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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예(濊) 篇 [3편, 4-3], 예인(穢人)은, 색목인(色目人)?
[‘高駒驪, 百濟, 新羅, 沃沮, 倭’ 땅(疆域)은, 반도(半島), 열도(列島)가 아니다]
2025년 12월 06일
○ 「예(濊)=예(穢)」의 정체(正體)는? 고전(古典)을 주석(註釋)한 옛 학자(學者)들은 말하기를 : 『동이(東夷)의 별종(別種)』이라고 한다.
즉(卽),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예(濊)=예(穢)」는, 「동이(東夷)의 별종(別種)」으로 「한예(寒穢)」라고도 했다고 전(傳)해진다.
이들은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 「정북방(正北方)에 있던 자(者)」들이라고 했으니, 「반도(半島) 땅과는 눈곱만큼도 관계(關係)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 서북방(西北方)과 북방지대(北方地帶) ‘차가운(추운) 땅’에서 살던 종족(種族)이자 부족(部族)이었으며, 이들은 “동이(東夷)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 【필자(筆者) 주(注) : 여기서 ‘한(寒)은 또 한(韓)과 같다’라는 견해(見解)도 있음을 밝혀둔다.】
「예(濊)는 예(穢)」와 같은데, 전자(前者)는 예(穢)이고, 후자(後者)는 예(濊)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 기원전(紀元前) ‘일천(一千) 여(餘) 년(年) 전(前)’의 기록(記錄)은, “예(穢)”로, 기원후(紀元後)의 것은 “예(濊)”로 보면 반론(反論)없는 답(答)이 될 것 같다.
문제(問題)는,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 말하기를 : 「그 당시(當時)의【성주(成周)의 회합(會合), 기원전(紀元前) 770年 때】‘예인(穢人)’은, 그 형상(形象, 形相, 形狀)이 미후(獼猴)【원숭이】와 같았다」라고 한 것이다.
즉(卽), 「예인(穢人)은, 오손(烏孫)과 같은 색목인(色目人)이었다」라는 뜻이다. 우선 후한서(後漢書) “예(濊)” 편(篇)부터 차례로 설명(說明)하기로 하겠다.
「濊, 穢」【예(穢) ➞ 예(濊)】
○ [後漢書, 原文, 濊] :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예(濊)의 북(北)쪽에는 고구려, 옥저(沃沮)가 있으며, 남(南)쪽은 진한(辰韓)과 접해 있으며, 동(東)쪽은 큰 바다(大海)에 다하며, 서(西)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濊)와 옥저(沃沮), 구려(句驪)는 본래(本來)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 昔武王封箕子於朝鮮,箕子教以禮義田蠶,又制八條之教。其人終不相盜,無門戶之閉。: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가 예절과 의리,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8조의 교훈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끝내 훔치지 않아,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婦人貞信。飲食以籩豆。其後四十餘世,至朝鮮侯准,自稱王。: 부인들은 정절을 지켰으며, 음식을 먹을 때에 변두를 사용하였다. 그 후 40여 대가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漢初大亂,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而燕人詹滿擊破准而自王朝鮮,傳國至孫右渠。: 한나라 초기에 크게 혼란에 빠지자,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 사람으로서 땅으로 피난하여 간 자가 수만 명이었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에서 왕이 되어 나라를 전하여 손자인 우거에 이르렀다. 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 원삭 원년【기원전 128】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군]에 이르러 복속하자,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가 수년이 지난 후에 혁파하였다. 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玄菟、真番四*(部)**[郡]*。: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이르러 조선을 멸망시키고 나누어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설치하였다. 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番,以並樂浪、玄菟。: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고 낙랑과 현도에 병합하였다. 玄菟復徙居句驪。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 현도를 다시 구려가 있는 곳으로 옮기니,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의 옥저와 예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後以境土廣遠,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 후에 영토가 넓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 다시 영동의 7현을 분할하여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自內屬已後,風俗稍薄,法禁亦浸多,至有六十餘條。: 복속된 이후부터 풍속이 점점 각박해짐에 따라 법률로 못하게 금하는 것도 역시 점점 더 많아져 60여 조나 되기에 이르렀다. 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領東地,悉封其渠帥為縣侯,皆歲時朝賀。: 건무 6년(30)에 도위관직을 폐지하고, 마침내 영동의 땅을 버리고,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현후로 삼았는데, 세시(歲時)마다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無大君長,其官有侯、邑君、三老。耆舊自謂與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대군장이 없고, 그 관직으로 후, 읍군, 삼로가 있었다. 그 기로들이 옛날부터 스스로 이르기를, “구려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언어와 법속은 대체로 서로 비슷하였다. 其人性愚葎,少嗜欲,不請□。男女皆衣曲領。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界,不得妄相干涉。: 그 사람들의 성격은 우직하고 성실하며 즐기는 것이나 욕심이 적었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 깃을 둥글게 만든 옷)을 입었다. 그 풍속에서 산과 내를 중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역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同姓不昏。多所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造新居。: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않았고, 금기하는 것이 많아 병이 들어 사망하면(병이 들거나 사망하면) 곧바로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고 살았다. 知種麻,養蠶,作撓布。曉候星宿,豫知年歲豐約。常用十月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為「舞天」。 : 삼을 심고, 누에를 길러 풀솜과 베를 만들 줄 알았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풍·흉을 미리 알았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를 무천이라고 불렀다. 又祠虎以為神。邑落有相侵犯者,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為「責禍」。: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냈다. 읍락이 서로 침범하면, 곧바로 그 벌로 생구와 소, 말을 요구하였으므로 이를 책화라고 불렀다. 殺人者償死。少寇盜。能步戰,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서 갚게 하였고, 빼앗거나 훔치는 사람이 적었다. 걷거나 뛰면서 싸우는 데 능하였는데, 길이 3장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항상 여러 사람이 손에 쥐었다. 樂浪□弓出其地。又多文豹,有果下馬, 海出班魚,使來皆獻之。 : 낙랑의 단궁이 그 땅에서 산출되었고, 또한 무늬 있는 표범이 많이 서식하였다. 과하마가 있으며, 바다에서는 반어(班魚)가 나서, 사자가 올 때마다 모두 가지고 와서 헌상하였다.〉라고 하였다.
