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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31:7-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이다. 어느 새 76주년이다. 일제강점기는 오래 전 끝났고, 이젠 더 이상 일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을 뛰어 넘었다는 자신감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두렵고 깊은 강을 건너는 중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와 회복의 손길이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시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분단된 이 나라가 화해와 평화를 이루고 공동번영을 통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어가길 소원한다.
색동교회는 6년 전,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8월 15일에 ‘통일염원 정오기도회’를 드린 일이 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지만 함께 모여 70년을 맞은 광복절을 축하하며 감사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남선교회가 준비한 수제비를 먹었고, 여기에 꽁보리밥을 말아먹었다. 평소와 다른 점심식탁을 ‘오병이어 애찬’이라고 불렀다. 무더위에 치룬 뜨거운 광복절 의식의 백미였다.
주일에는 모든 교인이 광복절 예배를 위한 특송을 준비하여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땅 끝까지’를 불렀다. 이날 색동합창대의 긴장감과 즐거움은 상상이상이었다. 코로나19가 오기 오래 전의 일로, 이젠 역사가 된 느낌이다.
정부는 올해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 묻힌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였다. 그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이끈 영웅이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이후 독립군을 조직해 처음 일본 정규군과 싸워 승리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어서 청산리 전투에서도 연전연승하였다.
해마다 8.15가 되면 그날의 감격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 마음이 너무 돌처럼 단단해졌다. 해방의 감격과 만족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 아직 광복절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까닭은 미완의 광복이란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1)
본문은 예레미야 예언의 메시지이다. 그동안 예레미야는 쓴 소리만 하는 예언자로 오해받았다. 만약 선지자가 자기 백성에게 쓴 소리만 전해야 한다면 참 괴로운 일이다.
사실 젊은 나이에 부름 받은 예레미야는 여러 가지 악역을 맡았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탄식한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렘 9:1).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늘 책망을 듣고, 징벌에 대한 예고편만 듣는다면 반발심이 생길 것이다. 그런 심정은 쓴 소리를 전해야할 예언자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예언서에 따르면 쓴 소리만 전해야 하는 예언자는 없다. 심판의 말도 그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소식을 전하려는 예고이다. 예레미야는 궁극적으로 희망과 구원을 예언하였다.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는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이다.
“내가...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선지자 예레미야는 포로 된 자를 격려하기 위해 권면과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한 마디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자녀를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메시아가 오시면 크고 복된 나라를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예레미야는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31장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2)를 거듭거듭 반복한다.
예언자가 말하는 전형적인 예언의 공식문구를 듣다보면 신뢰감과 확신을 얻을 수 있다. 31장에는 이러한 형식의 짧은 문단이 8개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무려 19번이나 거론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슬픈 운명의 예언자와 같았다. 하나님이 남 유다왕국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그들이 어떻게 바벨론에게 침략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며 모진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지, 그 심판의 내용을 전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모든 환난이 그치고 나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잡혀간 자기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온다는 꿈같은 뉴스이다. 장차 광복의 소식이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향해 병 주고, 또 약을 주는 셈이다. 예레미야의 비유를 보면 그 메시지가 얼마나 환희에 차고, 실감이 나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12).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에서 ‘물 댄 동산’과 같은 꿈을 꾼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은 늘 메마르고, 황량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물 댄 동산’은 말 그대로 동산의 골짝마다 물이 흘러내리고, 웅덩이마다 고여 있어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그동안 바벨론의 위협을 예언하면서 결과는 멸망당하고 말테니 그냥 항복하라고 권유하던 예레미야였다. 사실 선지자는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자기 동포를 향해 심판을 선고하는 일은 정말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예레미야는 미움을 받고, 보복을 당하였다.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제 심판과 보복이 끝나고 다시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전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더러 소원을 아뢰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7).
2)
본문의 구체적인 상황은 마치 출애굽을 연상케 한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8-9).
