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런티어는 미국인의 유전자인가? / 프레드릭 잭슨 터너
1890년 미국 인구통계청은 전국 인구조사를 마무리하면서 인구 밀도가 1 평방 마일 당 거주하는 사람이 2명이 되지 못한 지역을 ‘프런티어’로 정의하고, 미국에 더는 프런티어 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796년의 공유지불하법(Public Land Act), 1862년의 자작농법, 1873년의 산림개간법(Timber Culture Act), 1887년의 사막개간법(Desert Land Act) 등은 토지개척을 국시로 삼은 입법이었지만, 이제 1890년에 이르러 토지 개척의 마감이 공식 발표된 것이다.
미국인들은 독립을 한 1776년까지 북쪽 메인주에서 남부 조지아주까지 13개 주를 형성했고, 그 후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계속 서부로 진출하였다. 1803년 프랑스령이었던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미국이 이 땅을 개척하려면 적어도 5백년은 걸릴 것이며, 미국인이 서부의 광대한 지역으로 이주하려면 1천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채 100년도 안돼 미국의 프런티어는 끝이 나고 만 것이다.
1890년 미국 인구통계청은 인구 밀도가 1 평방 마일 당 거주하는 사람이 2명이 되지 못한 지역을 ‘프런티어’로 정의하고, 미국에 더는 프런티어 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인이 서부의 광대한 지역으로 이주하려면 1천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채 100년도 안돼 미국의 프런티어는 끝이 나고 만 것이다.
프런티어와 서부(the West), 시간에 따라 움직인 상대적 개념
이 ‘프런티어의 종언’에 주목해 미국사 연구의 판도를 뒤바꿀 엄청난 이론을 구상한 역사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레드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 1861-1932)다. 그는 1893년 7월 12일 ‘신대륙 발견 40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미국 역사학회의 연차 대회에서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미국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터너의 주장은 ‘프런티어 사관(史觀)’, ‘프런티어 이론’으로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요점은 미국 역사의 중심 축은 서부의 역사이며 서부에 펼쳐 있는 광활한 개방지(free land)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미국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뿌리를 유럽에서 찾던 이전 설명과 결별한, 미국판 지정학(geopolitics) 이론이자 ‘주체사상’이었다. 미국사학의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인구 밀도가 1 평방 마일 당 거주하는 사람이 2명이 되지 못한 지역이 ‘프런티어’라는 정의가 말해주듯이, 프런티어와 그 대체어로 사용되곤 하는 서부(the West)는 시간에 따라 움직인 상대적 개념이다. 영국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지인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의 건설이 시작된 1607년에서부터 프런티어가 끝난 1890년까지의 280여년동안, 각 세대는 서부를 향해 50-100 마일씩 나아갔다.
프레드릭 잭슨 터너. 그는 미국 역사의 중심 축은 서부의 역사이며, 서부에 펼쳐 있는 광활한 개방지(free land)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미국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따라서 초기엔 오늘날 동부에 속하는 지역이라도 당시엔 프런티어였고 서부였다는 이야기다. 미국인들이 대륙을 가로 질러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해 캘리포니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한 후에도 지역에 따라선 미개척지가 있었던 바, 프런티어는 직선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 존재했던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또는 지역별로 서부를 향해 나아간 280여년간의 세월과 과정 속에서 유럽·유럽인과는 확연히 다른 미국·미국인이 만들어졌다는 게 터너의 논지다. 오늘날에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미국의 모든 걸 유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당시의 풍토에선 매우 참신할 뿐만 아니라 도발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터너가 보기에 프런티어는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출구라는 점에서 새로운 기회의 장을 제공했다. 그래서 프런티어 지역의 특징적인 정서는 구 사회를 경멸하고, 구 사회의 관념이나 구속을 참지 않고, 그 교훈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경제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동부에서는 가족이 동일 장소에 머무르다 보니 세대가 흐를수록 계급 격차가 심화되었지만, 서부는 동부인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출구 노릇을 했으며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유동성을 가능케 했다.
프런티어사관, 반론과 비판에 직면
좋건 나쁘건, 이렇듯 서부 개척을 통해서 미국 고유의 문화가 서서히 정착되었으며, 개인주의, 평등주의, 자치주의, 낙천주의, 미래주의, 애국심은 물론 심지어 고급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폭력 문화까지도 이 때에 형성되었다는 게 터너의 주장이다.