㈠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예(濊)의 북(北)쪽에는 고구려, 옥저(沃沮)가 있으며, 남(南)쪽은 진한(辰韓)과 접해 있으며, 동(東)쪽은 큰 바다(大海)에 다하며, 서(西)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濊)와 옥저(沃沮), 구려(句驪)는 본래(本來)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바라보는「예(濊)」는,
➀ 「고구려(高駒驪)와 옥저(沃沮)의 남(南)쪽에 있어야 하고, 예(濊)의 남(南)쪽엔 진한(辰韓)=진한(秦韓)과 접(接)하고」하였으니… …,
「고구려(高駒驪)」는, 「오늘날의 한수(漢水) 이북(以北)이 아닌 대동강(大同江) 이북(以北)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 되고, 「옥저(沃沮)」는, 「그 땅의 크기가 사방(方) ‘1’ 천리(千里)쯤 된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강원도(江原道)+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를 모두 합(合)한 것보다 더 컸다는 것이니… …“고구려(高駒驪)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건가?”」 황당무계(荒唐無稽)함 바로 그대로다.
➁ 「서(西)쪽은, 낙랑(樂浪)이 있다.」 : 「낙랑(樂浪)이 평양(平壤)이라고 할 때, 예(濊)는 동옥저(東沃沮)의 땅이 겹쳐버리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곧 방(方) “1” 천리(千里) 땅에 모두 포함(包含)되어 존재(存在)할 곳 땅이 없다는 것이다.
➂ 「예(濊), 옥저(沃沮), 구려(句驪)의 땅은 옛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진한(辰韓)=진한(秦韓)’과 ‘변한(弁韓)=변진(弁辰)’, ‘마한(馬韓)=서한(西韓)’의 땅은, “조선(朝鮮)의 땅이 아니었다”라는 뜻과 같다.」
그렇다면 고조선(古朝鮮) 당시(當時)에 : 「한수이남(漢水以南) 땅은, 뭍(陸地)이 아니라 바다(海)였다는 뜻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한수이남(漢水以南) 땅은, 주인(主人)도 없는, 백성(百姓)도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 땅이었다는 뜻인가?」
➥➥➥ 「마한(馬韓)의 54개국 + 진한의 12개국 + 변한 12개국 = “78개 나라(國家)”의 땅은 어디에 있었나? 한반도(韓半島)를 통틀어봐도 ‘220,000’㎢일 뿐인데 말이다. 여기서 옥저국(沃沮國)의 ‘160,000’㎢를 빼고 나면… …겨우 ‘60,000’㎢ 남는데… …삼한(三韓)의 78개 나라와 왜국(倭國)은, 성층(成層)이나 대기권(大氣圈)에 있었다는 것인가?
『마한(馬韓)의 남(南)쪽, 변한(弁韓)의 남(南)쪽에는 왜국(倭國)과 접(接)해 있다』라고 하였으니…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이에 대해 어떤 획기적(劃期的)이고, 기발(奇拔)한 해석(解析)이 나올 수 있을까?
「침묵(沈默)한다고 해서 해결(解決)될 일은 없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거두(巨頭)는 ‘반역세력(叛逆勢力)=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의 거두(巨頭)와 똑같다. 침묵(沈默)한다고 해서,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이 애국세력(愛國勢力)으로 변(變)할 수 없다.
➃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땅에서 산출되었고, 또한 ‘무늬 있는 표범(文豹)’이 많이 서식하였다.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서는 ‘반어(班魚)’가 나서, 사자가 올 때마다 모두 가지고 와서 헌상하였다. : 樂浪□弓出其地。又多文豹,有果下馬, 海出班魚,使來皆獻之」라고 하였는데,
➥ 「낙랑(樂浪)의 단궁(檀弓)」 : “단궁(檀弓)인가? 단궁(短弓)인가?”「단궁(檀弓)【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고 설명(說明)하는 것을 보면 : 박달나무로 만들 활(弓)을 말하는 것인데, 예(濊)의 특산품(特産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는 “예(濊)” 땅에서는 질 좋은 박달나무(檀木)가 생산(生産)되었다는 것이고, 또한 궁(弓)을 잘 만드는 기예(技藝)를 가진 기술자(技術者)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濊) 땅에서 산출(産出)되고, 그곳에 제작(製作)되었음에도 ‘예궁(濊弓)’이 아닌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라고 명명(命名)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어지는 설명(說明)에서는 “단궁(檀弓)은 동예족(東濊族)의 특산물(特産物)로 널리 알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예(濊)의 땅에서는 무늬가 있는 표범(文豹)이 많다”라고 하였으며,
네 번째는, “반어피(斑魚皮)가 나 조공품(朝貢品)이 되었다”라고 했으니, 이곳 예(濊)의 특산(特産)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는, 과하마(果下馬)는? 키가 3자라고 했으니 1m 미만(未滿)의 아주 “조그만 말”을 말하는 것인데… …,
여섯째는 ‘동예(東濊)’가 있으면 “예(濊)”가 별도(別途)로 있고, 또는 “서예(西濊)”가 있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가? 강아지가 풀 뜯어 먹는 헛소리인가?”
