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성은 리아입니다.
오랫만에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작년 무르익은 가을에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던 제천에 위치한 아름다운 '배론 성지'입니다. 가을 풍경이 워낙 아름다웠던 곳이어서 엄마에게 한번 보여 드리고 싶어 모시고 갔었는데 너무나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올해에도 꼭 가보자 생각했더랬죠.
올해는 엄마의 베프이신 정혜숙도미니카님도함께 다녀왔습니다.
배론성지에 가기 전 성지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배론성지는 1800년대부터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된 오래된 교우촌입니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배의 밑창을 닮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되었다고합니다. 이 지명을 형상화 한것이 순례자 미사가 열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대성당인데 천장 모양이 배의 밑창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배론 성지를 검색 해 본 결과 이곳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은 배론 성지의 세가지 보물이라고 불리는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그리고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가 배론 성지의 가장 중심인듯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서는 이 세가지 보물을 위주로 사진을 담아 보았습니다.
1. 황사영 백서 토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알렉시오)는 8개월 동안 배론마을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속에 머물며 중국 국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비단에 편지를 썼는데 이 백서는 1~5행에 인사말, 6~32행에 신유박해 진행 과정, 32~90행에 순교자 열전, 90~118행에 조선 카톨릭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119~122행에 관면 요청과 맺음말이 서술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 되는 과정에서, 편지 심부름을 맡았던 황심 토마스가 그 해 9월 29일에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 부도의 죄로 능지처사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2살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현재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합니다.
황사영 토굴이라는 푯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정말 작은 토굴이 있더라구요.
그 안을 들여다 보니 아주 작고 정갈한 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너무나 작은 십자가가 그 시대의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웠던 천주교 신자의 마음을 보는듯했습니다.
2. 성 요셉 신학당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신학 교육기관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식 신학 교육기관으로 카톨릭 대학교의 전신이 되는곳이라고합니다. 현재 국내에 있는 카톨릭계 신학대학교의 뿌리가 이곳인 셈이죠.
성 요셉 신학당은 185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때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였습니다. 1856년 부터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집하였습니다.
1866년(병인박해) 3월2일 서울에서 남종산 요한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하여 두 신부를 체포, 3월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장주기 요셉은 충청남도 보령 갈매못에서 3월30일 순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때 흔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옛 초가집 신학교 건물은 6.25 전쟁과정에서 불 타서 없어졌고 현재의 초가집 신학교는 2003년 충청북도에 의해 복원된 것입니다.
신학교 내부 모습입니다.
신학교에서 나오니 아름다운 가을 풍경은 신학교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도 이렇게 예쁘더라구요.
아래 사진은 이 연못의 뒷부분의 풍경입니다.
제게는 예수님의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연못 풍경 보다 예수님의 뒤에 숨겨진 이 모습이 더 감명 깊었답니다.
3. 가경자 최양업 신부 묘
배론 성지에는 한국 천주교회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1821~1861)신부의 묘가 있습니다. 그는 1836년 12월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체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1849년 4월15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귀국 후 1년6개월 동안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여 목자의 삶을 살았는데 그가 사목하는 구역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5도로서 6천여명의 신지들과 127개의 공소가 있었다고합니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조선대목구장인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중 과로와 장티프스의 영향으로 문경에서 쓰러졌고 얼마 못가서 선종하였습니다.
그해 11월 베르뇌 주교에 의해 신학교가 있었던 곳에 묻혔습니다.
성지를 거닐다보면 작은 산으로 오르는 나지막한 경사로가 나옵니다.
십자가의 길, 성직자 묘소, 최양업 신부님 묘소 가는 길이 나옵니다.
비탈길 따라 십자가의 길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성직자의 묘들이 나옵니다.
최양업 신부님 묘로 가는 길엔 작은 철교가 아나 있는데 철교를 건널 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최양업 신부님의 묘입니다. 의자에 앉아 짧게 기도를 해 보았습니다.
이 사진은 배론성지 본당 앞에 있는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입니다. 그 동상의 뒤에 진 그림자로 산간 오지를 찾아 다니시며 목자의 삶을 사신 신부님의 바쁜 일상을 표현 해 보았습니다.
내년 가을에도 이곳에 엄마와 다시 와 볼 수 있길 희망하며 배론성지 순례글을 마칩니다.
첫댓글 멋진 단풍과 성지의 경건함이 많이 느껴지네요. 멋진 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은총이 함께하는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