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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어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수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왕하23:4-5)
(10)현대 방언(方言)은 지역 언어인가? 알아듣지 못할 잡소리인가?
“그런데 우리 각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 우리의 언어로 듣게된 것이 어찌된 일인가”(행2:8 KJVB)
방언(方言)은 당시 지역에서 언어로 활용하는 말들이었다. 초기 바벨탑을 쌓을 때는 ‘하나의 언어’(창11:1)이였으나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케하셔서 혼잡이라 ‘바벨’이 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이방 지역 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120여명의 성도들이 16개 지역에서 흩어져 살다가 오순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교도들에게 그들이 알아듣는 말(방언들)로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큰 일)를 증거한 언어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방언이란 온 세계에서 사용중인 언어의 한 부분일 뿐 소위 은사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속살거림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잡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의미없는 잡소리를 부인하되 성령님과 성령님의 은사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료되면서 이미 폐해졌다. 현대 방언주의자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과 연합하고 있는 악령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오랄 로버츠, 베니 힌, 짐 베이커, 펫 로버트슨과 한국의 조 목사등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 교황을 영접한 자거나 로마 카톨릭과 연합한 증거들이 있다.
(11) 추도예배는 성경적인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전하신 바,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22:31-32 KJVB)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고”(눅9:60 KJVB)라고 말씀하셨다. 추모제, 추모일, 조상숭배, 제사에서 유래된 것이 추도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인데 조상 죽은 날을 기념하여 조상을 기억하며(추모하며), 예배하는 것은 귀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전10:21)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죽은 자를 성인식하고 월요일은 천국의 성인성녀, 화요일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념하는 ‘축일(祝日-festum)’이 있다. 여기서 추도예배가 유래했다. 성경에는 추도예배 명령이 없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만 있을 뿐이다.
(12) 주기도문(Lord's Prayer) 암송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모양으로 기도하라”(마6:9)(After this manner-KJVB)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에 기도문을 암송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런 형식으로 하라고 원칙만 가르치셨고 그 기도는 골고다에서 이루어졌다.
‘기도문’이란 용어 자체가 로마 카톨릭적이다. 초대교회는 주기도문 암송이 없었다. 로마 카톨릭은 구도(口禱)와 염도(念禱)가 있고 입으로 기도문을 암송하는 행위는 주문종교, 즉 죽은 의문(儀文) 종교이다. 여기서 ‘기도문’이란 용어는 습관적 암송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다만 습관적으로 암송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기도만 할 것인가?
(13) 사도신경의 ‘공회(公會)’와 ‘성도들의 교통’은?
사도들이 만들었다는 신앙조문은 고대 로마 신조(Symbolum Apostolrum)에서 유래되었다. 사도신경의 최종완결자는 로마 카톨릭의 피르민(Pirmin)이였다. 거룩한 공회는 라틴어의 ‘거룩하고 공인된 교회(catholican-라틴어)’를 뜻한다. 카톨릭(Catholic)이란 용어는 고대 바벨론 용어이다. 이것이 오늘날 로마 카톨릭(Catholice Church)을 뜻하기 때문에 암송해야할 필요가 없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을 본래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Sanctorum communionem-라틴어)라는 말에서 나왔기 때문에 카톨릭은 죽은 성인들과 교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톨릭은 죽은 다음 성인식하고 그 성인들의 영혼과 교통한다는 영매술, 초혼술(신18:10, 레20:27)에 해당하기 때문에 암송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중요한 교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일부이다. 또 통공(通功)이라는 카톨릭 의식은 카톨릭의 교리인 이 세상 신전교회, 연옥에 있는 망령교회, 하늘에 있는 개선교회 신도들이 서로 기도하여 공(功)을 나눈다는 뜻도 들어있다. 왜냐면 카톨릭교도는 공을 쌓아 의인이 되는데 모자란 공력을 죽은 성인들에게 빌려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즉 공을 나눠갖는 것이다.
(14) 크리스마스(Christmas)는?
“...너희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가 되게 하는도다”(마15:6 KJVB)
12월 22일에 동짓날 해가 짧아서 태양이 죽었다고 믿었고 25일날 태양이 살았다고 믿어 태양신 생일이 되었는데, 12월 25일은 본래 로마의 태양신 솔(sol)의 기념일이란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예수님은 10월 초순 들판에 양떼들이 양을 방목할 때였고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시기였다. 그러나 성탄 생일을 기념하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 카톨릭이 만들어 놓은 유전일 뿐이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트(그리스도)를 미사(Mass)한다는 합성어로 12월 24일 로마 카톨릭이 미사 드리는 풍습이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완전히 카톨릭 용어이다. 미사는 가증한 바벨론 인신제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개신교에는 미사가 없다.
(15)산타클로스(Santa Clause)의 풍습은?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밭(교회)에 독보리들을 뿌리고 가버렸으나”(마13:25KJVB)
산타클로스는 본래 로마 카톨릭의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12월 6일)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신부였는데 가난해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가정의 여자의 결혼 자금을 넣어준 것이 선행의 기념이 되어 그가 죽은 서기 352년 12월 6일을 기념하여 시작된 풍습이다.