➥ 위에서 열거(列擧)한 「첫 번째부터 다섯째까지의 특산품(特産品), 토산물(土産物)」이라는 것인데, 「이 땅이 바로 반도(半島) 함흥(咸興) 이남(以南)과 강원도(江原道) 동해(東海) 연안(沿岸) 땅인데, 이 땅에서 이러한 토산물(土産物)이 난다는 그것을 고증(考證), 또는 근거(根據)할 수 있는 증거(證據)나 정황(情況)은 실재(實在)하고 있는 건가?」
토산물(土産物), 특산물(特産物)이란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벗어날 수 없다. 『단궁(檀弓), 무늬 있는 표범(文豹), 반어피(斑魚皮), 과하마(果下馬)』등이 특산물(特産物)이라고 하였다. 특히 “단궁(檀弓), 무늬 있는 표범, 과하마(果下馬), 반어피(斑魚皮)” 등이 산출(産出)된다는 것은, “예(濊)”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는데… …그 북(北)쪽의 옥저(沃沮)나 고구려(高駒驪) 또는 그 남(南)쪽의 진한(辰韓) 땅 역시(亦是)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가 똑같아 “예(濊)에서만이 산출(産出)되었다”라는 이야기는 『반도(半島) 땅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라고 자신(自信)있게 말할 수 있다.
➨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동예(東濊)』란 또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을 대관령(大關嶺)으로 추정(推定)해 놓고, 이 고개의 동(東)쪽에 있는 예(濊)를 “동예(東濊)”라고 했다는 설명(說明)이 대부분(大部分)이다.
그러나 여기서 「➊ “단단대령(單單大嶺)이 대관령(大關嶺)”이라는 해설(解說)은 누가 했느냐?」「➋“단단대령(單單大嶺)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요, 백두산(白頭山)이며 장백산(長白山)이다. 한민족(韓民族)의 혼(魂)이 깃든 곳이다”」라는가 하면 「➌ 또 어떤 자는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 사이의 분수령(分水嶺)이다.」라는가 하면 「➍ 또 혹자(或者)는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좌우(左右)로 나누는 마천령이다」라고 하니, 정신(精神) 나간 자(者)들임에 틀림이 없다.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던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결과(結果)를 보면 100% 팩트(Fact)다.
➥ 스스로(自稱) “이 민족(民族)”을 최하(最下)의 천민(賤民)이나 노비(奴婢)로 만들기 위해 환장(換腸)한 놈들이다. 『‘일만(一萬) 년(年)’ 또는 ‘반만년(半萬年)’을 이 땅에 토착(土着)해 왔다는 “동이(東夷), 구이(九夷), 한(韓), 조선족(朝鮮族)은, ‘일만(一萬) 년(年)’ 또는 ‘반만년(半萬年)’ 동안을 지지고 볶고 부딪히며 살아온 땅의 이름(地名), 산의 이름(山名), 강 이름(江名) 조차도 전혀 모르는 ‘미후(獼猴) 이하(以下)’의 지능(知能)을 가진 동물(動物) 세계(世界)였다”』라는 것을 만천하(滿天下)에 공포(公布)하고 있다.
21세기(世紀) 「‘1’억(億)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는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고, 비하(卑下)하지 못헤 환장(換腸)한 놈들이 아니면 무엇이랴!」이건 정말 누가 봐도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 〈이건 100%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조선반도(朝鮮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위해 공장(工場)에서 찍어낸 : 반도(半島)를 영원(永遠)한 식민통치(植民統治)로 만들기 위해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일제(日帝)를 위한 허구(虛構)의 해설(解說)이다. 이걸 지금도 애지중지(愛之重之) 가슴에 품고 사는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계(界)’는, 죽어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AI / 동예(東濊)」를 검색(檢索)하면 : 동예(東濊) : 「‘원산~강릉~영덕’ 일대(一帶)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국가(國家)」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AI / 동예(東濊)】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이 아닐 수 없다. 동예(東濊)는, 예(濊)는? 서예(西濊)는? 정말 어이없는 해설(解說)이다.
㈡ 「단단대령(單單大嶺)」 : “단단대령(單單大嶺)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하는 것이다.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東)쪽에 있는 옥저(沃沮) 및 예(濊)」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편(前篇)의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편을 보면 : 개마현(蓋馬縣)의 주석(註釋)【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와 여러 학자(學者)들이 주석(註釋)하였다】에서 말하기를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곳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 :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라고 하였음을 해설하였다. 즉(卽),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으며, 그곳에 개마산(蓋馬山) 곧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있으며,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라는 것을 설명(說明)하고 있다. 또한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었다」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위의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서 찾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단대령(單單大嶺)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을 말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현토군(玄菟郡) 땅에 있으며, 개마현(蓋馬縣)은, 현토군(玄菟郡) 속현(屬縣)」이라고 한 것이고, 「그 동(東)쪽에 있는 옥저(沃沮)를 동옥저(東沃沮)라고 한 것이며, 또한 동옥저(東沃沮)와 함께 있던 ‘예(濊)’를 ‘동예(東濊)’」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자연(自然)스럽게 풀려야 인간(人間)의 삶【동이(東夷)=구이(九夷)=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의 발자취가 되는 것이다.
➥➥➥ 아래의 〈『기원전(紀元前, BC) 770年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을 기록(記錄)한 “급총주서(汲冢周書)”의 내용(內容)을 보면』 :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사는 또는 해외(海外)에 있는 “약(約) ‘1’억(億)인(人)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는 한민족(韓民族)”은, 스스로의 삶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사육(飼育)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疑問)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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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穢)=예(濊)」 [後漢書, 외(外) 사서(史書)에서 말한 “예(穢)의 특징(特徵)”]
(1) 汲冢周書 : 〈成周之會西面者。正北方穢人前兒。前兒若獮猴。: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正北方)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前兒)는 원숭이(獼猴)와 같이 생겼다. / 출처(出處) : 해동역사(海東繹史), 고전번역원 DB〉
【汲冢周書 : ‘逸周書’又名‘周書’、‘周志’,隋唐以後稱‘汲冢周書’,中國先秦史籍。全書十卷. 該書記錄了周文王、周武王、周公、成王、康王、穆王、厲王和景王時代的歷史事件. 《汲冢周書》於西晉初年(約279)出土於汲郡(今河南省衛輝市附近)的魏襄王墓(公元前296),是汲冢書的一部分。夏含夷指出,現行的兩種稱呼都是缺乏根據的,而早期文獻都稱之為《周書》。[9]不過《周書》也是《尚書》的一部分,所以還是稱為《逸周書》以作區分。】
㈠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예(穢)는 예(濊)”인데, 예(穢)와 그 백성(百姓)들은 ‘동북방(東北方)’이 아닌 「“정북방(正北方)”에 있던 자(者)들이라고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 밝히고 있다」라는 것이다. 곧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종족(種族)이자 부족(部族)이다
「이런 종족(種族), 부족(部族)이 어떻게 한반도(韓半島) 땅의 신라(新羅) 북(北)쪽에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요, 이러한 이들이 “동해안(東海岸) 연안지대(沿岸地帶)에 있었다”라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설명(說明)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말이 하나의 일관(一貫)된 논의(論議)로 되지 못함. 즉, 말이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한다. [漢字辭典]】 이요, 황당무계(荒唐無稽) 【‘허황(虛荒)되고 근거(根據)가 없다.’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이 터무니없고 근거(根據)가 없음[漢字辭典]】한 말이다.」
➥ 「주(周)」나라의 정북방(正北方) 지대(地帶)는 :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과 영하성(寧夏省)과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 그것도 동해안(東海岸) 연안지대(沿岸地帶)에 있었다고 침을 질질 흘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뭔 말인가? 또,
◈ 아래의 구절(句節)을 번역(飜譯), 해석(解釋)해 보면 : 「기절초풍(氣絶招風)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일만 남는다. 누구도 이에 대하여 어떤 설명(說明)도 없다.
