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1. 19세기말 조선의 백두산으로 추정되는 대광정자 (조선왕조를 통털어 백두산은 3~4번의 변동이 있었습니다)
(1) 두만강豆滿江 내계 (2) 두만강豆滿江 (3) 해란하海蘭河 (4) 훈춘강琿春江 ; 이상 滿江 수계
(5) 백두산白頭山 (6) 납림하拉林河 (7) 홀하강忽河江 (8) 수분하綏芬河
19세기말엽 위 백두산의 위치를 증언한 고지도 '조선국세견전도' (아래 주소 클릭)
http://www.coo2.net/bbs/data/con_4/Ogipaldo_north_compare_with_map.png
<< 고종의 애절한 호소도 외면한 현 정부 >>
"고종황제의 눈물겹고 애절한 호소를 더 이상 모른척 외면하지 마라!"
성훈 칼럼니스트
2009년 9월 4일은 청나라와 일제가 간도협약을 체결한 지 만 100년이 되는 날로, 간도를 돌려 받으려면 국제법상 추인 시효 만기가 이제 겨우 21개월 남아있을 뿐이다. 그때까지 한국 정부가 추인하지 않으면 간도는 중국 땅이 되어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된다.
제3자인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 청과 체결한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자체가 근본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이다. 왜 무효인지 아래와 같이 을사늑약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학교에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잃었다.”고 배웠다. 1905년의 사건은 <을사보호조약(保護條約)>인가 <을사늑약(乙巳勒約)>인가?
원래‘조약'이라 함은 국가간의 권리와 의무가 상호 협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또는 그런 조문, 협약, 협정, 선언, 각서, 의정서 따위를 말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을사늑약은 조약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이 결여되어 있고 특히 국가간의 합의가 아니라 일본의 강제에 따라 억지로 체결되었기에 <을사늑약>이라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1895년 일본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최대의 장애였던 명성황후를 욕보이며 시해한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일제는 당시에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 을사조약 등으로 불렀다. 이 늑약이 체결됨으로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말로는 보호국이라 하나 실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일본군을 동원해 궁궐을 포위한 상태에서 고종황제를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으나, 황제가 계속 거부하자 대신들을 불러 회유와 협박으로 압박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어낸다.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가 열렸으나 황제는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해버린 상태여서 5시간이 넘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이등박문은 병력을 동원하여 대신들을 위협한다.

결국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이등박문은 8명의 대신 중 5명이 찬성했으므로 조약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고, 같은 날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당시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문) 한국 정부 및 일본국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부강해 진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의 조항과 같이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금후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감리 및 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대하여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지금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 없이는 어떠한 국제적 성질을 가지는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한 명의 통감(레지던트 제너럴)을 두며, 통감은 모든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여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내알할 권리가 있다. 또한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레지던트)을 둘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주한국 일본영사의 업무에 속하던 모든 업무를 관장하며,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사무를 관리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고 보호 한다.
(결문) 이상의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본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날인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은 고종황제의 위임을 받지 못했다)
조약 체결 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등박문(이또오 히로부미)이 초대 통감이 되고, 조선은 일제의 실제적인 식민지가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까지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이 협약의 비준을 위한 위임장을 외부대신에게 주지 않으셨고 원문에 국새도 찍지 않으셨다. 을사늑약 원문을 보면 우측에 문서의 명칭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좌측에는 국새의 날인 없이 하야시공사와 조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이 찍혀있다. 이러한 문서가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사실 말 그대로 페이퍼(종이)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페이퍼를 근거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고, 결국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만다. 대가로 받은 것은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 등이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국서도 보내시고, 헤이그 밀사도 파견하시어 전 세계에 무효임을 알리신다. 당시 큰 효과는 없었으나 결국 이러한 고종황제의 노력은 나중에 국제법 학자들로부터 강박에 의한 체결이었고 고종황제께서 불법임과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렸기 때문에 을사늑약은 무효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호소문(국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조항 : 1905년 11월 17일 박제순과 하야시가 서명한 조약에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동의하지도 않았고, 또한 서명도 하지 않았다.
2.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일본의 언어로 공포된 조약의 조항들을 반대한다.
3.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한국의 주권을 선언하였고, 그 주권이 외국 강대국에 넘겨지는 어떤 조치도 반대한다.