니콜라오는 라틴어로 상투 니콜라우스(Santus Nicholas)이며 영어로는 세인트 니콜라스(Saint Nicholas)로 불렸으나 네덜란드인들은 ‘산 니콜라이스(San Nicholaas)’이며 신대륙(미국)에 이주해서는 산테 클라아스(Sannte Klaas)로 부른 것이 발음의 계기가 되어 ‘산타 클로스’로 부르게 되었다.
그 형상은 이집트 사랑의 신 ‘베스’와 합성되어 오늘날에 유래한 풍습으로서 성경이나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산타(Santa)의 어원은 사탄(Satan)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16) 십자군(十字軍-Crusades)은?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싸움을 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생활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택해 주신 분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KJVB)
성경은 어떤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군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군(十字軍-Crusades)’은 그 용어와 출발부터가 사단적이고 부정적이다. 우선 십자가 형상은 바벨론 태양신 숭배의 이교상징으로 신약의 헬라어는 십자가가 아닌 나무기둥을 뜻하는 ‘스타우로스(στανροξ-stauros)였다(갈3:13, 벧전2:24).
두 번째 ‘십자군’은 서기 1096년 로마 교황 울반 11세가 성지를 탈환하려고 조직한 로마 카톨릭 교황 군대였을뿐 주 예수님의 군대는 아니었다. 그런 십자군은 수차례 유대인, 그리스도인, 아랍인들을 학살했고 소년 십자군을 모집하여 아랍에 노예로 팔아버렸던, 사악한 교황의 군대인 사단의 군대였다.
그런데도 오늘 C.C.C.(캠퍼스 크리스챤 크루세이더)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진실한 성도들은 십자군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십자군(Crusades)를 세우신 사실이 없다.
“너희는 이전 행실에 관하여는 속임으로 가득한 정욕들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너희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었느니라”(엡4:22-24 KJVB)
(17)교독문 암송은?
“또한 그 분은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들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영으로 하신 것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로되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KJVB)
주일예배 시간에 사회자와 회중이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고백하는 것은 긍정적이고 좋은 일이겠으나 그것이 형식이 되고 의식이 되어 사람의 유전, 더구나 로마 카톨릭의 유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과감하게 개혁을 해야할 것이다.
본래 교독문(交讀文-Responsorium-라틴어)을 로마 카톨릭 수도사(신부계통)였던 베네딕토(Benedictus 480? 550?)가 수도사를 모아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그 이름을 따서 후에 베네딕토 2세 교황에서부터 제 14대 베네딕토 14세 교황까지 출현했는데 교독문을 베네딕토회칙(rule of St Benedict)과 380년 암부르시우스(Ambrosius) 회칙에 나타나 있다.
교독문은 로마 카톨릭에서 만든 의식이었다. 로마 카톨릭은 사제와 회중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문에 교독문 의식이 나온 것이다. 초기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은 교독문 암송이 없었다. 교독문 암송이야말로 대표적인 형식인 것이다.
(18)목사가 손들고 하는 축도(Benediction)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가로되”(왕상8:22, 54)
성경에 남자들도 거룩한 손을 들어(딤전2:8)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솔로몬이 손을 드는 것은 하늘과 세상의 중보를 뜻한다. 모세나 솔로몬이 손을 들고 기도한 것은 세상과 하나님의 중보이신(딤전2:5-6)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현재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진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이 손들고 축도하는 행위는 로마 카톨릭 신부들이 십자가를 그으며 축도하는 ‘강보’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는 특정인 목사에게 축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직접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축도가 로마 카톨릭에서 나왔기 때문에 교황 베네딕토2-14세까지의 이름을 따서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의 축도를 라틴어로는 ‘베네딕토(Benedicto)’ 또는 ‘베네딕션(Benediction)’이라는 뜻의 축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딕토는 카톨릭 신부였다. 예수님은 승천 이후 날마다 기도하고 계신다(히7:25, 롬8:34).
(19)목사의 까운과 스톨의 유래는?
“오히려 그들의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니, 곧 가죽 성구함을 넓게 만들어 지니고, 옷단을 넓혀 입느니라”(마23:5 KJVB)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입는 까운과 스톨(후드)과 신부들의 제복은 그 출처가 어디인가? 로마 카톨릭은 ‘수탄(Soutane)’이라는 긴 사제의복을 입는데 그 옷은 본래 로마의 이교사제들이 입었던 제의(祭衣)로 사제복은 1251년 마리아 계시를 받아 입게되었다고 한다.
“내가...바알의 남아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Chemarims)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스바냐1:4)
여기서 ‘그마림’이란 검은 겉옷을 입은 제사장을 뜻한다. 특히 검은 색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에 신부들이 미사할 때 검은 사제복을 입고 하는데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들이 검은 까운을 입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바벨론 이교사제복인 것이다.
제수이트(Jesuits)들의 제복이 검은 색이다. 그러므로 검은 교황(Black Pope)이라 부르고 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스톨(후드) 역시 계시록의 자주색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은 음녀와 같이 모두 로마 카톨릭의 유산들이다.
(20)예배시간 타임종(bell)치는 의식의 유래는?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18:10-11)
벨(bell)은 바알(baal)에서 유래한 이교숭배 풍습에서 온 이름이다. 바벨(Ba-bell)-바알(Baal)-벨(Bel)-벨알(Bellal)-벨(Bell) 순으로 이어져 왔는데 태양신(Aryan Sun god) 숭배에서 유래한 것이다.