㈡ ➨➨➨ 〈成 周 之 會 西 面 者。正 北 方 穢 人 前 兒。前 兒 若 獮 猴。[汲冢周書]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者)는, 정북방(正北方)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前兒)는 원숭이(獼猴)와 같이 생겼다. [급총주서(汲冢周書)]〉라고 하였는데… …, 이건 기절초풍(氣絶招風)【기절하거나 까무러칠 정도로 몹시 놀라 질겁을 하다】할 일이다.
➨ 「전아(前兒)」란 : 「당시(當時)의 예인(穢人)을 말하는 것인데, 그 생김새가, 그 모양이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았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주(成周)의 회합(會合) 때에 참석(參席)한 “예인(穢人)”을 말하는 것인데… …그 ‘형상(形象)=형상(形狀)’이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았다(若)」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손(烏孫)」과 같은 종족(種族) 또는 그와 비슷한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종족(種族)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
「전한서(前漢書) 오손(烏孫) 및 통전(通典) 오손(烏孫) 편(篇)」을 보면 : 바로 「오손(烏孫)의 종족(種族)들을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은 종족(種族)」이라고 묘사(描寫)하고 있는데, 바로 “색목인(色目人)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예인(穢人)은 정북방(正北方) 지대(地帶)에 있었으며, 곧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은 형상(形象)을 하고 있었다」라는 말이 된다. 이때가 기원전(紀元前, BC) ‘770’年 시기(時期)이다. 그럼 「오손(烏孫)은, 예인(穢人)들의 후손(後孫), 후예(後裔)」들이라는 말일까?
➨ 「예(穢)=예(濊)」는,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 사신(使臣)을 보냈다」라는 증거(證據)요, 「주(周)나라의 정북방(正北方) 지대(地帶)에서 살던 자(者)들이며,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 참여(參與)했다는 말은, 곧 성왕(成王) 이전(以前)에도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라는 증거(證據)다.
여기서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이란 : 주(周)나라가 호경(鎬京)에서 견융(犬戎)의 침입(侵入)과 핍박(逼迫)으로 인하여 ‘성왕(成王)’ 때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紀元前[BC] 770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周成王时期迁都洛邑, “成周,今河南洛阳”】
이렇게 “급총주서(汲冢周書)”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예(穢)는 예(濊)」로 변(變)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예국(穢國)은, 이미 기원전(紀元前) 770년(年) 이전(以前)부터 존재(存在)해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제 정말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어찌해야 할까?」
이러한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은 형상(形象)을 가진 종족(種族)이 ‘예(穢)=예(濊)’라고 했을 때 : 「이러한 ‘색목인(色目人)’ 또는 얼굴에 수염과 구레나룻가 많이 나 있는 종족(種族)이 강원도(江原道), 함경도(咸鏡道) 동해(東海) 연안(沿岸)에 있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 더구나 이들이 「기원전(紀元前) 770년(年) 이전(以前)부터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 오늘날의 그 후예(後裔)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혼혈(混血)과 혼혈(混血)로 인하여 그 유전자(遺傳子)가 사라졌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수천(數千) 년(年) 전(前) ‘미라’에서, 발견(發見)된 ‘뼈’속에서 분석(分析)해내는 유전자(遺傳子)는 지금의 특정(特定) 인종(人種)에게도 유전(流傳)되고 있다는 과학자(科學者)들의 설명(說明)은, ‘강아지’가 풀 뜯어 먹는 헛소리에 불과(不過)한 건가?