4.조항 : 일본에 의해 공포된 조약에 관련된 조건은 외국 강대국들과 외교권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한국의 내정을 지배하는 일본의 장악을 결코 공인한 적이 없다.
5.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일본으로부터의 통감 지명을 결코 승인한 적이 없고, 한국에서 황제의 권한을 행사 할 일본인의 임명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6.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다른 강대국들이 한국의 외교 업무를 성의를 가지고 관장하는데 5년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 공동 보호로 활동하기를 초대한다.
한국 황제폐하의 손과 인장 하에서 마쳐짐.
1906년 1월 29일 을사늑약 반대할 것을 증명한다.
구구절절 고종황제의 비통한 심정과 애절한 호소가 눈물겹게 느껴진다. 나라가 비록 힘이 없어 늑약을 당해 강제적으로 외교권을 빼앗겼으나, 동의, 서명, 공인, 승인을 한 적이 없고 상상조차 하시지 않은 이 조약은 불법이고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신 것이다.

을사늑약이 무효인 이유를 정리해 보면
* 문서 자체가 법적 효력이 없는 단순 페이퍼이므로 무효이다.
* 상호조약이 아니라 무력을 앞세운 일방적인 늑약이므로 무효이다.
*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에 의해 무효이다. (카이로 선언과 중일평화조약)
*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시 무효로 이미 선언했다.
을사늑약은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에서 무효임을 확인하였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간도협약은 법적 권한이 없는 제3자가 임의로 체결한 조약이므로 효력이 없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를 대신한다는 을사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무효이다.
100년 동안 간도를 불법점거한 중국은 이제는 원래 주인인 한국에게 간도를 돌려주어야 마땅하다. 영국은 1997년 홍콩을 중국에게 깨끗이 돌려주었다. 영국은 그간 홍콩을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고, 그동안 이룩한 모든 부를 그대로 중국에게 넘겨줌으로서 중국은 세계 제1의 외환보유국이 되었고 세계 경제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홍콩이 반환됨으로서 엄청난 이익을 본 중국이 이제는 한국에게 간도땅을 돌려주어야 할 차례이다. 홍콩을 돌려받을 때는 조약을 앞세우고, 간도를 돌려줄 때는 힘으로 계속 차지하겠다고는 못할 것이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우선 기한 내에 반드시 추인을 하고 중국이 반환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국제 사회에 알려야 한다. 현 U.N의 수장은 대한민국의 반기문총장이다. 반총장이 그 자리에 있을 때 간도 문제가 U.N 차원에서 해결되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에게 간도땅을 돌려받으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력도 키워야 하고 자체 힘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재정립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 시효 전에 추인이라도 해야 한다.
어차피 못 돌려받는다고 지레짐작하고 또 중국과의 외교 마찰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추인조차 안 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잘만 노력하면 되찾을 수 있는 엄청난 국익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나약하고 한심한 정부가 안 되었으면 하는 게 국민의 바램이다. 다음 정권에서는 반드시 간도반환 추인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고종황제의 눈물겹고 애절한 호소를 더 이상 모른척 외면하지 마라
출처 - 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10&dir_id=10&eid=0Gb6FeYq3ZyGEdYlUSoOsElyjdKtf5Sl&qb=wLu757TBvuA=
이 내용 꼭 잘 읽어 보십시오. 을사늑약은 이미 2차대전 종결후 체결되었고
무효이니 우리는 앞에 기회가 있으면서도 놓고보고만 있습니다.
모두가 맞는 말 입니다. 이글이 많이 배포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지난번에 이 글을 청와대 사이트 게시판에 올려보기도 했는데.....
대통령님과 반기문 총장님 한테 메일로 보내줘 볼까 생각 입니다. 너무 나대는걸까...
문제는 지금 대통령은 친일적이고 대북정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더군요.
반기문 총장님은 잘 모르겠지만...
첫댓글 자유게시판에 두기엔 분명히 논란거리의 여지가 있으므로 토론 게시판으로 이동합니다.
1. 간도가 조선령이라는 점에 대한 입증 필요. 2. 영국의 홍콩반환은 애초에 점거할 때 99년 기한으로 조차한 것이라 당연히 반환해야함. 3. 그리고 법의 경우엔 원칙적으로 소급이 안 되는 걸로 압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조약을 법과 동일한 레벨로 두고 있습니다...
