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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주일설교 갈라디아서6:1-5(그리스도의 법)
본문: 갈라디아서6:1-5
제목: 그리스도의 법
오늘은 갈라디아서6:1-5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법”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법”
우리는 2023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해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았습니까?
누구를 따라 살았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누구의 지배를 받았으며
우리의 행동이 무엇에 의해 움직였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를 주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1.우리는 형제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이 불문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형제님 자매님입니다.
왜 이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이 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
나와 한 지체요 생명을 공유하는
한 몸이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쉽게 부를 수 있거나
가볍게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어떤 성도를 향해서 형제님 자매님 이렇게 얘기할 때는
적어도 당신은 나와 한 머리를 둔 한 몸이면서
동시에 한 생명을 공유한 지체라는
자기 고백과 같이 녹아진 호칭입니다.
간단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에 앉아 계신 분들에게
형제님 자매님 하고 한번 불러보세요
듣는 분들의 표정은 어떻고
부르는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알고 부르려니 굉장히 부담이 되죠?
굉장히 부담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런데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 6장!
이제 마지막인데 형제들아!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부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라는
절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분란 속에 혹 놓일 위기에 처한 교회를 향해서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 우리가 교회 공동체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한 지체다
한 몸이기에 형제다, 자매다!라고 고백하는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확인하고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2.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런데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우리 교회는 하늘의 교회가 있고 지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율리교회는 지상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지상 교회를 아주 절묘한 표현을 하나 썼는데 전투하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왜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일까요?
간단합니다.
연약한 자들이 모였고, 죄인들이 모였고 미완성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완성된 사람들이 들어오는 공간이 아닙니다.
흠투성이고 소망이 없고 절망하던 자들이 들어와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한 형제가 되고
생명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늘 문제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란 말은
이 교회 밖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는 범죄한 일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까요?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라고 말합니다.
‘바로 잡고’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잡는 일을 잘 합니다.
저도 그런 일을 잘합니다.
누군가 틀린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합니다.
아내에게 혼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이 눈이 와서 하얗게 쌓여 있는데
비가 와서 좋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 그냥 그런갑다 하고 알아들어야 하는데
꼭 지적질 합니다. 지금 눈이 왔는데---
혼나도 쌉니다!
어떤 범죄한 형제가 공동체 안에 드러날 때
바로 상대를 고발하기 바쁘고 사람들 앞에 수군거립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본성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경향이 무엇입니까?
그 자와 나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화 작업을 하는 거죠,
이건 분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너하고 난 틀려’라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무슨 범죄한 일을 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놓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게 뭘까요?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 앞에 붙어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잡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잡는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바로 잡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온유한 심령’ 그렇습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 성경이 쓰여 졌을 때는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온유라고 할 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나약하고, 그냥 늘 떠밀려 다니고, 주도권도 못 갖고 항상 큰 소리 못 내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이 쓰여 질 당시 헬라 사람들의 개념 속에는 그것이 온유가 아닙니다.
몽골 초원에 갔을 때 뛰어다니는
야생마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말은 잡았다고 해도 쉽게 탈 수가 없습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구 뛰어 난리를 칩니다.
이런 말을 타려면 조련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훈련소 조련사에게 가져다 주면
한 삼 개월 정도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고
먹으라면 먹고 먹지 말라면 안 먹습니다.
그리고 타도 날뛰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3개월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 광경을 본 주인이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고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말이 온유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개념은 의외로 나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잘 훈련된 절제된 덕목을 온유하다고 얘기합니다.
범죄한 일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지만
바로 잡는 방법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합니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이 왜 자기를 온유하다고 설명하셨을까요?
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죄인의 몸으로
자기를 제한시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기로 태어나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는 과정으로 자기를 밀어놓으셨습니다.
모든 것 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유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온유라는 것은 사실
강한 자만이 펼쳐낼 수 있는 덕목입니다.
나약한 자의 덕목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사도 바울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광장에서 소리치지 않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범죄한 자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18:15-17에서
범죄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원리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서가 되어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말합니다.
범죄한 사람을 대하는
첫 번째는 일대일로 조용히 대하라고 합니다.
이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
처음부터 나팔 불지 말라고 합니다.
모르고 있던 사람까지 일부러 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일대일로 말했는데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죄를 부인하며 자기 고집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듣지 아니하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이 듣지 않았기에 두세 증인을 세워
그 사람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안 듣습니다.