➊ 前漢書 西域 : 〈烏 孫 國, 大 昆 彌 治 赤 谷 城 : 오손국(烏孫國)은, 대곤미(大昆彌)가 적곡성(赤谷城)에서 다스렸는데, 【〔一] : 師 古 曰:烏 孫 於 西 域 諸 戎 其 形 最 異。今 之 胡 人 青 眼、赤 須, 狀 類 彌 猴 者, 本 其 種 也。: 안사고(顏師古)가 이르기를, 오손(烏孫)은 서역(西域)의 여러 오랑캐(戎 : 되) 중에서 그 형상(形相)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지금의 호인(胡人:오랑캐)인데, 청안(靑眼 : 푸른 눈동자)과 콧수염(髭)과 귀밑털(鬢)이 붉은색이며, 형상(용모)이 원숭이(獼猴) 종류와 같은데, 본래 그런 종족(種族)이다】 去 長 安 八 千 九 百 里。: 장안(長安)으로부터 8,900리(里)를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➋ 通典 西戎 : 〈烏 孫, 漢 時 通 焉。 大 昆 彌 理 赤 谷 城 : 오손(烏孫)은, 한(漢)나라 땡에 통했다. 대곤미(大昆彌)가 적곡성(赤谷城)에서 다스렸다. 【注 : 烏 孫 於 西 域 諸 戎 其 形 最 異。今 之 胡 人, 青 眼 赤 髭 鬢, 狀 類 彌 猴 者, 本 其 種 也。其 國 謂 王 曰 昆 彌, 亦 曰 昆 莫。 : 오손(烏孫)은 서역(西域)의 여러 오랑캐(戎 : 되) 중에서 그 형상(形相)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지금의 호인(胡人:오랑캐)인데, 청안(靑眼 : 푸른 눈동자)과 콧수염(髭)과 귀밑털(鬢)이 붉은색이며, 형상(용모)이 원숭이(獼猴) 종류와 같은데, 본래 그런 종족(種族)이다. 그 나라의 왕(王)을 이르기를, “昆彌(곤미)”라 하는데, 또 “곤막(昆莫)”이라고도 한다.】 去 長 安 八 千 九 百 里。 : 장안(長安)으로부터 8,900리를 가야 한다.〉
➥➥➥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어찌해야 할까? 이 자(者)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이러한 구절(句節)을 어떻게 이해(理解)하고, 해석(解釋)해야 할까? 「급총주서(汲冢周書)」는, 서진(西晉)의 무제(武帝) 함녕(咸寧) 5년 곧 AD 279년 급총(汲冢)에서 출토(出土)된 것이라고 전해지는, 주(周)나라의 주서(周書)를 말하는 것이다.【逸周書又名周書, 周志, 隋唐以後稱汲冢周書, 中國先秦史籍。全書十卷。該書記錄了周文王、周武王、周公、成王、康王、穆王、厲王和景王時代的歷史事件。: 一說逸周書 是在晉武帝咸寧五年[279年]發自汲冢.】
이곳에 출토(出土)된 “급총주서(汲冢周書)”내용(內容)에 대해 감히 ‘가불가(可不可)’를 따진다는 것 자체(自體)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평가(評價)할 수 없는 “귀중(貴重)한 자료(資料)”이기 때문이고, 3,000년∼2,500여 년(餘年) 전(傳)의 주(周)나라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 간 “전아(前兒)”는, “예(穢)”【예(穢)=예(濊)】에서 보낸 사신(使臣)이었을 것이다. 사신(使臣)으로 간 “예인(穢人)”을 주(周)에서 묘사(描寫)하기를 : “전아(前兒)”라고 했는데, “전아(前兒)”란 말은, 바로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다”라는 표현(表現)은, 사서(史書)에서 찾아보면 : 바로 「서역(西域)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오손(烏孫)”의 종족(種族)을 “미후(獼猴) 곧 원숭이와 같다”라고 기록(記錄)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색목인(色目人)들의 전형적(典型的)인 대표적(代表的)인 ‘형상(形象)=형상(形相)’이요, 색목인(色目人)에 대한 일반적(一般的)인 표현(表現)」임을 알 수 있다. 「본시(本是)의 몽고인(蒙古人)과 오늘날의 구라파(歐羅巴) 우랄산맥【오랍산맥(烏拉山脈)=Ural, 山脈】서(西)쪽의 북구라파인(北歐羅巴人)들의 ‘형상(形象)=형상(形相)’을 그대로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이게 수천(數千) 년(年)을 이어져 내려오는 ‘기막힌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일 수 있을까?」
‘수천(數千) 년(年)’이라는 상수(常數)와 그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종족(種族)의 변수(變數)를 생각해 보면 : 기막힌 우연(偶然)의 일치(一致)는 ‘수백만분(數百萬分)의 일(一)’쯤이나 될까?
➥ 이래서 필자(筆者)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영역(領域) 및 속국(屬國)을 포함(包含)한 지배력(支配力)이 미치던 곳을 “동구라파(東歐羅巴)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중원대륙(中原大陸)”으로 이어져 왔다.」라고 줄기차게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2) 汲冢周書註 : 〈穢。寒穢。東夷別種。: 예(穢)는 한예(寒穢)로 동이(東夷)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
➥ 「한예(寒穢)」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고조선(古朝鮮)과 ‘예맥(濊貊)=예맥(穢貊)=예맥(獩貊)’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主張)이 있다. 「예(穢)는 본시(本是) “한예(寒穢)”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예(穢)」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 자체(自體)가 조작(造作)된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寒穢」라는 글자로 보면 : 「북방(北方)의 차가운 땅에서 사는 예(穢)」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王會解。穢人。前兒。前兒若獮猴立行。聲如小兒。: 왕회해(王會解)에 의하면 “예인(穢人)은, 곧 전아(前兒)인데, 전아(前兒)는 원숭이와도 같이 생겼는데 서서 다니며, 소리는 마치 어린아이(小兒)의 소리와 같다.」라고 하였으며,
「注。穢。寒穢。東夷別種。: 왕회해(王會解)의 예인(穢人)에 대한 주(注)에서 이르기를, 예(穢)는 한예(寒穢)인데, 동이(東夷)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
「賈耽古今郡國志。新羅北界溟州。古濊國。: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서 말하기를, 신라(新羅) 북쪽 지경의 명주(溟州)는, 옛 예국(穢國)이다.」라고 하였다.
◈ 이왕지사(已往之事) 말이 나온 김에 일주서(逸周書) 7권(卷)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 등장(登場)하는 “겸양(嗛羊)”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 급총주서(汲冢周書) 왕회해(王會解)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고이(高夷)가 겸양을 바쳤는데, 겸양(嗛羊)이란 것은 양(羊)이면서 네 개의 뿔이 있는 것이다. [穢人前兒,前兒若獮猴立行,聲似小兒… …高夷嗛羊,嗛羊者,羊而四角。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不屠何青熊。東胡黃羆, 中略] 라고 하였다.』
즉(卽), 〈‘성주(成周)의 회합(會合)’에 고이(高夷)【구려(駒驪)=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를 말하는 것이다. 공조(孔晁)의 주(注)에, 고이(高夷)는 오랑캐로 고구려(高句麗)이다.】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겸양(嗛羊)”을 바쳤는데, “겸양(嗛羊)”이란 양(羊)은 양(羊)인데, 뿔이 4개(個)가 달린 양(羊)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양(羊) 중에서도 특이(特異)한 종류(種類)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반도(半島) 또는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동물(動物)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의 반도사학(半島史學)은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즉(卽), ➞➞➞「 [주-D001] 겸양(嗛羊) : 양이면서 뿔이 네 개 나 있어서 양 같으면서도 양은 아닌 동물이다. [출처(出處) : 해동역사 제6권 / 세기(世紀) 6 고구려(高句麗) 1 / 고전번역원 DB]】」라고, ➨ 불필요(不必要)한 사족(蛇足)을 달아놓았다.
