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권이 민족주의적이었는가의 문제는 또하나의 토론 쟁점을 이루고 있다. “퇴폐한 민족동의와 국민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데타의 공약은 5ㆍ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박정희의 역사적 라이벌로 지목되는 장준하도 당시 쿠데타를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註23) 쿠데타 중심세력의 대다수가 빈농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군사정부가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소기업 자금지원, 부정축재처리법 실시 등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적 경제발전을 모색했던 것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정 초기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경향은 이내 변화되었다. 그것은 농업육성에 기반하여 내수시장을 확대하고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려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의 좌절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민족주의 전략이 좌절되었다고 해서 정치적ㆍ문화적 민족주의가 포기된 것은 아니었는바, 박정권은 민족주의를 발전주의와 결합시켜 경제적 동원화를 위한 담론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註24) ‘산업화 민족주의’라 부를 수 있는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자립경제’ ‘민족중흥’ 같은 박정권의 일련의 담론은 민족발전이 곧 경제성장이라는 논리로 구체화되었다. 박정권의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또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통제이데올로기로도 활용되었는데, 충효사상과 안보논리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부장적 노사관계를 강요했으며 선성장 후분배론은 개량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았다. 註25)
역사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산물인 민족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와 내적인 긴장관계를 이룬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이중적 성격, 즉 대외적인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자 동시에 대내적인 체제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민정이양을 전후로 구사되기 시작한 박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 담론은 애초부터 민주주의와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곧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와는 다른 한국적 전통을 부각시키고 냉전분단체제의 반공주의를 특권화함으로써 서구적 민주주의를 평가절하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민족적 민주주의’는 3선개헌을 거쳐 10월유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되었으며 그것은 선거, 토론, 집회 및 결사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마저도 부인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타났다.
박정권의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그렇다면 헤게모니를 결여하고 있었는가. 경험적인 수준에서 이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른바 ‘전통의 창조’ 註26) 라 부를 수 있는 박정권의 민족주의 담론은 적어도 60년대에는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세계의 경우 물질적 영역에서 서구에 대한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정신적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가 더욱 강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註27) 단일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와 일제식민지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 경험에 대한 기억은 서구문화에 대응하는 한민족의 역량과 주체성,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강조했던 특수주의적 담론의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형성했다. 註28) 하지만 3선개헌에서 10월유신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변동 속에서 민족주의 담론의 수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점차 가시화되었으며, 그 결과 박정권과 대중의 헤게모니적 접합은 내적으로 균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박정권 특유의 담론은 아니다. 그것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강조하는 ‘아시아적 민주주의’와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과용이 무질서와 방종을 낳을 뿐만 아니라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유교적 전통과 권위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註29) 최근 서구에서 관찰되는 가족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과잉발전을 지켜볼 때 분명 서구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미덕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의 담론을 평가하는 데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효과’이다. ‘한국적’ ‘아시아적’이라는 특수주의가 과잉화될 때 그것은 “높은 성장률이 유지되는 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신경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마하티르의 논리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 원칙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도구이자 사회의 조정과 공작을 옹호하는 담론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註30) 민족주의가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국수주의로 나타날 때 그것은 정치적 억압을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또한 싸이드(E. Said)가 말하는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 근대성의 그늘과 생활세계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제도적 차원은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으로 구성된 생활세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인성이 형성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지며 문화가 재생산되는 생활세계는 근대적 제도와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변화하지만, 제도적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경우 그 제도가 생활세계를 압도하고 위협하는 이른바 ‘생활세계의 식민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註31) 박정권의 압축적 경제성장은 우리의 생활양식 또한 압축적으로 그리고 심대하게 변화시켰다.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그리고 내일은 ‘원효대사와 금발의 제니를 함께 방영하는 텔레비전’이 들어오는(김수영 시 「라디오계」 「원효대사」) 생활양식의 변화는 신작로가 열리고 기차가 개통되는 것으로 상징되는 근대 물질문명이 우리의 생활세계에 본격화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과 국내시장의 국제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소비생활과 이와 연관된 생활문화를 크게 변화시켰다. 서구의 문화와 상징구조는 50년대보다도 한층 광범위하게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투하고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문화산업은 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대중들의 의식과 일상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부상하고 있는 신중간계급을 중심으로 미국문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고 해서 6,70년대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이 크게 증대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 빈곤을 어느정도 벗어났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임금수준은 임노동의 최소 재생산비용인 최저생계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노동조건 또한 대단히 열악했다. 농민과 도시빈민의 생활수준 또한 이와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박정권의 일관된 저곡가-저임금 정책이 농민의 생활을 피폐화시켜왔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무허가 판자촌으로 상징되는 도시빈민의 생활은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 보여주듯이 참혹하고도 서글픈 것이었다.
