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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Santuario di Cafarnao
바티칸
카파르나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곳
이 고고학 유적지에서 모든 순례자는 복음서가 전하는, 그리고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약 3년 동안 살아가시며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당신이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심오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들을 바로 이곳에서 일으키셨다.
Fra Francesco Patton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2-13).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당신이 자라신 고향을 떠나, 그 순간부터 새로운 거처이자 “당신의 고을”(마태오 9,1 참조)이 될 곳으로 이주하시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카파르나움에서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로마 점령국을 위해 세리(세금 징수원)로 일했던 레위, 곧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거처를 옮기신 신학적 이유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4-16).
오늘날에도 티베리아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에 도착하는 모든 순례자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펼치신 3년 동안 주로 머무셨던 고을을 직접 눈으로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당신이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심오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들을 바로 이곳에서 일으키셨다. 예루살렘의 프란치스코회 성서학 연구소(SBF)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고고학자로서 이 유적지에 평생을 바쳤고, 1968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19차례의 발굴 조사에서 비르질리오 카니오 코르보 신부의 핵심 협력자로 활약했던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신부는 이 특집 기사(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의 주요 출처이기도 한 카파르나움 안내서에서 고고학의 진정한 목표를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우리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물질적 유물을 발굴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가능한 한 과거 세대와의 접촉을 복원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이 현재 세대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카파르나움」, 예루살렘, 1995년, 7쪽).” 카파르나움이 바로 “예수님과 첫 사도들의 고을”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이곳의 고대 유적이 인류 전체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곧바로 깨닫게 된다. 기도하고 환대하는 공동체로서 이곳을 보호하고 살아가는 예루살렘 성지 보호 관구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게 카파르나움은 단순한 고고학 유적지 그 이상이다. 그곳은 예수님의 고을이며, 바로 주님의 집이다.
Lago di Tiberiade
호숫가에 자리 잡은 특별한 마을
이 고고학 유적지는 갈릴래아 지방에 위치한 티베리아 호수(킨네렛 호수) 북서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해수면보다 약 210미터 낮은 곳에 있으며, 티베리아로부터는 약 16킬로미터, 타브가로부터는 3킬로미터, 그리고 요르단강이 호수로 흘러드는 지점으로부터는 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 지역의 본래 셈어 이름은 케파르 나훔(Kefar Nahum), 곧 나훔의 마을(kefar)이라는 뜻이다(나훔은 인명이며, 이른바 “소예언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 이름을 (히브리어 어근 nhm에서 유래한) “위로의 마을”로 해석한 반면, 성 예로니모는 (어근 n'm에 따라) “아름다운 도시”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발음에 가장 가까운 표기인 카파르나움(Capharnaum)은 이미 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채택하여 사용한 바 있다(로프레다, 상동, 14-15쪽 참조).
고대 카파르나움의 유적은 약 6헥타르(약 1만8000 평)의 면적에 걸쳐 펼쳐져 있다. 그중 3분의 2는 프란치스코회 예루살렘 성지 보호 관구에 속하며, 동쪽에 위치한 나머지 부분은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에 속한다. 비록 세메키예(Semekiyeh) 부족의 일부 아랍인 가문들이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나, 고대 마을 자체는 약 1000년 전에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려졌다(로프레다, 앞의 책, 10쪽 참조). 예수님 시대에 카파르나움은 세관이 설치된 국경 도시였으며(마르 2,13-15 참조),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거대한 제국 도로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도시는 요르단강 상류에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진 호수 북서쪽 해안에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 요르단강 상류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주 영토와, 그의 동생 필리포스에게 할당된 골란 지방 사이에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1975년, 회당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이정표(마일스톤)가 발견되면서 이 제국 도로의 노선이 실제로 증명됐다(로프레다, 상동, 18-19쪽 참조). 복음서가 증언하는 로마 군대 파견대의 존재(루카 7,1-10; 마태 8,5-13 참조) 역시 교통 요충지로서 이 마을이 지닌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발굴된 동전과 도자기들을 보면 카파르나움이 상부 갈릴래아, 골란, 시리아, 페니키아, 소아시아, 키프로스, 아프리카와도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로프레다 신부에 따르면, 팔레스티나 중부 및 남부 지역과의 교류가 희박했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로 이와 대조를 이룬다(상동, 19쪽 참조).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자렛은 “주요 교통로에서 벗어난 외딴 산골 마을”이었던 반면, 카파르나움은 전략적인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아가 카파르나움은 “대도시들,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가 수도로 삼았던 티베리아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메시아적 메시지를 널리 전파”하실 수 있었다. 게다가 카파르나움의 인구 구성은 어부, 농부, 장인, 상인, 세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로마인들과의 관계 또한 “매우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어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이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 회당을 지어줄 정도”였다(인용문은 로프레다, 상동, 68-69쪽에서 발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같은 어부들을 비롯해 세리 마태오까지, 바로 이 공동체에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집: 가정 교회에서 기념 성당으로
프란치스코회의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모든 유적 중 가장 의미 있는 발견은 바로 신성한 집합 주택(insula sacra)이라 불리는 곳이다. 1968년 비르질리오 코르보 신부와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신부에 의해 시작된 발굴 조사를 통해, 이 장소가 지닌 천년의 역사를 네 가지 주요 단계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이 집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최초 건립 시기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기원후 1세기 말부터 이 집의 일부가 (...) 가정 교회(domus-ecclesia, 도무스 에클레시아)로 변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모임을 위한 장소로 개조되어 사용된 것이다. 3. 4세기에 이르러 앞서 언급한 이 가정 교회는 확장되었고, 웅장한 담장을 통해 마을의 다른 부분들과 분리됐다. 4. 5세기 후반에는 신성한 집합 주택의 모든 구조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팔각형 모양의 성당이 건축됐다”(로프레다, 상동, 51쪽).