「양(羊)은, 양(羊)인데, 뿔이 4개(個) 달란 양(羊)이다【高夷嗛羊,嗛羊者,羊而四角】」라고 기록(記錄)해 놓은 것을 ‘지’들 멋대로, ‘지’들 마음대로 「겸양(嗛羊) : 양이면서 뿔이 네 개 나 있어서 양 같으면서도 양은 아닌 동물이다」라고 해 놓으면 어찌 되는 건가?
➞ “4개의 뿔이 달린 양(羊)이 양(羊)이 아닌 다른 동물(動物)로 변(變)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예(例)가 바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 놓으면 어디가 덧나나?”
➥ 또 이르기를 : ‘왕응린(王應麟)’이 말하기를, “《술이기(述異記)》에 이르기를, ‘주나라 성왕(成王) 때 동이(東夷)가 뿔이 여섯 개 달린 양을 바쳤는데, 이 역시 겸양의 종류이다.’【王應麟曰述異記。: 周成王時。東夷貢六角羊。亦嗛羊之類】 하였다.” 하였다. [해동역사 제27권 / 물산지(物産志) 2 수류(獸類)]라고 했으니, 겸양(嗛羊) 또한 여러 종류(種類)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原典, 原文 : ➨ 汲冢周書王會解。: 嗛羊 : 成周之會。高夷貢嗛羊。嗛羊者。羊而四角。孔晁注曰。: 高夷。東北夷高句麗. ➨ 述異記, 上 [作者:任昉, 梁] : 周成王時東夷送六角牛 ➨ 王應麟曰述異記。: 周成王時。東夷貢六角羊。亦嗛羊之類。】
➥➥➥ 21세기(世紀) 오늘의 ‘과학적(科學的) 지식(知識)’을, “몇 천년(千年)” 전(前)의 지식(知識)과 비교(比較)할 수 있을까? 당연(唐捐)히 비교(比較)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뿔이 4개 달린 양(羊)은 없다. 또 뿔이 6개 달린 양(羊)은? 당연(當然)하게도 뿔이 4개(個) 달린 양(羊)도 없는데… …뿔이 6개 달린 양(羊)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羊)”과 유사(類似)한 동물(動物), 특히 차가운(寒) 땅에서 사는 동물(動物) 중에 “순록(馴鹿)”이 있다.
‘21세기(世紀) 기준(基準)’에서는, 「‘양(羊)은 양(羊)’과에 속하는 동물이고, ‘순록(馴鹿)’은 ‘사슴’과에 속한 동물(動物)이니 다른 동물군(動物群)에 속하지만」… …「기원전(紀元前) 770년(年), 그때도 ‘양’과가 있고, ‘사슴’과가 있었을까?」 이건 아닐 것이다.
# 1, 순록(馴鹿)은 뿔이 4개가 달렸다. [출처(出處) : 서울동물원, Naver]
➥ 여기에 “예(濊)” 이전(以前)에는 “예(穢)”라고 하였는데, 또 그 이전(以前)에는 “한예(寒穢)”라고 하여 “추운 지방에서 사는 예(穢)”라고 한 것을 보면, 고구려(高駒驪)인 ‘고이(高夷)’와 같은 땅에 살며, 별종(別種)이었다는 뜻이다 : “고이(高夷) 즉(卽) 고구려(高駒驪)는, 「“순록(馴鹿)”을 성주(成周)의 회합(會合) 때에 토산물(土産物)로 조공(朝貢)했을 것이고, 이를 본 당시(當時)의 주(周)나라 관리(官吏)들은 “뿔이 4개 또는 5개, 또는 6개 달린 양(羊)”이라고 표현(表現)한 것이다」라고 생각된다. 【海內經18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의 구절(句節)을 참고(參考)해 볼 만한 것인데… …시간(時間) 제약(制約)으로 다음 기회(機會)로 넘겨야 할 것 같다. 】
# 2. 순록(馴鹿)은 뿔이 5개가 달렸다. [출처(出處) : 서울동물원, Naver]
➥ 「순록(馴鹿)은 : 【한자사전(漢字辭典) : 유라시아순록(Eurasia馴鹿). 토나카이(tonakai). 사슴과의 하나. 몸의 길이는 1.8미터, 어깨의 높이는 1미터 정도(程度)이며, 여름에는 어두운 갈색(褐色), 겨울에는 갈색(褐色)이고 여러 갈래로 된 큰 뿔이 있다. 가을철에 교미(交尾)하여 7~8개월(個月) 만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야생(野生)하기도 하나 길들여 가축(家畜)처럼 기르기도 하는데 다리가 길고 억세어 마소처럼 부린다. 고기와 젖은 식용(食用)하고 가죽(≒衣服)은 의복(衣服), 천막(天幕), 구두 따위를 만드는 데 쓴다. 지의류(地衣類)를 먹고 가을철에 남방(南方) 삼림(森林) 지대(地帶)에 떼 지어 이동(移動)하며 북극(北極) 지방(地方)에 분포(分布)한다.】라고 하였으니… …,
「Naver 동물백과」에 의하면 : 「서식지 : 북극 툰드라지역 침엽수림, 산악지역이며, 분포지 : 스칸디나비아, 독일, 폴랜드, 스발바드, 러시아, 몽골, 북동 중국, 사할린, 알래스카, 캐나다, 미국, 그린란드」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기록(記錄)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반도(半島) 이 땅에는 4개의 뿔이 달린 양(羊)이나 순록(馴鹿) 등은 상상(想像)조차 할 수 없다”라는 것이 정상적(正常的)인 상식(常識)을 가진 무리일 것이다.