근대성의 대표적인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억압적 감시체제가 박정권하에서 결정적으로 제도화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강력한 감시체제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중핵을 형성하여 정치 및 경제권은 물론 일반대중들의 일상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3천명의 특무대 요원을 바탕으로 출발한 중앙정보부는 ‘권력 내의 권력’ 기관으로서 국내 정치는 물론 대북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입안기관이자 집행기관이었으며, 70년대 유신체제하 박정희 1인통치의 가장 강력한 친위부대였다. 이러한 억압적 감시체제의 존재는 푸꼬(M. Foucault)가 말하는 통제 이전의 감금이 오히려 박정권의 중요한 정치적 지배메커니즘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억압적 감시체제는 민주주의를 형해화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반정치주의와 가족적 이기주의를 강화시켰다. 우리 시민사회에서 반정치주의의 역사는 물론 식민지국가의 감시체제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냉전분단체제의 고착에 따른 이데올로기 지형의 협애화와 함께 더욱 공고화되었다. 반공논리와 군사문화가 일상화된 상황하에서 반정부는 반국가와 등치되었으며, 이러한 ‘반공병영사회’(anticommunist regimented society) 註32) 에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방법이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만 하는 침묵을 강요당한 “안개의 나라”가 다름아닌 박정권의 유신체제였으며(김광규 시 「안개의 나라」), 이러한 감시체제가 강화될수록 시민사회의 왜곡된 반정치주의는 심화되고 민주주의는 박제화되었다.
가족주의는 우리 근대 생활세계의 또하나의 명암을 이루고 있다. 가족주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조선후기 이후 신분제 붕괴, 식민지지배, 한국전쟁,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가, 문벌, 공식적 사회집단 등이 기존의 권위를 담당할 수 없게 되자 개인들은 물질적 생존을 위해 직계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지상주의를 키워왔다. 註33) 기업 및 국가 복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족은 재생산비용을 담당하여 시장의 폭력을 약화시키는 스펀지와도 같았으며, 註34)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애정과 연민의 가족관계는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및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했다. “아홉 마리의 강아지”와도 같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온 ‘아버지의 어설픈 미소’(박목월 시 「가정」)야말로 우리 근대성의 또하나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가족은 또한 정서적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보호막이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압축적이었던만큼 근대 개인주의 문화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개인은 가족이라는 정서적 울타리를 통해 급속한 사회변동에 적응하고 삶의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학연ㆍ지연을 매개로 유사가족주의로 변형되고 확대되어왔다. 60년대 이후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에 따라 전통적 농촌공동체를 떠나온 사람들이 도시 속에서 그 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는 동창회ㆍ계ㆍ종친회 같은 ‘의사근대적’(quasi-modern) 공동체를 만들어왔음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註35) 이러한 유사가족주의는 사회조직의 충원 및 주요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집단이기주의를 강화시켰는바, 그 가운데 특히 박정권하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된 지역주의는 경제적 지역격차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왔다.
요컨대 박정권의 성장중심 발전전략은 어느정도의 물질적 보상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황폐화하고 인간적 삶의 가치를 훼손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억압적 감시체제, 반공병영사회의 반정치주의, 그리고 이기적 가족주의는 우리의 시민사회를 보수주의로 기울게 하여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공공영역 또한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 보수적 공공영역의 공간 속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여론 형성의 통로는 제한되고 극도로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 민주주의의 실현이 공공영역의 형성에 기반하고 있다면, 박정권의 억압적 정치체제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 시민의식의 발전을 가로막아 근대 공공영역의 창출을 지체시켰다.
