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바조(1571~1610), 《이삭의 희생》 (c1603, 캔버스에 유채, 104×13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c1603, 우피치버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막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에 천사가 개입하는 장면이다. 천사의 오른손이 날 선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숫양을 가르키고 있다. 천사와 아브라함의 시선이 마주치며 긴박한 순간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삭은 극도의 공포로 떨고 있다. 배경의 평화로움과 대비되고 있다.
다른 버전 《이삭의 희생》(c1598, 프린스턴버전)은 카라바조, 또는 카라바지스티 가운데 하나였던 바르톨로메오 카바로치의 작품으로 추정한다(1). 카라바조의 주특기인 키아로스쿠로(테네브리즘)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배경 묘사 없이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고 있어 우피치 버전보다 사실적으로 보인다. 빛은 천사의 얼굴을 비추어 연극 무대의 정지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머리를 잡은 것처럼 천사는 숫양의 머리 부분을 만지고 있다. 손에 칼을 쥔 아브라함의 긴장이 풀리는 듯하고 이삭은 공포에서 해방된 표정이다.
《이삭의 희생》은 성경 <창세기> 22장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3일 길을 가서 종들을 머물게 하고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번제 장소로 향하였다. 이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을 듣는 아비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태연하게 말한다.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나님은 그런 언질을 한 적이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은 다음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칼을 들고 아들을 찌르려고 하였다. 《이삭의 희생》이 바로 이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그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하나님은 앞과 뒤가 다르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군소리 없이 순종하였다. 하나님을 향하여 한마디 뭐라고 질문이라도 한마디 할 법한데 묵묵하기만 하다.
독일 철학자 헤겔(1770~1831)은 이 사건을 윤리와 이성의 관점에서 보았다. 헤겔의 윤리철학에 비추어 볼 때 아브라함의 행위는 명백한 살인미수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원칙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무너트렸다. 개인의 주관적 확신이 보편적 윤리의 타당성을 부정한다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헤겔에게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인이 아니라, 아직 보편적 인륜성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주관적 신념에 매몰된 미숙한 존재일 뿐이다. 진정한 윤리는 가족과 국가, 그리고 법이라는 객관적 질서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 카라바조(1571~1610), 또는 바르톨메오 카바로치(1587~1625), 《이삭의 희생》 (c1598, 캔버스에 유채, 116×173cm) ⓒ프린스턴대학교, 프린스턴
이에 반해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윤리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영웅이 아니라 윤리를 초월하는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이다. 단독자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보편적 윤리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신앙의 기사를 뜻한다. 그는 자녀 사랑이라는 윤리적 의무와 자녀 희생이라는 신적 명령 사이의 절대적 모순 앞에 직면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아브라함은 보편성을 탈피하는 고독한 의지, 그리고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역설의 사람’이다. 그는 윤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더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 윤리를 초월한 것이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근대에 이르러 신앙과 이성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다. 때로는 조화하고 때로는 대립한다. 중세 스콜라철학을 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이성은 신앙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해 왔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며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였다.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도 하였다. 비유하자면 이성은 1층이고, 신앙은 2층이다. 2층에 이르려면 1층을 통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종교의 이적과 신비는 미신과 가깝다고 보는 이들도 등장하였다. 헤겔은 신앙을 인간 정신이 진리를 헤아리는 낮은 단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종교에 담긴 초자연적인 요소보다 도덕 가치와 질서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은 인간 이성이라는 작은 그릇으로 담을 수 없는 분이다. 이성으로 이해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
카라바조는 윤리와 신앙이 충돌하는 순간을 그렸다. 날카로운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은 단호해 보인다.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윤리의 붕괴 장면이 분명하다. 그러나 키에르케고어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광기의 사람이 아니라 침묵과 결단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고독이 그에게 있었다. 우피치 버전이 헤겔의 관점이라면 프린스턴 버전은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처럼 보인다.
카라바조가 <이삭의 희생>을 통해 말한다.
상식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도 있고,
상식에 갇힌 신앙도 있으며,
상식을 초월하는 신앙도 있다고….
미주
(1) 최근 연구에서는 이 작품을 카라바조의 초기작으로 보지 않고, 카라바지스티 화가인 바르톨로메오 카바로치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