이처럼 신자들이 공경해 온 홀이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낙서(그라피티) 속에 새겨진 예수님의 이름과 모노그램(문양), 아멘(Amen)이나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같은 전례적 표현들, 그리고 성찬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고대 에스트란젤로 문자(시리아어의 고대 변형 서체) 비문을 통해 증명된다.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 가정 교회가 단순히 지역 신자들뿐만 아니라 멀리서 찾아온 순례자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라고 설명한다(로프레다, 상동, 60쪽). 페트루스 부제(1107~1140년)는 자신의 저서 「성지에 대하여」(De locis sanctis)에서, 4세기 가정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순례자 에제리아(Egeria, 4세기)의 증언을 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카파르나움에는 사도들의 우두머리[베드로]의 집을 성당으로 만든 곳이 있는데, 그 벽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본래의]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다. 또한 주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회당도 있는데, 그곳은 많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며 정방형으로 다듬은 돌로 지어져 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주님께서 딛고 서 계셨던 돌계단들도 보인다”(Petrus Diaconus, 「Liber de Locis Sanctis」, in Itineraria et alia geographica, ed. R. Weber Ccl, 175, Turnhout, 1965년, 98-99쪽).
5세기 후반에 세워진 팔각형 성당은 중앙의 팔각형 구조를 통해 순례자들에게 “이제는 성당의 제단 바닥(podium) 아래에 묻혀버린 베드로 집의 정확한 위치”를 가리켜 보여주도록 설계됐다”(로프레다, 상동, 66쪽). 기원후 5세기 말엽에는 동쪽 면에 세례대와 압시드(abside, 반원형 제단)가 추가되기도 했다(조셉 패트릭, 「성지의 세례: 4-7세기」, 밀라노, 2025년, 103-104쪽 참조). 이탈리아의 건축가 일도 아베타의 설계로 지어진 현대식 기념 성당은 1990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봉헌됐다. 이 성당의 건축 공사를 총지휘했으나 1991년 선종한 코르보 신부는 현재 기념 성당 아래, 베드로의 집터 바로 곁에 묻혀 잠들어 있다.
Sinagoga
회당들: 4세기의 회당과 예수님 시대의 회당
카파르나움의 또 다른 거대한 기념물은 바로 “백색” 회당이다. 어두운 현무암으로 지어진 일반 개인 주택들과 달리, 이 회당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해 온 흰색 석회암 정방형 돌로 거의 전체적으로 건축되었으며, 일부 돌의 무게는 무려 4톤에 달하기도 했다. 장식 요소들은 매우 정교하며 유다교의 상징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가이거 신부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예수님 시대의 회당에 관해서, 고고학의 개척자들은 20세기 초까지 자신들이 찾아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콜과 카를 바칭거가 1905-1916년에 그 유적을 연구하면서, 이 회당의 연대를 기원후 200년경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이 회당이 예수님 시대의 회당일 리가 없었기 때문에, 1968-1990년에 프란치스코회 고고학자들은 필요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현재 보이는 회당 아래에 혹시 더 오래된 회당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알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첫 번째 놀라운 일은 당시 회당의 바닥에서 4세기 말(383-395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이 3만 개 이상(!) 발견된 것이었다”(하인리히 퓌르스트, 그레고르 가이거, 「성지. 순례자와 여행자를 위한 프란치스코회 안내서」, 밀라노, 2018년, 220-221/1021쪽).