모든 종교에는 종(鍾)이 있다. 불교에서도 절 안에 종이 있다. 회교에도 무속 종교에도 종이 있고 아프리카 부족들에게도 종이 있다.
종이 없으면 북이 있는데 이러한 이교숭배 의식은 ‘종’을 울리면 神이 왔다가 종을 다시 치면 神이 떠난다는 ‘초혼자, 영매술’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무당은 귀신을 불러내고 다시 보낸다. 신접자 여인이 사무엘로 가장한 귀신을 불러낸 사건을 기억하자(삼상28:8-14). 이런 풍습이 바티칸 카톨릭에 스며들어 성당에 종탑이 있고 종이 있는 것이다.
이교풍습에서 나온 종음악(Quattor)이란 것도 여기서 출발하여 주로 로마 카톨릭 ‘미사’ 때에 사용한다. 개신교 예배시간에 종을 치는 것이나 챠임벨 종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내 안에 인치신 성령께서 어떻게 종소리 듣고 왔다가 가는가? 이것은 귀신을 불러내는 풍습에서온 가증한 의식이다. 찬송가에 있는 ‘황금종을 치네’(226장)도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종이 없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삼종(三鐘) 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기도하기 전 ‘땡땡땡’ 세 번 또 쉬었다가 세 번, 그리고 기도 후 세 번 종을 친다.
11세기 십자군 시대부터 시작된 이 의식이 만종(晩鐘)으로 저녁에만 치다가 ‘새벽종’으로 변했다. 밀레의 ‘만종’도 카톨릭 유품이다.
▲ 미국 자유의 종(벨-Bel)은 바벨탑(Ba-Bel)과 가나안의 태양신 바알(Baal) 숭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1) 헌금자루 돌리는 의식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치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앞에 두매 무릇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는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왕하12:9)
“예수님께서 연보함 맞은 편에 앉으시어 백성이 그 연보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실 때에...”(막12:41 KJVB)
본래 성경은 ‘헌금함’을 성전 제단 옆에 두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 뜰에 연보궤가 있었다. 구약에도 연보궤의 구멍을 뚫어 헌금했고 신약에도 헌금함에 자유롭게 헌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당마다 헌금채 또는 헌금함을 돌리고 있다. 사실 헌금 바구니를 개인 앞으로 돌리는 행위는 로마 카톨릭이 세워진 4세기경부터 로마 카톨릭에서 미사(Mass)에 쓸 빵, 포도주의 봉헌 대신 헌금을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교회당에서 헌금함 돌리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유전이다. 많은 교회들이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마23:24)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22. 십일조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18:21)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감사의 외적표현이었고 야곱은 약속이였으며(창14:20, 28:22) 레위인은 기업(직업)을 갖지 못하고 날마다 성전에서 속죄의식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아스라엘 열한지파들이 십일조를 거두어 먹여 살리기 위해 십일조가 명령되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이후 돌아온 이스라엘이 십일조 훈련이 되지 않아 레위인들이 배곯아 들과 밭으로 도망을 치자, 이에 느헤미야는 책망하였고(느10:37, 13:10-12), 훗날 말라기가 역시 책망하였으며(말3장)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기 전까지도 유효하였으나(마23:23) 골고다에서 피흘리신 이후 휘장이 찢겨짐으로 율법도 레위인의 사역도 끝나버렸기에(마27:51-52) 율법의 십일조는 끝이 났고 오늘날은 교회에서 연보(감사헌금)만 있을 뿐이다(고전16:1-9). 지금도 말라기 말씀으로 십일조를 뺏어 먹는 자들은 종교적 강도들이다. 돈이 아닌 것은 ‘진리대로 성경대로’라고 외치지만, 돈(맘몬-mamon-재물의 神)의 신(god)은 계속 섬기고 있다.
(23) 주여 삼창과 새벽, 통성기도는?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35:13)
구약시대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렘33:3)는 말씀 등은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오늘날은 통성기도만 했다하면 ‘주여’ 삼창을 하고 아수라장같이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푸는 난장판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감성적 부흥사들이 산에서 부흥회에서 쌓인 한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주여 삼창 기도와 통성기도가 생겨났다.
오늘날 무당적 사고 방식을 가진 기독교 무당들인 미신적 부흥사들이 창안해 낸 스트레스 해소식 방법중에 하나일 뿐 결코 성경적인 기도는 아니다. 진실로 통회자복한 자는 말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새벽기도 역시 한국교회의 작품이다. 길선주 목사가 창안한 새벽기도는 산에서 물 떠올리고 백일기도하는 풍습과 약간 유사하다. 그러나 기도는 새벽뿐 아니라 저녁, 낮에도 항상 해야할 것이다.
어디에서인가? 기도원이 山에 있는데 구약에는 산당(왕하17:9)이 있었다. 기도는 영과 진리로 가슴에서 항상 드리는 것이다. 즉 심령의 기도원에서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24) 종탑(Campanile)의 유래는?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太陽柱像)을 찍어 넘기며...”(레26:30)
주상(柱像)이란 돌기둥(石柱)을 말하는 것으로 오벨리스크(Obelisk)를 뜻한다. 오벨리스크는 남성상징으로 음란의 상징이며 또한 태양신 숭배에서 유래하였다.
