견습생은 수련의 두 번째 단계인 "미나라이"로 진급.
미나라이부터는 더 이상 가사 노동을 하지 않았다.
이 단계는 지금도 존재하는데, 옛날보다 기간이 짧다.
초보자 '미나라이'는 한달간 현장에 직접 참여하여 배운다.
이들은 연회에 참석하지만 직업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고,
단순히 앉아서 오네상 (언니)에게 배움을 받거나 지켜본다.
수련단계 미나라이 의상은 전문인 마이코 의상보다 화려하다.
한달간 미나라이 수습 기간이 끝난 후에,
세번째 단계인 "마이코" 수련과정을 시작한다.
마이코는 견습 게이샤로, 수련의 마지막 단계이다.
마이코는 연장자 게이샤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이들이 공연을 할 때는 수행을 하기 위하여 따라간다.
오네상과 이모토상 (언니와 동생)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오니상은 하나마치에서
게이샤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이코에게 전수하는데, 차를 내오는 법,
샤미센 연주, 무용, 예술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마이코는 얼굴에 하얀 분을 두껍게 칠하고,
화려한 머리 장식에, 언제나 입술을 칠한다.
기모노와 오비는 정식 게이샤들이 입는 것에 비하여
다양한 색상이 들어가며, 화려한 무늬도 수놓아져 있다.
미나라이, 마이코는 연회 참석 때 많은 화대를 받을 수 없다.
여섯 달 (도쿄), 5년 (교토) 수련 후,
마이코는 정식 게이샤로 승격하게 되며,
일한 시간 만큼 화대를 지급 받을 수 있다.
게이샤는 색상 적은 기모노를 입으며,
마이코일 때보다는 성숙해졌기 때문에
일을 하거나 무용을 할 때만 화장을 한다.
아울러, 자연미 돋보이는 단순한 스타일을 고수.
게이샤는 보통 은퇴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한다.
1930년대까지 일본 유흥업계의 꽃이었던 게이샤
그후, 버블경제 붕괴로 현재 수백 명이 남았을 뿐.
'견습생 게이샤' 마이코 기모노 한벌값은 수백만 엔.
마이코를 게이샤로 키워내는 비용만 해도.,1억엔.
게다가 게이샤 접대 비용과 음식과 음료 비용은 별도.
결국, 첫날밤 술자리 한번까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교토에서는 게이샤가 번창하고 있고
게이샤가 되길 원하는 여성들이 교토로 몰려든다.
'꽃의 거리' 하나마치는 '교토.,전통 유흥가' 대명사.
하나마치는 도쿄에도, 오사카에도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의 하나마치는 이미 쇠락,
교토의 '하나마치' 만이 명소로 남아 있다.
게이샤의 가장 중요한 능력.,자모치(흥 돋우기).
마이코는 수련 기간 동안 선배 게이샤에게 배운다.
또한, 교토 하나마치는 후불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즐거운 연회 자리를 이제 막 파한 고객에게
계산서를 내미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용 후지급 과정에서 고객을 한 번 더 만나게 되고,
무엇이 불편했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알게 됨은 물론
신용도가 높은 고객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것이 생존 비결.
덧 말.
일본의 게이샤 문화.
신라 화랑에서 유래된 것일까?
백제 또는 가야에서 유래된 것일까?
'고구려, 백제, 일본'
삼국 창업 여제.,소서노.
부여가 고구려로 통합되기 전까지
부여는 오늘날 러시아 땅 중남부에서
그 세력이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었다.
당시 쓸만한 땅은 고구려에게 모두 빼앗겼다.
고구려로 인하여 만주일대에서 존재하던 왕국 및
부족국가들이 고구려로 합병되어 식민통치를 받았다.
고구려의 지배 정책은 굉장히 포용적인 것으로
현지인 등용 체제를 도입해 식민통치 제도를 실시.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위해 타국을 침공하여
그들이 항복할 경우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순응
고구려 피지배민(노예, 종, 하급 관리) 신분이지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었고 고구려가 방위를 책임졌기에
고구려를 제외한 외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복 않고 저항하는 국가의 말로는 처참했다.
고구려군의 창칼 아래 모두 무참히 쓰러져 죽어간 것.
이렇게 만주와 중국 서부, 몽골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
대륙의 쓸만한 땅은 모두 장악한 후, 해양 진출까지 도모.
그러기 위해서, 신라, 가야는 물론, 무역국 일본 정벌도 강행.
당시 문명이 미개했던 왜인은 "수탉을 무찌르자"며
반수탉 결사대를 조직해 고구려군들의 침공에 대항.