5. 박정희시대의 교훈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서구의 경험과도 다르고 여타의 제3세계와도 구별되는 경로를 거쳐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특히 박정희시대는 하나의 이정표적인 시기였다. 박정권은 세계시장의 구조적 재편에 편승하여 이른바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그것은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가시적인 고도성장을 가져왔다. 이 점에서 박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의 근대성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정권의 이러한 근대화 전략은 권위주의적 통치방식, 억압적 감시체제, 민족주의적 동원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부터 제도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성의 제도적 긴장은 여러 후발 및 후후발 산업화에서 관찰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정권의 근대화 전략에 내재된 이러한 제도적 긴장은 정경유착, 노동통제, 인권탄압, 생태계 파괴, 그리고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유례없는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천민적 자본주의, 권위적 정치구조, 이기적 시민사회로 대표되는 박정권의 부정적 유산은 우리 사회에서 해방의 근대성의 실현을 지속적으로 차단시켜왔다.
근대성의 이러한 명암에는 무엇보다도 단선적인 발전논리, 기술의 근대성을 특권화하려는 생산지상주의의 논리가 내장되어 있다. 생산지상주의 발전전략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에 있다. 생산지상주의는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장의 과실(果實)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고 다수의 인간적 삶을 훼손시킨다. 박정권의 생산지상주의 발전전략의 파국은 그 정권이 종막을 고한 지 20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간적 삶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박정희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커다란 과제일 것이다. <이상 김호기 연세대교수의 창작과비평 기고에서 전재함> http://www.changbi.com/magazine/s-099/s-099-%b1%e8%c8%a3%b1%e2.html#김호기1
1) A. Giddens, The Consequences of Modernity, Cambridge: Polity Press 1990 (『포스트모더니티』, 이윤희ㆍ이현희 옮김, 민영사 1991, 71면). 2) G. Therborn, European Modernity and Beyond, Cambridge: Polity Press 1995, 5~7면. 3) I. Wallerstein, After Liberalism, New York: The New Press 1996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177~202면). 월러스틴의 이러한 논의는 베버의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 그리고 하버마스의 목적합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의 이분법과 유사하다. 4) A. Giddens, Beyond Left and Right, Cambridge: Polity Press 1994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김현옥 옮김, 한울 1997, 16면). 5)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사회과학 방법론의 고전적인 주제이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과연 구분할 수 있는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사회과학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다는 가정은 의심스럽다. 인식주체와 대상 간의 상호관련성을 고려할 때 사회 및 역사적 현상에 대한 과학이 인식주체의 규범적 기준과 결단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인식론을 승인하기는 어려운데, 근대적 진리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려면 더 우월한 규범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증주의 방법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의 하나는 진리를 확증에 입각한 주장가능성으로 이해하는 하버마스의 진리합의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이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인식주체의 삶의 조건을 반영한다는 시각을 받아들이되, 다양한 해석의 지평을 비판적으로 융합시킴으로써 객관적 사실의 규명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실증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으로는 J. Habermas, “Analytische Wissenschaftstheorie und Dialektik,” “Gegen einen positivistisch halbierten Rationalismus,” T. Adorno et al., Der Positivismusstreit in der deutschen Soziologie, Darmstadt: Luchterhand 1969;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 Suhrkamp 1985 참조.
-------------------------------------------------------------------------------- 6) 근대성이 상이한 시간들이 중첩되어 지속되는 것이라면, 때로는 격렬하게 진행되는 ‘국면의 시간’이 ‘사건의 시간’과 ‘구조의 시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시점이 존재한다.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시대는 근대 자본주의의 제도적 틀이 안착하는 매우 중요한 ‘국면의 시간’인 것으로 보인다.
7) 최근 박정희시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 가운데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김대환,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 『역사비평』 1993년 겨울호; 손호철, 「박정희정권의 재평가: 개발독재 바람직했나?」,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1995; 최장집, 「박정희정권과 한국현대사」, 『대화』 1995년 여름호; 김일영, 「박정희체제 18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상』 1995년 겨울호; 이광일, 「’박정희체제론’ 비판」, 『정치비평』 3호, 1997; 조희연, 「동아시아 성장론의 검토와 한국경제성장의 정치사회적 구조」, 학술단체협의회, 『박정희시대와 오늘의 한국사회』, 1997 등이 있음.