‘벧세메스’(삼상6:10-16)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태양의 집’이란 뜻이며, 헬라어로는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고 하는데 요셉시대에는 ‘온’ 제사장이 있었음같이 ‘온’으로 불리웠다(렘43:13). 이 오벨리스크는 뾰죡한 돌탑으로서 현재 로마 바티칸 베드로 성당 광장 가운데 있는 석주로 이집트에서 옮겨온 것이며 뉴욕 중앙공원 워싱턴 메모리얼탑, 파리 등 전 세계에 확산되어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성적 상징으로서 모든 종교 즉 회교신전의 탑, 불교의 석탑, 다보탑, 그리고 중국, 일본, 세계 모든 이방종교에 탑이 모두 태양상에서 유래했고 남성상징으로서 히브리어로는 ‘마트스트세바(matstsebah)’로 그 뜻은 ‘서 있는 형상’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 성당의 탑이 되었고 오늘날 개신교에 우뚝 속은 종탑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추리나 오벨리스크 종탑, 바벨탑은 모두 태양신 숭배와 남성심볼에 근원을 두고 있다(왕상14:23, 왕하18:4, 23:14, 미5:13).
또 다른 원어는 함마님(Hammanim)인데 ‘태양주상’이란 뜻으로 태양에 바친 것이 오벨리스크이다(사17:8, 27:9). 여신 아쉬타르(Astart)라는 뜻의 일부는 ‘탑을 만든 여자’란 뜻이 들어있고 여신 시벨리(Cybele)는 ‘탑을 쓴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파고다 공원(Pagoda)’이 있는데 중국인의 종교에서 탑은 ‘파고다(Pagoda)’로서 그 어원이 여신(女神)이란 뜻이다. ‘파고다’라는 말은 탑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로 3가에 탑이 있기 때문에 파고다 공원이라고 일컬어 진 것이다. 이런 탑이 교회당 탑으로 불리워진 시기는 바로 6세기경 이태리 성당에서부터 였다.
오늘날 교회 종탑은 바벨론 태양신 주상 오벨리스크(Obelisks)에서 유래하였다. 워싱턴과 바티칸의 오벨리스크와 파리 에펠탑은 모두 3200년 전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섬기던 유물들이며 남성 심벌을 상징한다.
(25)십자가(十字架-Cross) 형상의 출원지는?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본래 성경의 사형틀은 모두 나무기둥(스타우로스-Stauros)이였고, 그 어원인 스타(Sta)는 ‘선다(To stand)’란 뜻으로 십자가(Cross)는 아니었다. 구약에는 십자가가 등장한 적이 없고 모두 ‘서있는 나무기둥’으로 나타나 있다. 신약의 헬라어에도 모두 나무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십자가’란 원어는 없다.
하만의 50규빗 장대(에5:14),모세의 장대(민21:8) 역시 서있는 나무일 뿐이다.
바울이 말한 십자가는 모두 헬라오의 스타우로(στανροω) 즉 나무기둥으로 나타나 있는데 영어성경은 ‘Cross’로 우리말 성경에서 ‘십자가’로 번역했고 심지어 헬라어 원어에서 번역했다는 성경에서 조차 모두 십자가로 잘못 번역했다(고전 1:13, 23, 17, 2:2, 8, 갈5:11, 6:12, 14, 엡1:26, 빌2:8, 3:18, 골1:20, 2:1, 히6:6, 12:2, 갈3:1, 5:24, 고후13:4, 계11:8, 롬6:6, 마10:38, 마27:32-40, 막15:30-32, 요19:17-30).
십자가는 고대 바벨론 태양신 숭배 상징으로서 니므롯의 아들 탐무즈 숭배 상징이였으며 유럽 전역에서 숭배되어오다가 주후 431년부터 예배당, 기도실에 들어왔고, 종탑 꼭대기 십자가 표시는 서기 586년에 와서야 세워졌다.
6세기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상이 로마 성당에 세워졌고 오늘날 모든 영화 그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얼마나 가증한 사단의 장난인가?
원래 십자가 원형은 탐무즈(Tammuz)의 첫 글자 ‘T’에서 유래하였다. 탐무즈는 니므롯이 환생했다는 세미라미스의 아들인 태양신이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 가증한 것을 집에 두지 말자.
(26) 물고기 형상은 기독교 상징인가?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배워...”(고전4:6 KJVB)
“...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20:4)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듀스(Ιχθνξ-Ichthus)인데 헬라어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헬라어로 ‘Ιησονξ Χριστοξ Θεον Υιοξ Σωτηρ’의 첫글자 다섯을 모으면 ΙΧΘΥΣ로서 ‘익듀스’라는 물고기 이름이 된다고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물고기는 본래 다곤(Dagon)신 상징이였다(삿5:1).
이유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 지하에서 숨어살 때 그리스도인의 암호표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네로 황제가 지하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위장 그리스도인을 침투시켜 일부러 상징을 만들어 사용케 함으로 그리스도인이 암호표시를 하고 있으면 금방 체포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상징이었다.