출처가 coo2 넷이라는 점에서 심각히 에러...-_- 참고로 무슨 ..추인시효만기 있다는거...그런거 없습니다 -_-
오오 coo2 오오
도데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시대 가장 정확한 지도중 하나라는 대동여지도는 물말아드시고 이상한 외국 눈퍼런놈이 쓴 지도는 잘 믿지? 그럼 김정호가 왜 간도를 안그린거?
당시 세계 최강의 정보조직에 의한 일제의 조작
서양지도 중에 간도가 한국땅처럼 표시된게 카톨릭 교구를 표시한 지도 정도인데,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었으니만큼 조선교구에 그 땅들이 포함되는 것은 실제 국경선과 관계없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걸 두고 또 실제 영토가 아랬다느니 이러쿵 저러콩 하는걸 보면 그냥 한숨만..
영국의 99년 조차는 사실 무기한이었습니다만... 중국이 강해지다보니 영국이 양보한거;
홍콩섬에 대한 조차는 무기한, 구룡반도는 99년이었는데 이후 협상에서 한꺼번에 되돌려받기로 했던 것이죠.
구룡반도가 없는 홍콩은 다소 실익이 떨어진다고 영국이 보았기 때문에; 구룡반도의 99년도 상징적 의미이고, 실제로는 무제한의 의미;
그때야 99년... 아니면 적어도 중간 쯤에 다시 중국을 털어먹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죠(...)
99년이라는 기간은 엄연한 법률적 효력을 지니고 있는 조차 조약상의 내용입니다. 그냥 영국의 의도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무제한 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는 없죠.
구룡반도는 자세히 말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 영구할양, 1856년 베이징조약으로 구룡반도와 스톤캐터스 섬을 추가로 할양(이것역시 영구할양)..1898년에는 홍콩경계확장조약으로 주변의 신계지와 235개의 부속 도서를 99년간 조차.. 그러니까 정말로 돌려주어야 하는 건 신계지였습니다. 그리고 홍콩과 구룡반도,스톤캐터스 섬의 경우는 영구할양입니다. 그런데 신계지라 말하기보다는 구룡반도일대라고 하지요. 엄밀히 말해 홍콩의 80% 정도가 신계지이고, 이른바 홍콩시가지인 구룡반도(좁은의미)와 홍콩은 20%정도입니다.
제가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홍콩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하는 지역의 대부분(홍콩 주민의 주거주지)이 99년이라는 조차기간을 가진 지역이고 나머지 부분이 영구 할양된 지역입니다. 결국 홍콩은 '사실상' 99년간 조차된 지역이라는 말은 성립하지만 사실상 할양된 지역이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가 없습니다. 자은님께서 쓰신 글을 잘 한번 읽어보십시오. 님께서 나열하신 사실들이 99년간의 조차가 사실상 무기한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가 있는지...
님께서 나열하신 근거는 오히려 우리가 흔히 할양되었다고 생각하는 홍콩이 사실은 조차된 지역이라는 근거는 될지언정 99년이 사실상 무기한이라는 얘기가 될수는 없습니다.
사실상 무기한이라고 해야 겠네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잘 못 말한 듯 합니다. 그런데, 제 얘기는 <우리가 흔히 할양되었다고 생각하는 홍콩이 사실은 조차된 지역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홍콩,구룡반도, 스톤캐터스 섬등은 영구할양된 거고, 이른바 신계지가 돌려주어야 했는거가 되는 거죠. 홍콩, 구룡반도(구룡반도의 일부만을 말하는 겁니다. - 1856년으로 영국이 획득한..)의 경우는 할양이 맞고, 1898년 홍콩경계확장으로 영국이 99년간 조차한 신계지는 '사실상' 무기한의 조차라 할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신계지(넓은 의미의 구룡반도)가 조차 된 거라고 했지.. 할양된 의미라고는 안했습니다.
