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리 전투
무기력한 패배
6·25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우리가 적군에게 당한 패배 중 현리에서의 싸움은 매우 기록적이다. 국군 3군단 전체가 무너지는 과정이 참담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깊고 쓰라렸기 때문이다. 다가서는 적에게 제대로 저항이라도 펼치다가 무너졌다면 그런 패배의 아픔은 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를 못했다. 서막은 일찌감치 열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3군단이 짊어질 몫이 아니었다. 인접한 미 10군단 예하 국군 7사단의 패퇴가 결정적이었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7사단은 중공군 공세가 벌어진 직후에 진지 이탈부터 했다. 아주 무기력하고 책임감 없는 후퇴였다.
- 비무장 지대를 이동하는 6.25전쟁 당시 국군의 모습이다.
현리 일대에서 전선에 다시 섰던 7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당했던 쓰라린 패배의 악몽이 머릿속에 남아 전면에 나타난 적을 두고 바로 등을 보이는 허약함으로도 나타났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7사단의 허무한 후퇴가 결국 중공군의 깊숙한 종심기동으로 이어졌고, 전략적인 요충인 오마치 고개가 일찌감치 그들 발아래에 놓이고 말았다. 그에 비해 3군단 전면에는 중공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방의 종심으로 중공군 부대가 이동하고, 옆의 국군 사단이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나자 3군단 예하 9사단은 깊은 두려움에 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늦게 알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9사단은 서쪽으로 인접했던 국군 7사단이 무너지는 상황을 중공군 공세가 벌어지고 4시간 이상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7사단 5연대의 병력이 두 사단의 전투지경선을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중공군 공세에 허겁지겁 전선에서 밀려나 전투지경선을 넘어 패퇴한 7사단 5연대의 병력을 보고서야 9사단 지휘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던 셈이다. 9사단장은 최석 준장이었다. 그는 전투경험이 거의 없었던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당시 참모진들과의 적지 않은 불화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모장 박정희
당시 9사단 참모장은 나중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 대령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단장과의 불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공군 공세가 벌어지던 무렵 박 참모장은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석 사단장은 박정희 대령 외의 다른 참모들과의 관계도 원만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듯 일이 풀리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가 꼬이는 법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9사단은 전황(戰況)을 챙기면서 부대의 진퇴를 고민해야 하던 무렵에도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흔적을 드러냈다. 육군본부의 <현리-한계 전투>에는 9사단이 전반적으로 상급 부대 또는 인접 부대와의 협조, 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1955년 백선엽 1야전군 사령관(왼쪽 첫째)이 신임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의 신고식을 받고 격려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