네로는 물고기 형상, 무지개, 비둘기, 빵, 포도열매 형상을 만들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급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상이나 상징, 암호표시가 필요없었고 오직 기록된 말씀 뿐이었다. 불행히도 오늘날 기독교에 이교도 네로가 만들어준 물고기 형상을 너무 많이 부착하고 다닌다. 물고기 형상을 하지 않아도 한마디 말, 얼굴의 표정 하나에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하라.
물고기(익듀스, Icthus) 형상은 니므롯을 섬기던 다곤(Dagon-삼상 5장) 숭배에서 유래하였으며, 성령의 상징으로 표시하고 있는 비둘기는 세미라미스(Semiramis) 때부터 섬기던 여신 숭배의 유물이다.
(27) 촛대와 양 촛불 형상의 유래는?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현하게 하고...”(출25:3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마5:14 KJVB)
구약의 성막의 등대는 ‘순금으로 쳐서’ 만들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채찍에 맞아 깨지심으로 속죄예물되시는 그림자이며 세상의 빛되신(요1:1-10) 주님의 모형이다. 등대 일곱가지 중 여섯은 교회이며 중심기둥은 예수님이시고 기름은 말씀과 성령님의 모형이다. 때문에 예수님과 교회는 이 세상의 빛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당 강대상 뒤편에 촛대를 세우고 그 위에 양촛불을 켜거나 또 전구촛대를 세우는 것은 구약율법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된다.
모든 이교도들은 사탄에게 하는 제사때마다 촛불을 사용한다. 불교의 절도, 무당도 촛불을 켜는데 과거 로마시대에도 2월 2일에 페부라(Febara) 神을 예배하는 의식으로 횃불과 초를 들고 행진했다. 이 의식이 로마 카톨릭에 유전되어 카톨릭은 이 날을 ‘성촉절(聖燭節-Candlemas)’로 섬기면서 촛대를 공중에 던지고 일년 사용할 촛불에 축복 미사를 한다.
또한 이집트에는 이 날을 ‘네이드 여신’을 섬기는 날로 기념하였고 헬라어에서는 시이리스(Ceres) 여신을 섬기는 날로 불리워졌다. 이렇게 사람이 죽었을 때 켜는 촛불이나 부활절, 성탄절, 교회 강당, 성당 촛불은 이교우상숭배에서 출현하였음에도 오늘날 교회당에서 부활절, 새벽, 성탄절에 공공연히 촛불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분명히 알 것은 구약성전이나 성막에는 촛불이 없었다. 금등대에 기름으로 불을 켰다. 현재 카톨릭은 이 의식을 ‘부활초’ 의식이라고 한다. 별은 성모 마리아이고 촛대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한다.
(28)I.H.S.는 무슨 약자인가?
“이것이 놀랄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사탄의 사역자들이 의(義)의 사역자들로 가장한다 하여도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KJVB)
로마 카톨릭의 소위 ‘성체(Host)’에 새겨진 I.H.S는 ‘예수는 인간의 구주다(Iesus Hominum Salvator)’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둥근 태양신을 상징한 빵에 기록된 이 약자는 (I.H.S. - Isis:여신, Horus:아들, Seb:태양신) 바로 애굽의 태양신 삼위일체 성모, 성자, 신들의 아비를 뜻하는 약자인 것이다.
이러한 가증한 이집트 태양신 삼위일체의 약자가 오늘날 개신교 교회당 강대상 십자가 형상 한 가운데 조각되어 예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약자를 로마 카톨릭 제수이트(Jesuits)는 그리스어로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The Holy name of Jesus)’으로 변경시켜 예수회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서적, 의복, 그림, 성경표지, 카렌다 등에서 이 형상이나 십자가 형상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다.
(29) 팍스 크라이스트(Pax Christus-그리스도의 평화)의 유래는?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KJVB)
로마 카톨릭은 Χ를 크리스토스의 첫글자, P를 두 번째 글씨로 한 ( )를 사용하며, 또 알파와 오메가의 표식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런 표식이 오늘날 개신교 강대상 앞 천과 목회자 가운, 찬양대 가운에 표식이 되어 사용되고 있다.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자신이 여신이라고 속여서 어린이를 희생시켜 바치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아이를 몰렉에게 버리는 ‘인신제사’ 습관이 유래하였다(레18:21, 20:2-5, 왕하11:7, 왕하23:10, 사57:9, 렘32:35, 행7:43).
로마 카톨릭은 예수님이 희생당하실 때 마리아의 심장에도 구멍이 뚫렸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로마 카톨릭은 희생을 통해서만 평화가 얻어지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여신 세미라미스에게 어린이를 제물로 바칠 때 가슴에 십자가를 그어 죽이는데 현대판 세미라미스인 로마 카톨릭 여신 성모 마리아에게도 어린이를 죽여 가슴에 팍스 크라이스트( ) 모양으로 가르고 심장을 뽑아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비밀의식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어린이 희생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님을 설득시켜 평화가 성취된다고 믿는다.
또한 로마는 카톨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이름으로 세계 평화운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속죄함 받고 평안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요8:31, 32, 롬1:105).
(악령의 처소 The Force 31p by Alberto Rivera, Babylon Mystery Religion 52p)
(30) 성령강림을 상징한 비둘기 형상은?