터너는 프런티어 생활의 특징을 ① 야비하고 힘을 자랑하는 반면에 날카롭게 캐기를 좋아하는 것, ② 편리한 것을 재빨리 발견하려고 마음을 실제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것, ③ 예술적 가치는 결여돼 있을망정 목적 실현의 효용성이 뛰어난, 물질적 사물에 대한 능수능란한 지배, ④ 부단한 신경과민이라고 할 정도로 정력을 과시하는 것, ⑤ 철저한 개인주의와 그로 인한 자유가 낳은 명랑성과 풍족감 등으로 보았다.
작게 말했으면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일 법한 주장들이었지만, 기존 미국사학을 대체하려는 터너의 야심은 하늘을 찔렀기에 터너의 프런티어사관이 무수한 반론과 비판에 직면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프런티어가 실제로는 자유로운 표현을 억제했으며,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요소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반론과 더불어 서부의 삶이라는 것도 혁신적(innovative)이라기보다는 모방적(imitative)이었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루이스 해커(Louis Hacker)는 개척자들의 첫 세대는 매우 낭비적이었고 토지 경작에 무지해서 농사를 짓다가 토지 수명이 다하면 내버리고 떠나는 등의 행태를 반복했으며, 이게 개척자들이 끊임없이 서부로 나아간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했다. 개척정신이니 혁신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 해커는 프런티어사관 때문에 미국 역사가들이 ① 미국 밖의 일에 대하여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만 할 때 미국의 활동을 내향적으로 보아왔고, ② 미국의 제도적 발전이 유럽과 평행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미국적 입장에서만의 자료를 수집해왔고, ③ 미국사에 있어서의 계급적 대립을 무시하고, ④ 미국이 독점자본주의 및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대체적으로 보아 터너의 프런티어사관은 20세기 중반까지 절대적인 호응을 얻다가 60년대를 기점으로 수정주의 학파가 대두하면서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다. 지나치게 미국중심적, 인종주의적, 성차별적, 제국주의적이며, 다른 요인의 고려에 실패했으며, 프런티어보다는 영국의 공화주의가 더 큰 요인이라는 것 등이 비판의 주요 요지였다.
1881년 캘리포니아에서 서부 개척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터너는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1896년 9월호)에 쓴 ‘서부의 문제(The Problem of the West)’라는 글에서 프런티어의 종언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 3백년 동안 미국인의 삶에 있어서 지배적인 양상은 바로 팽창이었다”며 프런티어의 종언으로 인해 팽창의 에너지가 중단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예단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강력한 외교정책을 통해 미국 밖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터너의 전망대로, 이제 팽창은 세계를 향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초 미국이 처음으로 제국주의적 모험을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쿠바, 필리핀을 시작으로 니카라과,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그러한 팽창주의 전통은 훗날까지 지속된다.
터너는 1910년 12월 28일 인디아나폴리스에서 열린 미국역사학회 총회에서 회장 자격으로 행한 ‘미국사에서의 사회적 세력들(Social Forces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프런티어의 종언 이후 나타난 두 가지 변화를 언급했는데, 그건 바로 미국의 해외진출과 유입 이민의 증가였다.
그는 1907년에 도착한 이민 중에서 “1/4이 지중해로부터 온 인종이며, 다른 1/4이 슬라브계이며, 1/8이 유대인이며 유럽 중동부 백인과 튜턴인도 1/6이라는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인종주의적 혐의를 받곤 한다. 예컨대, 양홍석은 위 발언을 지적하면서 “그가 얼마나 잠재적으로 인종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터너는 과거의 서부를 이상향으로 보면서 동부 지역 즉 ‘갈등의 공간’과 비교했으며, 갈등을 서술하면서 인종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인종적인 메타포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동부 지역에서 나타난 이민 세력의 집중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이상향 서부와 대비해서 설명하면서 그는 거의 늘 ‘인종’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확대되고 있던 도시화 문제를 언급할 때에도 그는 ‘인종’적인 접근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민과 도시화가 낳은 미국적인 문제점을 인종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나타난 그의 적대감은 분명했다.”