사람들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것이다. 건강하고 젊은 정상인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맹인과 신체장애자들과 임신한 여자들도, 해산한 여자들도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혼자 이동하기에 어려운 이들이니, 누군가 곁에서 힘이 되어줘야만 한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외국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 삶의 위기를 겪는 그 사람들이 다시 자기 집으로, 내 나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찾으시고,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번에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같은 시기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같이 하고 있다. 정부가 유해 봉환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홍범도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돌아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다. 봉오동 전투는 100년의 일이다.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귀환은 그 이름에 대한 회고와 함께, 그동안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까지 불러들일 것이다. 여전히 돌아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국가가 벌이는 기념비적인 상징 복원이니만큼,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 76년 이전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고, 희망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그 시대 조상들은 악착같이 살아냈다. 고려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일본의 보복을 피해 만주에서 살다가 러시아 연해주로 국경을 넘어갔다. 그곳에서 살던 중 이번에는 일본의 간첩노릇을 의심받아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마지막 생을 마친 배경이다.
고려인들은 자기가 몸 붙여 사는 땅을 지극히 사랑한다. 얼마 전에 색동교회를 방문한 쌍뜨 뻬쩨르부르그에서 온 아셀 님 가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국도 무한히 사랑한다. 방학 때 마다 방문하는 까닭이다.
예레미야 29장에 보면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를 쓴 일이 썼다. 편지에 담긴 메시지는 그곳이 비록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땅일지라도, 복의 터전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예레미야의 말은 반국가적이고, 반역죄처럼 들린다. 아니, 예루살렘의 평화가 아니라,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 아닌가! 그까짓 애국심은 버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정말 그런가? 아니다!
적에게 굴복하고 동화되라는 뜻이 아니라, 극한 상황 속에서 견뎌내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죄악을 심판하지만 그 형벌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끝이 아니다, 너희에게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곳 바벨론에서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마침내 후회하고,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 매를 맞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절망적인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 회복의 때를 준비하게 되었다. 가장 절망의 밑바닥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향하였다. 가장 큰 비극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다.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예레미야의 귀환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희망과 기쁨 가운데 살게 되리라고 약속한다. 참된 회복과 평화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얼마나 성실하고, 영원하신지 거듭거듭 전한다.
비록 첫 출애굽 당시 돌판에 새겼던 옛 언약은 깨뜨려졌으나, 이제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음에도 깨졌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 언약을 기록하신다(렘 31:33). 다시 새로운 출애굽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다.
3)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타향살이하는 일은 참 괴로운 일이다. 그들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한다. 오죽하면 유해라도 귀국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이유이다.
해마다 광복절 즈음이면 한인디아스포라의 역사적 삶을 특집방송으로 혹은 다큐멘타리로 꾸민다. 처음에는 구색 맞추기처럼 생각하였는데, 아직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만으로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독일에 사는 한인디아스포라들과 함께 살았던 내 경험이 더욱 이해를 깊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지금도 종종 독일에서 오는 전화로 소식을 들으면 옛 교우들의 소식이 마치 친척들의 안부처럼 들린다. 지난 주일에도 강남성모병원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20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아스라한 기억이 엊그제 같이 가까웠다. 그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의 인물들이다. 광복절은 오래 전 역사가 아닌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역사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곧 바로 맞은 분단 때문에 여전히 미완의 광복으로 불린다. 분단된 채 살아온 지난 76년은 일제강점기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바벨론 포로시대와 다름없었다.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여전하다. 국민의 마음에는 분단의 경계선이 남아 있어, 서로 편을 가르고 대립한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참된 만족과 감사가 없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는 참 위로와 만족이 필요하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14).
색동교회 7가지 비전 중에 ‘예언자 의식’이 있다. ‘진리 안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우리가 민족절기를 소중히 지키고, 역사문제를 우리의 관심사로 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가장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언자 의식이란 희망과 구원을 전하는 일이다. 무조건 감싸고 편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민족의 고통을 기억하고, 역사의 잘못을 회개하고, 불의한 일에 분노하는 일이다.
비록 비주류교회를 자처한 작은 신앙공동체이지만, 이러한 민족을 위한 섬김에 더 열심을 내야 한다. 여러분은 착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위대한 소명과 사명을 지니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이 든다. 8.15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릴 수는 없을까? 그 시절의 소망과 간구와 울부짖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나라는 더욱 훌륭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더 배려하고, 더 사랑하고, 더 평화롭고, 더욱 이웃 나라를 돌보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완의 광복절을 차곡차곡 채워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민족과 함께 하셔서 남과 북 삼천리금수강산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와 해방이 찾아오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백성과 해외 8백만 디아스포라까지 온 민족의 가슴마다 감사와 만족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