오순절에는 비둘기 형상이 없이 성령이 임하였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면서 성도들에게 임하여 16개 지역 언어들로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비둘기 모형으로 임한 것은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였다. 비둘기는 구약에 가난한 자들의 속죄를 위한 제사 때 드리는 예물이었고 노아시대에는 새 감람 잎사귀를 물고 돌아오기도 하였다(마3:16, 창8:11).
그러나 초대교회나 사도행전 이후 계시록, 그리고 중세 지하 그리스도인과 오늘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성령을 비둘기 형상으로 상징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어떤 영적인 진리를 형상으로 표식한 것이 없다. 성령을 비둘기 형상으로 사용한 단체는 로마 카톨릭 제수이트(예수회)였다.
그들은 이 비둘기 상징으로 오순절 은사운동을 개신교에 침투시켜서 오늘날 신비주의 성령운동하는 모든 오순절 계통 교회는 비둘기 형상을 사용한다.
한국의 ‘성령화대회’, ‘성신클럽’, ‘성령봉사상’ 배후에도 이같은 운동이 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연합이란 이름으로 삼키고 있는데 현재 바티칸은 오른손에 W.C.C. 왼손에 은사운동을 쥐고 세례를 악령으로 장식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한 그림자였으나 그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KJVB)
(31) 사순절(四旬節 - Lent)의 유래는?
사순(四旬)이란 뜻은 40일을 의미한다. 이 절기는 로마 카톨릭의 유전으로 예수님 부활의 날까지 그전 40일을 고행금식하고 하루 한 끼만 채소로 먹고 수요일, 금요일은 단식을 한다. 처음에는 2-3일간 금식을 했는데 서기 325년 로마 카톨릭 니케아 공의회 때 공식으로 40일간 금식기간을 규정하여 부활절 때까지 고행하도록 했다.
40일은 구약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금식기간이라서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교 로마 카톨릭의 풍습이 오늘날 개신교에서 시행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브라질에는 매년 2월이면 카니발 축제가 있다. ‘카니발(Carnival)’이란 뜻은 본래 ‘고기(Caro)’로 ‘잔뜩 배불린다(Valens)’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우리나라 말로는 ‘사육제(謝肉祭)’라는 말로 고기에 감사하는 축제라고 한다. 이 카니발이 시작된 유래는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을 하고 금육(고기를 먹지 못함)을 하기 때문에 그전 부활절 2-3일전에 고기를 실컷 먹고 즐기자는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 40일전인 매년 2월에 브라질에서는 카니발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그 축제에 얼마나 많은 환락과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가?
또한 카니발(Carnibal)의 어원은 ‘식인종’이란 뜻인데 바벨론 바알 제사장들이 어린이의 인육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카니발(cahna-Bal) 즉 ‘바알의 제사장(Priest of Baale)’이란 단어가 되었다. ‘카나’는 제사장이고 바알은 성경의 바알신 숭배를 뜻한다(삿2:13).
이러한 식인종 축제의식 숭배가 주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사순절 때에 ‘카니발’이라는 사단제사인 식인종 인육 축제를 브라질을 비롯 독일 같은 곳에서 공공연히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단은 모방의 천재다.
불의 신 몰록(Moloch) - 본래 니므롯을 '강력한 왕'이라고 믿으며 몰크 게베르(Molk-Gheber)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가나안에서는 아이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희생제물로 바친 악습이 있었다.
(32) 종려주일, 고난주간 행사 유래는?
“모욕을 당하시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 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 2:23-24 KJVB)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여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흉내내는 의식이 종려주일이며 그 나뭇가지를 ‘성지’라고 한다.
고난주간 의식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행사하는데 금요일에 예수님이 희생하신 것으로 믿어 성금요일 또는 수고일(受苦日)이라고도 하는 Good Friday가 변한 말이라고도 한다. 또는 ‘하나님의 몸이 부패한 금요일(a Corruption of God's Friday)’의 약자라고 한다.
이러한 고난주간 기념의식이 시작된 것은 4세기경 로마 카톨릭이 세시간이나 기념 미사를 할 때부터 유래되어 오늘날 눈먼 개신교들이 이 풍습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성경은 두가지 의식밖에 없는데 하나는 ‘침례’와 ‘주님의 만찬’ 뿐이다. 주님의 만찬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고전11:26)일 뿐 다른 의식, 절기를 가르친 말씀이 없다.
(33) 부활절(Easter Day)의 의미와 유래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넘겨지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롬4:25 KJVB)
부활은 본래 ‘Resurrction’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라고 했을까? 세미라미스는 자신을 여신이라고 속여 바벨론 女神사상이 앗수르 지방으로 들어가서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로 숭배받았고, 가나안 땅에는 아스타롯(Ashtaroth)으로 섬겼다(삿2:13, 10:6, 삼상7:4). 그 여신의 다른 발음의 이름이 ‘이스타르(Ishtar-이스터)’ 그것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 바로 Easter이다. 그러니까 부활절(Easter Day)이란 말은 ‘여신의 날’이 되는 것이다.