유희(劉熙)의 《석명(釋名)》에 ‘한양(韓羊)ㆍ한토(韓兎)ㆍ한계(韓鷄)에 대한 요리(料理)의 본법(本法)은 한국(韓國)에서 나왔다.’ 하였으니, 양(羊), 토끼, 닭에 대한 요리는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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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한서(前漢書) : 〈漢高祖四年八月。漢王擊楚。軍廣武。北貉燕人。[師古曰。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來致梟騎助漢。 : 한고조(漢高祖) 4년【한고조(漢高祖) 4년(年)은, 기원전(紀元前, BC) 203年이다.】 8월에, 한왕(漢王)이 초(楚)를 공격하여, 광무(廣武)에 주둔하였는데, 북(北)쪽의 맥(貉)과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맥은 동북쪽에 있다. 삼한(三韓)의 족속은 다 맥의 종족이다.” 하였다.】 연(燕)에서 날랜 군사를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라고 하였다.
➥ 「한왕(漢王) 유방(劉邦) 당시(當時)의 북방지대(北方地帶)는 어딜까?」 당연(當然) 중원(中原) 땅의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일컫는 말이다. 중원(中原) 북방지대(北方地帶)가 “반도(半島) 춘천(春川)이나 명주(溟州) 땅이 될 수 있다”라면 : 「지구(地球)의 자전축(自轉軸)이 수십(數十)도 더 기울어져도 불가능(不可能)한 일일 것이다.」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의 사건(事件)이다.
○ 「예(濊) ➞ 예(穢) ➞ 한예(寒穢)」였다는 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 어느 모로 보아도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무엇이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것인가?
「예(濊) ➞ 예(穢) ➞ 한예(寒穢)」의 “활동거점(活動據點)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동이(東夷), 구이(九夷) 종족(種族)’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사기록(歷史記錄)에 의한, 이해(理解)할 수 있는 상식적(常識的)이며, 일반화(一般化)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수천(數千) 년(年) 전(前)’의 것을, 21세기(世紀) 오늘의 기준(基準)으로 맞추려 한다면 : 「귀신(鬼神)이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요, 강아지가 풀 뜯어 먹는 헛소리로 치부(置簿)되고, 비웃음이나 손가락질이나 당하는 것이다.」
「기원전(紀元前, BC) 770年, 그때의 일을 기억(記憶)하고 있는 인간(人間)은 없다. 그래서 기록(記錄)이 필요(必要)한 것이고, 당시(當時)의 사람들은 당시(當時)의 것을 후세(後世)에게 알리고자 기록(記錄)이라는 매개체(媒介體)를 이용(利用)하여 남긴 것이다.」
○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어찌해야 할까?」 「우린 스스로의 삶이 아닌 : 115년(年) 동안 일제(日帝)와 그 후손(後孫)들에 의해 사육(飼育)당하고 있다.」라고 해도 결코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 『스스로 천시(賤視), 학대(虐待)하며, 능멸(陵蔑)해가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반도(半島) 땅을 옛 일제(日帝) 및 그 하수인(下手人)들에게 헌납(獻納)할 때까지 계속(繼續)할 텐가?」 그러나 성공(成功)할 수 없다.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 허구(虛構)의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생각해 보시라! “일만(一萬) 년(年), 10,000년(年)을, 반만년(半萬年) 5,000년(年)”을 이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 옹기종기 모여 부딪치며 살았던 선대(先代)들이, 그 땅에서 토착(土着)한 선대(先代)들이 :
사는 땅의 이름(地名)도 모른다,
사는 땅의 끝에 왜(倭)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서울(都邑地) 이름도 모른다,
자신(自身)들이 피땀을 흘리며 쌓은 성(城)도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사는 곳을 흐르는 강(江)이나 하천(河川)의 이름도 모른다,
산(山)을 등지고 사는 그 산(山)의 이름도 모른다,
사는 땅의 영산(靈山)이라면서도 영산(靈山)의 이름도 모른다,
호수(湖水)에 기대어 살면서 호수(湖水)의 이름도 모른다,
방목(放牧)하며 몰고 다니는 가축(家畜)의 이름도 모른다,
사는 땅의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도 모른다,
사는 땅의 동(東)쪽과 서(西)쪽이 몇 백리(百里), 천리(千里)나 되는지도 모른다,
사는 땅의 남북(南北)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서울에서 남방(南方) 땅이 5 천리(千里)쯤 떨어져 있다는 말도 모른다,
사는 곳에서 산출되는 토산물(土産物), 특산물(特産物)도 모른다,
사는 땅의 특이(特異)한 지세(地勢)조차도 모른다,
사는 땅의 그곳이 사막(沙漠)인지, 물기가 많은 곳인지, 기후(氣候)가 따뜻한지, 추운지도 모른다거나… …계속(繼續)하면 날밤을 새워야 할 만큼 많은 것이다.
➨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면 : 도대체 우리들의 선대(先大)들은, 일만(一萬) 년(年), 반만년(半萬年)을 토착(土着)해 살았다면서 : 그 무엇도 아는 것이 없었다 : 도대체 어떻게 ‘일만(一萬) 년(年), 반만년(半萬年)’을 살았다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일만(一萬) 년(年), 반만년(半萬年)’을 어떻게 살았다는 것일까? 무엇을 얼마만 큼 알고 있었는가?
그래서 언제나 야만인(野蠻人)으로, 야만인(野蠻人)의 땅으로, 주변(周邊) 대국(大國)의 속국(屬國) 또는 식민지배(植民支配)를 받아야만 겨우 풀칠이나 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이 원(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야만(野蠻)의 땅에서 사는 야만인(野蠻人)으로, 주변(周邊) 대국(大國)의 속국(屬國) 또는 식민지배(植民支配)를 받아야만 한다』라는 것일까? 이걸 원(願)하는 것이다.
