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권력 - 기념비와 시계탑 그리고 도로
*
도시 중심부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여러 가지 기념비가 세워진다. 권력이 거대한 건조물을 즐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권력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그 위신을 드러내는 여러 기념비적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존재의 인상을 강하게 남기려 한다.
도시의 규모가 클 수록 그 중심부에는 많은 기념비가 있으며, 수도의 중심부에는 국가의 탄생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이런 저런 형태로 ‘기호화’되어 있다. 왕궁, 교회, 사원, 국회의사당, 개선문, 광장, 분수, 동상이 그것이다.
고조 : 천하가 전쟁으로 미친듯이 괴로워하기는 몇 년, 그 승패는 아직 모른다. 그런데 왜 이럴때 궁전을 세우는가?
신하 : 과연 천하는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웅장한 왕궁을 세워야만 합니다. 천자의 궁이 웅장하지 않으면 충분히 위엄이 설수 없습니다.
권위에 대한 욕심은 교육기관도 마찬가지다. 국립대학의 시계탑은 그 상징일 것이다. 중앙의 시계탑은 대학의 권위를 나타내듯, 오늘날도 수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각 대학은 온갖 방법으로 마치 시계탑이 대학 건물의 필수 요소처럼 막무가내로 시계 건축물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
공산주의 국가에서 노동절과 혁명 기념일의 행진에 필요한 거대한 광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오랜 혁명동지였던 주은래, 등소평 등과 함께 과거 수백 년의 왕조의 상징인 천안문에서 혁명기념일, 메이데이에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
권력을 연출하는 제전은 정치 형태를 불문하고, 각국에서 행해졌다. 특히 정치권력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제3세계의 신흥 독립국에서는 극단적으로 화려하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탄생할 것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디오피아 벵기스츠 정권은 극심한 가뭄으로 5백만명 이상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혁명 10주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식전을 기획했고, 이를 위해 대량의 위스키, 와인이 수입되었다. 혁명 10주년 제전은 벵기스츠 정권에 있어서는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꼭 거행했어야 할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
텔레비전과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권력의 영향력을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대단한 것으로 만들었다.
* 도로
서구에서는 민중이 도시에서 권력자에 공격을 시도했던 적이 가끔 있었다. 군대도 미로와 같은 불규칙한 가로에서 기습 공격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가로에서는 군대가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었고, 총을 마음대로 쏠 수도 없으며, 주민이 숨을 수 있는 장소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페란치 1세가 ‘도시의 좁은 길은 국가에게는 위험하다’고 말한 그대로이다. 도시 민중의 이러한 움직임을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도시 거리는 보통 잘 정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파리의 정연하고 넓은 거리는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그 거리망을 만든 오승망의 계획은 많은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그의 의도는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국가권력은 부르봉 왕조 이래, 소란을 반복하는 파리 시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부는 대혁명 후에도 민중의 소란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그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 대개조를 계획했던 것이다.
오스망의 대 개조는 도로를 넓히고, 직선화 시키며, 막힌 골목길을 뚫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전의 파리 거리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주요 도로는 군대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고, 보도 블록은 투석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스팔트로 고정되었다. 파리의 명물이었던 ‘바리게이트’는 넓은 도로와 아스팔트 포장으로 그 효과가 반감되었다. 오스망의 계획은 ‘혁명이 불가능한 파리’를 만드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학생들의 시가전 무대였던 간다 일대의 블록을 걷어내고 아스팔트를 깔았다.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가두에서 무기를 상실한 학생들은 철도 노선에서 돌을 찾아야 했다.
/ 히로오 후지타 ‘도시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