이 여신은 달걀에서 나왔다는 전설에서 흘러와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는 로마가 수입하여 섬기던 ‘다산의 여신’이었다. 때문에 봄철 여신으로 생명의 상징으로 섬겨졌고 그날이 음란의 날이었다. 독일에서는 오스텐(Ostern), 헬라에서는 파스카(Pascha)라고 하는데 그 다산의 여신의 축제일이 봄철이었기에 로마 카톨릭이 유월절을 부활절로 지키면서 여신 아스다롯 기념일과 부활절이 혼합되어 오늘날 개신교의 부활절(Easter Day-여신의 날)이 된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분명히 이스터(Easter) 날을 말씀하고 있다(행12:4).
그러니까 여신의 날 이름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다. 때문에 부활절에 계란 먹는 풍습은 다산상징이고 토끼고기를 먹는 것도 음란의 상징이다.
또 금요일(Friday)이라는 말도 고대 ‘프레야(Freya)’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는데 고대 이교도의 평화, 기쁨, 다산(多産)의 신으로 섬기던 여신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부활절(Easter)이란 이름은 여신 ‘이스터(Ishter)’, ‘이오스타(Eoster)’, ‘오스테랴(Ostera)’, ‘아쉬타르테(Astart)’라는 말이 현대어로 바뀐 말이고 여신 세미라미스(Semiramis)의 다른 이름으로 이스터(Easter)였던 것이다.
이날 고대 로마에는 달걀을 숭배했고 일본 중국에도 달걀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의식을 기념하거나 달걀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새벽 촛불 예배도 이방 풍습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덤에 계시다 토요일 저녁에 부활하셨다.
(34) 성령강림절(Whitsuntide)유래는?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후에 그 분을 신뢰하였으며 또한 믿은 후에 거룩하신 약속의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엡1:13-14 KJVB)
예수님과 주님의 만찬과 침례 예식 이외는 그 어떤 절기를 명령하신 적이 없다. 이교나 우상숭배의 특징은 의식, 절기, 형상, 형식 등이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약속대로 강림하셨고 구약 레위기 23장의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Pentecost)에 성령님이 오시게 되었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희생되셔서 무교절날 무덤에 묻히셨고 초실절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펜테코스테(50일이란 뜻)에 성령님이 임하셨고 우리는 복음을 깨달을 때 성령님으로 인침받았기 때문에 또 기념할 필요가 없다.
성령강림절 축제는 서기 4세기경 로마 카톨릭 부활절 전야 같은 의식으로 지키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시대인 6세기부터는 성신강림 8부 축제가 있었고, 그 의식이 오늘날 그대로 개신교에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로 스며들어 누룩이 된 것이다.
(35) 성탄절(Christmas) 절기는?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8:16)
예수님은 10월 초순에 출생하셨다. 그러니까 10월에 출생하여 봄 4월에 고난당하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정확히 33년 6개월 이 땅에 계셨고 속죄를 이루셨다. 12월 25일은 헬라 바벨론 이집트,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인데 니므롯의 다른 유형인 ‘미트라’ 또는 ‘솔’의 생일로 지켜져왔다.
12월 21일 해가 짧은 날(동지날) 해가 죽었다가 24일 길어지니 해가 살아났다고 하여 25일 생일날로 축제하다가 로마 카톨릭이 예수님 생일 축제와 혼합시켜 12월 25일이 성탄절로 변한 것이다.
츄리는 농신제의 유산이고 푸른 나무는 이집트의 신으로 숭배받는 나무였고 구약 산당의 푸른 나무(왕상14:23, 왕하16:4, 겔3:6, 6:13, 20:47)의 유산이다. 츄리에 달린 금, 별, 방울은 태양, 달, 별의 모형으로 우상숭배에서 출발했다. 성경에는 예수님 생일축하가 없다. 우리는 구원의 날, 은혜의 날(고후6:2)만 있을 뿐이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찬209장)
(36) 헌당식(獻堂式)과 입당식(入堂式)의 유래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그 분은 손들로 지어진 신전들에 거주하지 아니하시며 또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들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 분께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리고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행17:24-25 KJVB)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교회당(예배당)이 없었다. 집에서 들에서 산에서 자유롭게 모였다. 교회란 ‘에클레시아(Ekklesia)’ 곧 ‘불러낸 무리’인 것이다. 건물이 결코 성전이나 성당이 아니라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성전이다.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한 2세기 이후부터 교회당 건물은 짖기 시작하여 콘스탄틴이 등장하면서 교회당이 고급스러워지더니 로마 카톨릭 전성기에 소위 성당(聖堂)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패는 더욱 속도가 빨라지더니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위해 속죄권(면죄부) 판매라는 중세 암흑 시대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교회당마다 중세 성당을 뺨치는 흉내를 내고 있다. 강남의 어떤 교회는 분명 베드로 성당과 버금갈 것이다. 그 건물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건물 때문에 피땀의 고뇌를 겪어야 했을까?
헌당식, 입당식을 구약성전, 성막 헌당을 흉내낸 율법주의 산물이고, 모든 이교도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제단 神堂을 봉헌하는 의식이 있다. 교회당 헌당식도 이와 유사하며 로마 카톨릭이 시작해서 오늘날 개신교에 흘러들어왔다. 오늘날 상당수의 개신교는 문자대로 로마 카톨릭을 약간 개량(改良)했을 뿐 성경의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참 교회’일 뿐 改新敎는 없다. 하나님은 건물 헌당식에 영광받지 않고 한 영혼 구원얻을 때 잔치하신다(눅15:1-7).