<홍콩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하는 지역의 대부분(홍콩 주민의 주거주지)이 99년이라는 조차기간을 가진 지역이고 나머지 부분이 영구 할양된 지역입니다. >는 다소 잘못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홍콩시가지로 생각하는 곳이 초기에 영국이 영구할양 받은 곳이고, (홍콩과 좁은 의미의 구룡반도), 나머지 홍콩으로 별로 생각안한 80%의 지역이 신계지라는 것입니다. (이게 넓은 의미의 구룡반도) .. 쉽게 생각해서 시가지가 초기 할양받은 홍콩이고, 변두리는 99년간 '조차'된 신계지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홍콩이 사실상 '99년'간 조차된 말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조차는 신계지에 한정된 겁니다.(홍콩은 150년 넘었습니다.;)
신계는 실제로 홍콩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주거지입니다. 홍콩전체를 봤을때 가장 중요한 지역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홍콩을 할양지역이 아닌 사실상 조차지역이라고 볼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다운타운을 핵심이라고 본다면 결론은 달라지겠으나 자은님께서 99년이라는 조차를 사실상 무기한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99년이 사실상 무기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영국측의 조약체결 당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주장하셔야 할 부분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 당사자가 맺은 조약의 효력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99년이라는 신계지역의 조차기간은 법률적 효력이 명확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97년에 중국의 국력과 상관없이 반환할 수 밖에 없었고 원래 영구 할양이었던 홍콩의 중심부는 주거지 상실에 따른 가치 상실로 어쩔 수 없이 반납한 게 맞습니다. 조약 체결 당시 영국이 중국이 영원히 약소국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해서 99년을 사실상 무기한으로 생각했을 수는 있으나 그 부분은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할 부분이지 님께서 제시하신 할양 및 조차과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그 부분입니다. 물론 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의도는 저도 알지만 사소한 댓글이라도 토론에 관련된 부분은 엄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린겁니다. 기분나쁘게 생각하시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저랑 토곡오도님 의견중에 결정적으로 다른 건 바로 신계가 어느정도 위치인가에 대한 것인가 생각됩니다. 확실히 님의 의견대로 <조약 체결 당시 영국이 중국이 영원히 약소국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해서 99년을 사실상 무기한으로 생각했을 수는 있으나 그 부분은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할 부분이지 님께서 제시하신 할양 및 조차과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라는 의견은 맞는 의견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신계가 가장 중요한 지역이어서 홍콩을 할양지역이 아닌 사실상 조차지역이라고 볼수 있다는 겁니다.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님의 의견대로 신계는 확실히 99년 조차일수 있으나,. 홍콩은 사실상의 조차지라고 볼수는 없습니다. 현재 홍콩이 반환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협상의 결과입니다. 영국은 홍콩에서의 현상유지를 원했기 때문에 영구할양 지역인 홍콩과 구룡반도(좁은의미)까지를 중국에게 주었던 거지. 홍콩과 구룡반도(좁은의미)가 조차지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 사족이 되겠지만 99년의 조차기간이 맞다고 보더라도 그것이 조차기간이 끝난후 연장을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던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국력과 상관없이 반환할수 밖에 없다는 말도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다른분들이 보시기에 별것 아닌 것 가지고 너무 오버한다고 하실 것 같아 살짝 염려되지만... ^^ 이왕 얘기가 나온 거니 끝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최초에 자은님이 다신 댓글-영국의 99년 조차는 사실상 무기한 이었습니다만...-에 대한 근거로서 님께서 제시하신 내용이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제가 이야기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 이후의 댓글에서 "우리가 흔히 할양되었다고 생각하는 홍콩이 사실은 조차된 지역이다" 라고 한것은 그것을 제가 주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님께서 제시하신 자료에서 도출할수 있는 결론 중의 하나로 예시한 것입니다. 즉 홍콩의 할양과정에서는 99년이 무기한이라는결론이 아닌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얘기한 것은 도시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실제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주거지라는 전제가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전제는 부정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제가 댓글에서 밝힌바 그대로 입니다. 요약하면 홍콩의 중심지역은 할양지역이고 주변의 주거지역은 99년 조차지역이다라는 사실 + 주거지역이
그 지역의 핵심이다라는 추가 전제에서 나온 결론인 겁니다. 오늘날 홍콩이라 불리는 지역은 조차지와 할양지역이 합쳐져 있으나 저는 조차지역인 신계를 더 중요하게 볼 수 있으므로 홍콩전체는 '사실상' 조차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결론을 가능한 한 예로써 든겁니다. 또한 님께서는 신계를 홍콩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 그런 관점에서 보신다면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논리전개 과정을 말씀드리는 것이지 홍콩이 사실상 조차지라고 볼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다. 사실 그 부분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도 아니구요. 신계가 99년간의 조차지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 사실입니다.