코르보와 로프레다 신부의 발굴 조사는 유적지의 여러 층위에서 발견된 후기 로마 시대의 동전과 도자기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회당의 건축 연대를 4세기 후반으로 확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고고학자들은 이 백색 회당 아래에서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현무암 돌바닥을 발견했는데, 이는 개인의 집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공공건물에 속한 것이었다. 코르보와 로프레다 신부는 “백색 회당의 중앙 본체 아래에서 발견된 이 광활한 1세기의 돌바닥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회당, 다시 말해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이 지었고 예수님께서 방문하셨던 바로 그 회당에 속한 것일 수 있다”(로프레다, 상동, 32-49쪽)라고 인정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마르 1,21-28 참조),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요한 6,22-71 참조)을 선포하신 곳이 바로 이 회당이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유다 공동체의 공존
비잔틴 시대(서기 4세기~7세기)의 이 마을에서는 프란치스코회 관할 구역 거의 모든 곳에서 십자가가 새겨진 도자기 파편이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증명되는 다수의 그리스도인과, 여전히 사용 중인 회당 및 신성한 테트라그라마톤(성스러운 네 글자, 곧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펜던트 등의 유물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는 소수의 유다인이 나란히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로써 카파르나움은 서로 다른 종교 공동체들이 한 마을에서 함께 살기보다는 서로 다른 마을에 나뉘어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던 이 지역의 주된 모델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예외적인 공존의 사례를 보여준다(샤론 리아 마틸라, 「 카파르나움, 나훔의 마을: 헬레니즘 시대에서 비잔틴 시대까지」, in 「제2 성전 말기와 미쉬나 시대의 갈릴래아」, 제2권, 2015년, 249-251쪽 참조).
고고학적 역사
카파르나움의 고고학 역사는 1838년 에드워드 로빈슨이 이 유적을 복음서에 등장하는 장소와 연결 짓지 못한 채 회당의 폐허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1866년 찰스 윌슨에 의해 복음에 나오는 회당이 맞다고 밝혀졌다. 1894년 이스라엘 성지 보호 관구는 주세페 발디 수사를 통해 베두인들로부터 이 폐허를 매입했다. 1900년대 초에는 독일 동방학회(콜과 바칭거)가, 이어서 벤델린 폰 멘덴 신부(ofm)가 발굴을 진행했다. 1920년대에는 나자렛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가우덴치오 오르팔리 신부(ofm)(1889-1926)가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을 발굴했다. 긴 공백기를 거친 후, 1968년 이스라엘 성지 보호 관구는 비르질리오 코르보 신부(ofm)(1918-1991)와 스타니슬라오 로프레다 신부(ofm)(1932-2025년)에게 발굴을 위임했으며, 벨라르미노 바가티 신부(ofm)와 고드프리 클뢰츨리 신부(ofm)가 이를 도왔다. 이들은 이미 1968년에 팔각형 성당 아래에서 4세기의 가정 교회(domus ecclesia)를,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1세기의 집을 발견했다. 이는 예수의 죽음 이후 불과 반세기 만에 원래의 주거 공간이 베드로를 기억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예배 장소로 변화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성과였다. 코르보 신부의 발굴은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2000-1550년)부터 아랍 시대(7세기)에 이르는 유적의 전체 연대기를 재구성했으며, 기념비적인 회당의 건축 시기를 재정립하고 그 아래에서 예수 시대에 존재했던 이전의 회당을 찾아냈다. 코르보 신부는 베드로의 집 위 기념 성당(1990년)을 끝으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의 뒤를 이은 로프레다 신부는 비잔틴 및 아랍 단계를 조사하고 학술 총서 《카파르나움 》(프란치스코회 성서학 연구소[SBF], 총 9권)을 편집했다. 에우제니오 알리아타 신부(ofm)는 유적의 전체 석재 유물을 카탈로그로 정리했다 (https://www.custodia.org/it/santuari/cafarnao/ 참조).
한편, 예루살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청 소유인 북동쪽 구역에서는 바실리오스 차페리스의 지휘로 발굴 작업(1978-1987년)이 진행됐다. 이를 통해 네 개의 주요 구역뿐만 아니라, 호수를 향해 직각으로 뻗은 두 개의 방파제를 포함하여 길이가 약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안 방벽이 세상에 드러났다. 또한 아랍-비잔틴 전환기의 금화 282 디나르가 담긴 보물도 함께 발견됐다(마틸라, 상동, 226-228쪽 참조).
프란치스코회의 존재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성지 보호 관구의 수사들은 “예수님의 고을”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카파르나움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를 매일 맞이하고 있다. 이곳은 예수님의 시선이 머물렀고, 그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그분의 손길로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다. 하얀 백색 회당의 눈부신 장엄함, 현무암으로 지어진 집들의 소박함, 처음에는 가정 교회로, 이어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 베드로 기념 성당으로 거듭난 베드로의 집,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고요한 호수까지. 이 모든 것은 신앙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는 그분의 현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대 카파르나움의 유적을 바라보며 순례자들은 옛 마을의 집들과 주민들의 모습, 그리고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복음서가 들려주는 수많은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나아가 생명의 빵에 대해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곳에 다시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며, 베드로와 함께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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