터너의 진심을 해석하는 것엔 논란의 소지가 있겠지만, 프런티어의 종언이 미국사회의 주류인 앵글로색슨계 미국인 신교도를 지목하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배타적 결속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은 건 분명하다. WASP만 입장할 수 있는 컨트리클럽은 1882년에 최초로 생겨난 뒤 1929년에는 4천5백개에 이르며, 그로튼(1882)을 비롯하여 상류 WASP 자제들의 진학 예비학교들이 생겨나고, WASP 상류인사들의 인명록인 <명사록(Social Register)>(1887)이 창간되고, ‘메이플라워호 자손협회’(1894)를 비롯한 WASP의 유서 깊은 계보를 자랑하는 클럽들의 창설이 잇달았다. 이는 프런티어의 종언이 중하류층의 서부행을 중지시킴으로써 그들의 불만이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것에 대처하기 위한 WASP의 자구책이었다.
프런티어는 미국인의 유전자인가?
터너의 프런티어사관을 어떻게 평가하건 프런티어가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대중문화가 미친 영향이 컸다. 존 벨튼(John Belton)은 서부영화의 탄생은 서부의 몰락,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프런티어의 종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프런티어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에 서부영화가 서부를 대신하기 시작했으며, 비록 신화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해서 미국적 성격을 계속해서 형성해 나갔다는 것이다.
1926년부터 1967년까지 40년 이상에 걸쳐 할리우드는 다른 어떤 종류의 영화보다 많은 서부영화를 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제작된 모든 할리우드 영화의 거의 4분의 1이 서부영화였다. 1926년에 이전에 대한 통계가 없어서 그렇지, 1903년에 제작된 [대열차강도]의 인기가 말해주듯이 무성영화시대를 석권한 것도 바로 서부영화였다. 서부영화는 30-40년대에 매년 1000편, 50년대에 매년 800편 이상 제작되었다. 서부영화는 텔레비전까지 점령했다. 50년대 중후반 시청률 10위까지의 프로그램 가운데 웨스턴 드라마는 7개까지를 점유하기도 했다.
1958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자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초중등 교육 과정에서 수학과 과학을 새로운 우선 순위로 삼고, 인터넷 개발에 착수했다. 케네디와 존슨 시대에 우주의 정복은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이후 SF 영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벨튼은 “기술에 대한 태도에서 대조되지만 서부영화와 SF영화는 프런티어 경험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서부영화의 위력이 사라지면서 SF 영화가 그 주제와, 상황, 도상, 모티프의 상당 부분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SF 영화와 더불어 게토(빈민가)를 대상으로 한 경찰 수사물도 서부극의 정서구조를 이어받았다. 토드 기틀린(Todd Gitlin)은 “서부극은 개척 시대를 지나 70년 이상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다양한 형식 모색과 구체화를 통해 자리매김되고 재생산되기를 반복했다”며 “텔레비전은 경찰 쇼를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황무지는 게토로 옮겨 갔다”고 말한다.
1994년 영화 [The Cowboy Way]의 한 장면.
1990년대부터는 인터넷이 새로운 프런티어가 되었다. “인터넷은 공짜”라는 슬로건은 터너의 “공짜 땅(free land)”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렉 휘태커(Reg Whitaker)는 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념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변경 자본주의(frontier capitalism)’ 혹은 거친 개인주의로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자아상은 6연발총과 동등한 동시대 무기인 고속모뎀으로 무장하고 최첨단 문명의 바깥에 서 있는 외로운 변경 개척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프런티어는 미국인의 유전자인가? 말도 안되는 우문(愚問)이지만, 프런티어가 오늘날 미국인의 삶에서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과장법으로 보는 게 옳으리라. 잠시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프런티어사관을 미국인의 문화적 기질에 국한시켜 본다면 매우 설득력이 높다는 걸 인정하긴 어렵지 않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국제적으로 난폭하게 구는 카우보이 기질과 그 바탕이라 할 인종차별주의나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삶은 확실히 미국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노다지’를 잡으려는 한탕주의 속성이 강하며 그것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화되어 왔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러나 동시에 ‘동전의 양면’ 원리처럼 그 이면의 특성이 미국의 활력이자 저력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글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글쓴이 강준만은 언론과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문화사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조지아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위스컨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부터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사 산책(전 23권)](2002~2011), [한국대중매체사](2007), [미국사 산책(전17권)](2010), [세계문화의 겉과 속](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