8) 한 사회 내에는 여러 축적전략들이 경합하고 있으며 하나의 축적전략이 선택되는 것은 대내외 사회세력의 이해관계와 헤게모니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5ㆍ16군사정부는 내포적 공업화전략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반대 및 대내적 조건으로 인해 수출지향 공업화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서는 木宮正史, 「한국의 내포적 공업화의 좌절: 5ㆍ16 군사정부의 국가자율성의 구조적 한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박사논문 1992 참조.
9) U. Menzel & D. Senghaas, Europas Entwicklung und die dritte Welt, Frankfurt: Suhrkamp 1986. 10) A. Lipietz, Mirages and Miracles, London: Verso 1987 (『기적과 환상』, 김종환 외 옮김, 한울 1991); 졸저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국가, 시민사회, 민주주의』, 사회비평사 1995.
-------------------------------------------------------------------------------- 11) 木宮正史, 「냉전구조와 경제개발」,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I』, 오름 1996, 342~89면. 12) 이병천, 「냉전분단체제, 권위주의정권, 자본주의 산업화」, 『동향과 전망』 1995년 겨울호, 73면. 13) C. Johnson, “Political Institutions and Economic Performance: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in Japan, South Korea, and Taiwan,” F. Deyo ed., The Political Economy of New Asian Industrialism, Ithaca: Cornell Univ. Press 1987; A. Amsden, Asia’s Next Giant, Oxford: Oxford Univ. Press 1989; R. Wade, Governing the Market,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90. 14) B. Cumings,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Economy,” F. Deyo ed., 앞의 책, 68면. 15) B. Jessop, “Accumulation Strategies, State Forms, and Hegemonic Projects,” Kapitalistate No. 10ㆍ11, 1983.
-------------------------------------------------------------------------------- 16) 손호철, 앞의 책, 147~48면. 17) 이러한 상관관계는 하나의 경향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 산업화와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상관관계가 높다고 해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모두 경제성장에 효율적인 것은 아니며 (라틴아메리카의 사례), 후발산업화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양립하는 예외적인 사례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사례). 라틴아메리카 사례에 관해서는 L. Marmora & D. Messner, “Old Development Theories: New Concept of Internationalism,” W. V둻h ed., Political Regulation in the Great Crisis, Berlin: Ed. Sigma Bohn 1989, 스칸디니비아 사례에 관해서는 D. Senghaas, Von Europa lernen, Frankfurt: Suhrkamp 1982 (『유럽의 교훈과 제3세계』, 한상진ㆍ유팔무 옮김, 나남 1990) 참조. 18) 홍승직, 『지식인과 근대화』, 고려대 사회조사연구소 1967, 161ㆍ176면. 이 조사는 대학교수 761명과 기자 754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 S. Lipset, Political Man: The Social Bases of Politics, New York: Doubleday 1960. 20) D. Rueschemeyer & E. H. Stephens & J. Stephens, Capitalist Development and Democracy,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92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박명림 외 옮김, 나남 1997, 146면).
-------------------------------------------------------------------------------- 21) 정상호,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 1961~1979」, 『정치비평』 1호, 1996. 22) 졸저 319~20면. 23) 장준하, 「권두언」, 『사상계』 1961년 6월호. 24) 진덕규, 「한국 민족주의의 미래 구도: 통일을 위한 민족주의 이념의 정향」, 『통일연구 논총』 2권 1호, 1993; 박명림, 「근대화 프로젝트와 한국 민족주의」, 역사문제연구소 편,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 역사비평사 1996. 25) 최장집,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나남 1997.
-------------------------------------------------------------------------------- 26) E. Hobsbaum & E. Ranger eds., The Invention of Tradition,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3. 27) P. Chatterjee, Nation and its Fragments: Colonial and Post Colonial Histories,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93, 6면. 28) 이철승, 「근대화 담론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 논문 1998. 29) 아시아적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김영명,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재검토』, 소화 1996, 78~86면 참조. 30) 딜릭 (A. Dirlik),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놓인 ‘역사의 함정’」, 『창작과비평』 1995년 여름호, 371면.
-------------------------------------------------------------------------------- 31) 이러한 발상은 하버마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하버마스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와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2단계를 제시하지만,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경우 분화와 식민화는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J.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Frankfurt: Suhrkamp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