➥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목적(目的)을 안다면 : 우리가 해야 할 일 역시(亦是) 즉시(卽時)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철퇴(鐵槌)를 가(加)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 다음 게재(揭載)는, 「“제3”의 [4-4], 부여(夫余) 편(篇)」입니다만, 같은 것만 계속(繼續)하니, 독자(讀者)분들께서도 역시(亦是) 재미없고 딱딱하며 지루하기만 한 시간(時間)이 되는 것 같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아냥도 많은, 논제(論題) 하나를 꺼내 볼까 합니다.
➥ 바로 “발해(渤海)=발해(勃海)”에 대한 것이며, “발해(渤海)에 대한 이설(異說)을 잠재운다.”라는 제목(題目)과 그 내용(內容)을 가지고, 「21세기(世紀) 발해(渤海)가 아닌 본래(本來)의, 본시(本是)의 발해(渤海)에 대한 사서(史書)의 고증(考證)으로 이론(異論)을 잠재우도록 하겠습니다」
「‘해동(海東)’이란 ‘발해(渤海)의 동(東)쪽 우리나라【朝鮮】’를 말한다.」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발해(渤海)”는, “21세기(世紀)의 발해(渤海)”일 뿐입니다.」
2025년 12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편은 "후한서 부여편"입니다만,
"발해"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잠재우기로 했습니다.
오늘날 곧 21세기의 발해는, 21세기의 발해일 뿐입니다.
곧 "역사서에 기재된 본시의, 본래의 발해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기록은 기록으로 고증(考證)하겠습니다.
"발해의 동쪽 곧 해동은 우리나라를 칭한다"는 말은 100% 동감합니다.
문제는 그 발해가, 어디에 있는 발해인가? 이게 문제입니다.
본래의 발해(渤海)의 동(東)쪽을 해동(海東)이라 했고, 곧 우리나라를 칭했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우리 카페를 찾아오시는 여러분들... ...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요.
독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반도사학계를 보면 :
참, 한심할 때가 많다.
아마도 반도사학계들 스스로 : 아무리 파봐도 명백한 증거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 ...이것을 보면 : 참 애들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그렇다고 파본들.... ...나오지 않는 것을 어쩌겠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등 해설본들을 보면 : 대부분 반도사학계의 거두라고 칭하는 몇 분들의 해설이 주류를 이룬다.
[어디 어디라고 추정한다. 비정한다. 추측한다등등으로 마무리를 한다]
반도사학의 거두라고 하는 몇 분들은 일제식민지 통치시절의 학자들로, 일제와 야합하여 부역한 부역자들이다.
"죽어 묘지에 묻혀 있는 제갈량때문에 살아있는 사마의가 도주를 했다"는 옛 고사처럼 : "죽어 묘지에 묻혀 이미 한줌의 흙이 되어버린 일제와 야합한 부역자 때문에 반도사학계는 오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 옛 원문이 왜곡되었다"는 것은, 그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후한서 본기, 자치통감 후한기'를 보면 :
말많은 "도요(度遼=渡遼)" 즉 "요수(요하)를 건너다"라는 주어는 "건너다"라는 것이 아니라 "요수(요하)"라는 하천이다.
후한 중기 이후, "요수=요하'를 건너 북방, 서북방으로 군대를 출정시키는 예가 많았는데... ...총사령관이 바로 "도요장군"이며, 수만의 병사들을 안전하게 도하시키고, 그 북방에 있었던 주둔군 진지인 "도요영"에 집결시켜 훈련과 휴식등, 보급기지였다.
그런 후 북방과 서북방에서 몰려드는 오랑캐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도요장군"은 후한조정의 실세중의 실세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요장군"과 주둔군 진지인 "도요영"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의 요녕성에 있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후한서 또는 자치통감 후한기에 의하면 : 섬서성과 영하성 북방지대를 흐르는 황하(하)의 북안(北岸)에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원(五原)"이라는 지명 때문인데... ...당시의 '하북(河北)'은 오늘날의 청해성과 하서회랑 북방지대를 일컫는다.
어찌됐든... ...오늘날의 요녕성과는 티끌만치도 관계없는 곳에 "도요장군이, 도요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뭔가?
그럼에도 '반도사학은 번역하고, 해설'하면서... ...꿀을 훔쳐먹은 도둑고양이처럼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다.
* 또 명나라의 요청으로 군대를 퍼견, 오랑캐였던 후금과의 전투를 벌였던 '김응서와 그 휘하병사들이 전몰했다'는 "심하"는, 산해관 서쪽에 있다고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분들도 있다. 특히 '명과 청'으로 사신을 다녀왔던 연행일기에는 자주 목격되는 이야기다.
* "'심하'는 산해관 서쪽에 있다"는 라는 것이다.
* 물론 오늘날의 산해관 역시 가짜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산해관 땅이나 북경(연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놔두더라도... ...
* 그러나 반도사학계는 요지부동, 심하는 오늘날의 요녕성의 심양 주변에 있다고 하면서... ...어떤 분들은 이곳에 막걸리를 따라 놓고 애도한다고 하는 애국애족의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웃어야 될까?
한숨이 절도 나오는 때다.
* 정말 반도사학계는 변화가 없을까?
허긴 이걸 고대하는 것이야 말로 쓸모없는짓일게다. 자신들이 100년 동안 주장했던 것을 어떻게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나?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주제인 "발해(渤海)" 건은, 더 심한 "주제"다.
조선사에서 가장 문제되는'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반도사관, 식민사관 논자들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 '미친 자들이다'라고 손가락질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증거는 원문 원문이니, 그 고증 또한 원전 원문이다.
각종의 원전 원문에서는 : 발해의 위치에 대해 다소 차이는 있을 지 언정 : 오늘날의 '발해' 기록은 20세기 초에 재편찬과정을 거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늘의 발해는 그저 오늘의 발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