그럴 때는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아무리 유한성을 가진 죄인들이 모든 기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이 땅에 창조하신 설립하신 기관이라면 그 기관에 위임한 어떤 질서와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과정을 밟아 가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라는 속뜻은 무엇일까요?
그래야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열 내고 불내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계를 밟아가다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는 과정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그랬습니다.
바로 잡고 바로 잡는다는 말의 원문은 의학용어입니다.
이것은 정형외과 의사분들이 쓰는 용어입니다.
탈골되거나 골절된 뼈를 제자리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잡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연약해서 실수가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갈아 끼우고 잘라내고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담을 하거나 치료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안 되는 사람은 잘라내고 갈아 끼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 조직이나 기계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명 공동체로 만난
한 지체요, 한 형제요, 자매로 고백하는 관계라면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바로잡고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창조하신 그 교회의 모형이 된 그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킨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부수적인 것 같지만
필연적인 또 다른 과제가 발생합니다.
그게 뭘까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미끄러운 빙판 길을 가다보면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넘어지다가 몸을 보호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짚다가 손목이 부러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에 가면 기부스를 합니다.
기부스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팔이 부러졌는데 목에다 그 팔을 걸러 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목에다요.
걸러 매는 수고를 목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만 수고합니까?
왼팔이 부러지면 오른팔이 고생하고
온 몸이 긴장을 가지고 그 왼팔이 회복될 때까지
에너지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왼팔이 부러지고 통증이 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게 한 몸이라는 생각이 어디서 옵니까?
오른팔이고 가장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관계고 태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뭐라고 설명합니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게 짐을 서로 지는 태도예요. 믿습니까?
4.자신을 살펴 보아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 받을까 두려워하라”
범죄한 자를 바로 잡을 때 그 일을 해야 하지만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지 않고 바로 잡으려고 한다면
교회는 금방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사탄이 제일 쉬운 방법은
교회 분쟁 일으켜서 찢어발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가장 악한 죄가 그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부딪히다 자존심이 상하면
끝장을 봐야 끝이 납니다.
절대 타협이나 이해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범죄한 자를 바로잡으려면 내 자신을 살피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짐을 서로 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짐을 서로 지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서로지라는 말이 오절에서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오절만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어느 말이 맞는 것입니까?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5절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될까요?
둘 다 맞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다르게 설명을 한 겁니다.
자 예를 들어서 교회는 함께 져야만 하는 짐이 있고
또한 혼자서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고민은 청소하실 분이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 분들이 같이 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식사 준비도 같이 짐을 지고 나누어서 해야
함께 식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혼자서 죽으라고 하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보면 시험에 들고 계속하지 못하고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같이 나누어서 하면 오래 동안
기쁘고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가면 편하고 두 손으로 하면 편하지만
한 다리 한 손으로 하면 힘들고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법하면 썩 좋아하지 않고 일단 거부감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내내 등장했던
주제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기록된 문서 개념으로 이 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법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헬라시대의 법이라는 말은
원래 질서의식이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것도 법입니다.
내 안에 의식화가 되고 내 안에 원리가 되고
내 안에 질서가 된 게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문자로 조항을 만들어
제시하는 법보다 훨씬 어려운 법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어렵습니까?
착한 척은 하기 쉬어도
착한 존재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은 하면 되고 안하는 것은 안하면 됩니다.
그게 율법의 정확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그런 법 조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 질서 의식을 얘기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기적의 현장에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공통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보통은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갑과 을의 종속관계에서 더 나은 자가 덜한 자를 베풀고 수혜를 주고 도와주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정도로 이해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입장을
내 입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풀고, 수혜를 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떤 이의 입장을 내 입장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소리칩니다.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고 보고 그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소리칩니다. 그런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절망과 실수와 고통과 아픔을 내 입장으로 전가시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성취하라. 성취하라!고 합니다.
성취하라는 말은 물량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하라는 말은 어떤 업적을 쌓아서 결과를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결과를
우리가 매일 매일 확인하고 그 결과 속으로 들어가 누
리는 상태를 성취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분량의 고난에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걸으셨던 그 원리 그분이 걸으셨던
그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오늘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리를 말하는 것이지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을 제시하는 그리스도라면 너무 살기가 쉬워요
이것을 하라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면 저것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게 원리로 들어올 때는
내 전 인생 전 삶의 영역이 내가 어떤 존재로
그 문제들 앞에 세워져야 되는가 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한다는 말은 어휘 자체가 맞질 않고
이미 헌신되어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법 그 법 안에 그 사랑의 법을 따라서
2023년도를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