조약에 명문으로 들어가 있으니까요. 그것이 이후에 조약 종료 후 다시 추가로 연장될 수 있다는 것과 99년이 무기한을 의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중국이 80년대에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99년의 조차기간이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영구 할양된 홍콩 중심부를 유지하기 위해 신계의 조차기간을 연장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국력과 연관이 될 수 있으나 신계 자체의 99년 조차라는 기간은 영국이 깡패짓을 하지 않는한 지킬 수 밖에 없는 법조항이죠. 반환 협상당시 및 이후 90년대의 국제적인 상황은 중국이 약소국이었더라도 영국이 조약을 조항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무법적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잡설의 결론을 맺자면 --; 님께서 다신 댓글은 보통 사람들이 홍콩이 조차와 할양이라는 두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복합적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부분을 지적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그 제시된 내용이 최초의 주장부분과 별로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한것이 이렇게 점점 다른길로 빠져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말꼬리 잡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님께서 제시하신 정보가 카페에 유용한 정보이나 별도의 글을 쓰셨거나 아니면 그냥 논지와 상관없이 홍콩에 대한 정보로서 제시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고하세요.
처음 99년 조차가 무기한이었다는 건 ,, 그것을 책에서 읽은 내용이긴 하지만, 그 출처를 찾아내지 못해서 김지수님의 의견이나 투곡오도님의 의견이 나온후 철회-또는 그 출처가 나올때까지 보류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것을 고치지 않은 것은 뒤의 댓글들이 이상해질것 같아서이고요; 투곡오도님 밑에 단 댓글들은 이미 99년 조차가 무기한이라는 내용이랑 전혀다른 쪽으로 쓴 거였습니다;.. 참고사항이나 그런 식으로 추가해서 적은건데,.. 자꾸 홍콩이 조차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글이 길어졌던 것이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투곡오도님이 댓글이 달린 시점부터 99년조차가 무기한이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댓글에 댓글로 이어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말꼬리 잡는 것 같은 분위기도 되고...암튼 자은님의 의도를 충분히 알았고(철회 내지 유보라고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제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저도 제 의도를 다 말씀드린 것 같으니 여기에서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암튼 별로 중요하진 않은 내용을 가지고 길게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이 간도 문제란게 생각보다 오래된 것 같긴 하더군요. 조선이라고 하면 보통 유약하고, 중국에 벌벌 기던 나라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간도 문제를 두고선 오히려 중국땅을 분쟁지역화시켜서 집어먹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하영 개인의 회고록에만 등장하는 것이라 신빙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1887년엔 만주정복을 위해 200만달러 차관을 얻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 이후로도 간도가 우리땅이란 인식도 계속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복 직후 북한이 중국공산당과 가진 회담에서 김무정이 말하길 "우리가 중국 혁명에 협조한 바가 많으니 간도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 고 말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과, 법적으로 을사조약이 무효이고, 원래부터 우리땅이니 당연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별개지만요.
음, 예전부터 우리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이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인식은 존재했습니다. 1901년 3월 한국 정부는 변계경무서를 회령에 설치하여 거류 한국인에 대해 경찰권을 행사하려 했으며 그런 가운데 10월 경무관 이경순 등이 간도로 가서 한국인의 관리를 시도하였고, 한국 경무관은 1903년 6월 한국인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향약을 실시했습니다. 한편 내무대신 김규홍은 간도는 명백히 한국영토이므로 토지를 측량하고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우선 보호관을 간도에 파견해야 할 것을 의정부에 건의 하여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게 하였습니다.
이범윤은 간도를 함경북도 행정구역의 일부로 편입시켜 영유권을 확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국병사가 한국인을 학대하자 한국군은 강을 건너가서 교전끝에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간도문제는 한-청 사이의 현안으로 계속 남게 되었죠. 특히 한국의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용익은 간도가 한국영토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용익은 친중국 노선이 아니라서요.;(중국과의 관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인물)
좀 더 정확한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8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여기 북간도에 관련된 내용).. 고종 22권, 22년(1885 을유 / 청 광서(光緖) 11년) 7월 30일(병인) 1번째기사 :토문 땅의 국경 문제로 이중하와 조창식을 파견하여 협상 처리하도록 하다.. 고종 24권, 24년(1887 정해 / 청 광서(光緖) 13년) 3월 4일(임진) 1번째기사 덕원 부사 이중하가 상소를 올려 경계 문제를 보고하다(더 자세히는 조선왕조실록 읽어보시길.)