(37) 주님의 성만찬후 떡을 땅에 묻는 의식은?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해준 것은 곧 주 예수님께서 넘겨지시던 그 밤에 빵을 취하셔서 감사를 드리신 후 그것을 떼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겨진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으며 저녁 식사 후에 이와 같이 잔을 취하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느니라”(고후11:23-26 ㆍKJVB)
예수님께서 “기념하라”(눅22:19)고 하신 만찬(晩餐)은 구약 유월절에 해질 때에 흠없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뿌려 심판이 통과했음같이 예수님은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에 운명하시고 저녁 6시경에 무덤에 묻히셨다.
때문에 구약의 유월절(출12:1-14)의 그림자를 실체로 이루셨고 그 유월절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념’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떼며(행2:40-47, 20:7) 교제했고, 고린도 교회 시대는 저녁 음식으로 모여 떡을 떼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파당(편당)을 만들어 끼리 끼리 먹다보니 배불리 먹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여 옆에서 굶기도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징계를 받았다고 바울은 가르쳤다(고전11:27-34).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에서 만찬후에 떡을 떼고 남은 것을 땅에 묻는 행위는 로마 카톨릭의 성체(聖體)의식의 화체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 사제(신부)가 축성(빵에 축사한다)하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한다.
그 다음 라틴말로 ‘Hoc est corpus meus'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호우커스 포커스(Hocus-Pocus:요술)‘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살후2:1-12절 참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빼앗은 교리, 예수님을 수백만번 다시 죽게하는 교리, 바벨론의 인신제사, 카니발 제사의식인 교리, 로마 카톨릭의 가장 사악한 이 교리를 개신교가 이어 받아 만찬 후에 떡을 땅에 묻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이 이 빵을 보았다면 땅에서 다시 파다 먹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른 비유를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왕국은 어떤 여자가 굵은 가루 세 통 속에 가져다가 숨겨넣어 전부를 부풀게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시니라”(마13:33, KJVB)
지금까지 열거한 의식들 외에도 수많은 의식, 용어, 교리들이 바벨론 유전이거나 로마 카톨릭 유전인 것들이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기를 좋아하고 좁은 문,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7:13-14, 눅13:22-30).
사람들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지켜온 전통을 어떻게 중단할 수 있느냐? 버릴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를 다르게 해서 계속해도 되지 않느냐? 고 질문한다.
그러나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이런 누룩을 버리고 성경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러면 이 많은 교회들이 다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잘못되었단 말이냐?’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많은 교회’에 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느냐?”(롬4:3 KJVB)에 기준을 두고 다음에는 “완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살펴보므로”(행17:11 KJVB)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 교계지도자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그렇게 전하면 젖(돈)이 안나온다’고 변명한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진리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밥상이 올무가 되어”(롬11:9) 진리보다는 세상과의 타협을 택하고 있다.
그렇게 특별하게 하여 눈총사고 고립될 것이 무엇이냐? 고 둥글둥글 믿자고 한다. 그러나 지옥은 둥글둥글 갈 수 있어도 천국은 분명히 “오직 너희 말은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하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임이라”(마5:37 KJVB)는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오직 너희의 예는 예가 되게 하고 너희의 아니오는 아니오가 되게 하라 이는 너희로 정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약5:12 KJVB)는 말씀을 가슴에 새겨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좁은 길, 진리의 길로 가는 영혼은 심히 적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질문에 누가 자신있게 대답하겠는가?
입이 있어도 짖지 못하는 벙어리개들(사56:9-12)도 많고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도 많으며(마23:16) 천국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자기도 못들어가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못들어가게 하는 자도 많다. 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자신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되게 만드는 이는 많아도 바람에 흔들이는 갈대같지 않고 끝까지 진리의 목소리를 외치는 광야 요한 같은 이(마3:1-2)는 적고 푯대를 향하여 진리의 외길만 달려가는 바울 사도 같은 이는 적은 시대가 바로 오늘이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빙산의 일각이지만 주님이 원치 않는 바벨론 누룩들을 과감하게 버릴 것인가, 아니면 계속하여 세상과 더불어 지키면서 넓은 길을 갈 것인가를 지금 결정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면 바알에게 출발한 것이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일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왕상18:21)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이 없다. 말씀의 빛이 들어왔을 때 골수를 찔러 쪼개는(히4:12) 양심의 아픔이 있고 “어찌할꼬?”(행2:37)라는 구원의 질문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요8:11)라는 말씀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얻은 감사에 24시간이 예배이며,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을 지키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여 구원을 얻게 하며 몸된 교회를 사랑하여 지체로 섬기고 “내 백성아 나오라”(계18:4)는 명령과 “...너희는 그들에게서 나와 분리되라 또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7 KJVB)는 말씀을 따라 성결하고 순결한 주님의 신부로서 “너희가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 하였느니라”(히12:4 KJVB)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KJVB)는 말씀에 따르며 영광의 그날까지 “화평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이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분께서 또한 그것을 행하시리라”(살전5:23-24 KJVB)는 말씀을 믿으며 살아갈 뿐이다. 아멘 /퍼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