끝내 고구려가 노린 북부 열도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에 의해 북부 열도에서 쫓겨난 왜인은
왜 열도 중남부의 자치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왜에 침공해 오기 전부터
왜열도 중북부와 중부, 남부는 거의 백제 지배 하.
삼국에서 가장 먼저 왜를 식민지화한 국가는.,백제.
왜인에게 선진문화 전파 구실로 국방 해지를 요구.
백제 수군이 손쉽게 왜열도를 식민지화 할 수 있었다.
백제는 왜열도 식민통치에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펼쳤다.
백제인 만이 고관직에 올라
왜인들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인들을
왜로 불러 왜인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과 왜인들은 공통점을 늘려가며
지배민과 피지배민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면서 백제 선진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의 왜인들의 군사력이 강해진 것도
백제군에 징병되어 훈련받고 배우면서부터.
일본의 사무라이, 칼잡이들은 백제의 싸울아비와 무사.
백제 말로 "부샤", 후, 일본인이 자국어로 순화시켜 '부시'.
백제인들의 뛰어난 검술과 검 제조술을 전수 받은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백제가 왜인들에게
온건적인 평화정책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왜인을 고구려보다 더 잔혹하고
무서운 군사력으로 베어 나가며 살육했던 것.
왜열도 지배권을 놓고 싸우면서
초창기에 백제인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흉폭하게 탄압하는지를 보고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 부를 정도
이로 인해 일본 열도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싸움이 매우 잦아졌는데
이 틈을 노린 신라 또한 해상권 장악을 목표 삼아
우산국, 독도, 왜열도의 중남부 반도 몇 곳을 장악.
삼국이 대륙 영토 확장에 멈추지 않고
섬나라도 하나 하나 점령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 양국의
간섭과 침략에 자주 시달리고 있었던 가야국.
왜인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있던.,형제국.
왜와 손 잡고 그나마 아직 빼앗기지 않은 땅을
함께 지키기로 동맹 맺은 군소국가들이 가야 연맹.
일본 천왕 가문의 뿌리.,가야 연맹.
일본 천황의 즉위식은 교토에서 거행.
교토는 길고도 영향력 있는
'게이샤' 전통을 간직한 도시.
19세기 게이샤 사진.
에필로그
메이지(明治) 시대 이전 일본은
철저한 군주제에 가부장 사회였다.
이때 여성은 가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성이 사업과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이 필요한 모임이나 접대 자리에서
여성 대신 우아한 진행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초기 게이샤들.
초기 게이샤는 모두 남자였다.
연회석의 흥을 돋구는 남자 게이샤
이를 ‘다이코모치(太鼓待)라고 불렀다.
여자 게이샤가 대중화된 것은 17세기 이후.
남자 게이샤들은 18세기 중후반 이후까지,
유곽을 중심으로 여자 게이샤들과 함께 활동.
에도(江)의 대표 유곽인 요시와라(古原)
당시 게이샤들이 일하기를 선망하던 곳이다.
여자 게이샤들은 재주 대신 노래와 춤을 불렀다.
게이샤 수요가 늘자 얼굴만 예쁘고 노래,
춤은 어슬픈 게이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노래와 춤의 달인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업받은 노래와 춤의 달인
게이샤들은 ‘게이코(芸子)’라 불렀다.
메이지 후 게이샤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일본
전역으로 유곽문화가 번졌다.
게이샤의 역사를 보면 게이샤의 원조는
12세기 말 활동했던 시라뵤시라는 무용수.
시라뵤시는 잔칫집에서 춤추면서 흥을 돋궜다.
어느 틈에 몸도 팔게 되어 매춘부 대명사가 되었다.
16세기 말~17세기 초 무렵에 서서히 늘어난
게이샤는 춤, 노래 등 예능(藝能) 활동만 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게이샤는 예능 게이코와
춤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파는 게이샤로 나뉘었다.
19세기 초중반 게이샤들은 손님맞으며
젖가슴을 드러내는게 일상화된 듯 하다.
카메라 앞에서의 노출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게이샤들의 거리낌 없는 노출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를 했을 당시에
왜 일제가 조선기생들의 가슴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놓고 촬영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조선 기생과 일제 게이샤는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이다.
기생은 당시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했지만
시와 글에 능한 지식인 대접을 받는 특이한 존재.
게이샤는 무용과 노래의 예인이지만, 매춘도 직업.
19세기 일본은 혼혈 정책으로
게이샤를 정책적으로 대거 양산.
나비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