순조때까지도 그런 주장은 계속 나왔는데,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3월 18일(양력) 2번째기사 간도내사 임시 교부금, 인삼 경작 장려 경비 등을 예비금에서 지출하도록 하다/.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4월 12일(양력) 1번째기사 간도에 직원을 파견하는 문제를 비준하다/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10월 20일(양력) 1번째기사 세출입 추가액 항목 설정, 간도 학교 건축비 등을 예비금에서 지출하도록 하다
지도는 본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지금의 위치가 아닌 더 북쪽에 있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간도라는 주장이 있는것이죠. 백두산도 지금의 위치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다는 추정이 되고 있고요. 1번 사진 말입니다.
설령 저 많은 영토가 조선땅이었다고 쳐도 우리나라 정부가 그를 되찾을 아무런 방법이 없죠. 북한과 중국은 1962년 체결한 조중변계조약에서 영토선을 명확하게 확정을 하였고 그것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조약이므로 ...만약에 통일이 된다면 남한정부는 그를 승계할 의무가 있죠.
굳이 이 조약이 아니더라도 중국정부가 주먹한번 들면 우리나라 정부는 깨갱해야 합니다. 이거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그리고 영토에 대한 권리는 뺏기는 순간 끝납니다. 그것이 합법적이었던 불법적이었던..(일본이 아무리 쇼를 해봐짜 러시아로부터 영토를 반환 못받는 것과 같은 상황이겠죠.)
조중변계조약은 비밀조약이라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추측 할뿐이죠;
애초엔 비밀조약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나올수 있는 내용은 모두 나오지 않았습니까? 뭐 중국측에서 의도적으로 흘렸을수도 있고.. (조약의 내용상 보면 김일성놈이 국가는 엉망으로 운영했을라나는 몰라도 외교력이 개미 눈물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법이라는 것은 그 조약이 체결될 당시의 권력구조라는 배경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걸 빼놓은채 단지 법적논리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라든가, 한일합방이 무효라는 식의 주장은, 아쉽지만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간도 떡밥... 어렸을때 많이 낚였는데
디시역갤에서 대륙빠들이 간도를 우리땅이라 주장하는 근거로 드는 것이 청이 봉금령을 내려 영유권을 포기했다는 것인데 그 봉금령이라는게 애초에 자신의 영토였으니까 내리는게 가능했던게 아님? 그리고 조선 공도정책무시하나효? 봉금령이 만주포기한거면 울릉도,독도는 일본땅인가효?
저 간도규모는 과장된 듯,어느 지도에서 녹둔도를 청왕조발원지까지 영역확대시킨 것을 본적있는데 그때 옆에 붙어있던 간도크기도 저만했음.
간도협약 무효화 하면 흔히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간도가 우리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도협약이 있기전에 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영토가 어딘지 어디까지가 간도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죠. (사실상 간도협약 무효화를 해도 간도는 우리땅으로 바로 되지 않음) 그리고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간도협약, 간도가 우리땅(?) 이라는 문제는 연관이 있긴 하지만 다른 문제죠;
제가 이전에도 몇번 언급했지만 간도는 조선땅이었다는 근거도 없고(단지 분쟁중이 었다는 정도의 근거만 있음)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국제법상 무효라고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간도협약과 이후 조중 국경협약으로 중국영토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행 국제법의 근거가 뒤흔들릴만한 사건(세계 대전 내지 서구권의 완전 몰락 등) 이 없는 한 달라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터넷상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각종 근거없는 루머(100년이 지나면 영토권이 넘어 간다는 등의)를 퍼트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어설픈 민족주의를 통해 뻘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참 불쌍합니다. 현실에서 우리의 국력을 키워 힘을 발휘하자는 게 아니라 과거의 영광이 이러저러했다며 대리만족이나 느끼고 있는 그네들이 참 어이없습니다. 독도에 대해서는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면서 간도에 대해서는 인정안하는 이중적인 작태가 한심스럽습니다.
간도는....이미 물건너간 땅이 아닐까요;;; 저기서 말하는 100년이란,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100년 이상 어떠한 영토를 점거하고 있을 시에 그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한다 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인것 같은데요, 뭐 시한이 남아있다고 치더라도, 저땅을 반환받는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U.N 상임이사국 중에 중국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게다가 중국의 '회유정책'-이렇게 부르는게 맞는건가요? 때문에 간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사람이 다 돼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