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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名直言(비명직언)
非;아닐 비, 名:이름날 명, 直:곧을 직, 言:여쭐 언.
어의: 군주가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그 신하는 직책을 걸고 간해야 한다.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직책상 해야
할 말은 한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고구려의 창조리(倉租利)는 제14대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喪)이 되었다.
296년 전연의 모용외가 침입해오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모용외의 병력이 강하여 우리 국경을 자주 침범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창조리가 나서서 말했다.
“고노자(高奴子)가 현명하고 또 용감하니 능히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적이라 해도 고노가 앞에는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新城 太守)로 삼아 출격시키니 과연 모용외가 다시 침범하지 못했다.
봉상왕 9년 가을,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징발하여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성들이 토목공사에 지친 나머지 도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가뭄이라는 천재까지 겹쳐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지금 백성들은 천재로 인하여 살 곳을 잃고 사방으로 유랑하는데 폐하께서는 그러한 백성들을 무리하게 부리니 백성의 부모로서 못할 일입니다. 또 이러한 때에 이웃의 강적이 침공해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숙고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궁궐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못하면 어떻게 임금으로서 위엄을 세울 수 있겠는가? 대주부(大主簿)는 지금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하여 짐을 비방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함이요. 신하로서 임금에게 바른말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옵니다.”
“썩 물러가렷다! 감히 짐을 가르치려 들다니…….”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해 사치를 일삼고 유흥에 빠져 여러 차례 간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창조리는 대주부의 직에서 물러나 칩거했다. 그러자 조불(祖弗), 소우(蕭友) 등이 찾아와 국가의 남맥상을 성토하면서 끝내는 왕의 퇴위를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은 스스로 자결했고, 창조리는 을불(乙弗), 즉 미천왕(美川王)을 옹립했다. 그는 일신상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하된 도리로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飛字登天(비자등천)
飛:날 비, 字:글자 자, 登:오를 등, 天:하늘 천.
어의; 비(飛)라는 글자가 하늘로 날아갔다는 말로, 어떤 일이 그 일을 주도했던 사람과 운명을 같이 할 때 비유
하여 쓴다.
문헌: 한국인물고(韓國人物考)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강릉부사(江陵府使), 함흥부윤(咸興府尹) 등을 지냈으며, 문장에 능하고 시조를 잘 지었다.
그는 서예가로서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명성을 얻었고, 특히 초서를 잘 썼다.
그는 큰 글씨도 잘 썼는데, 한번은 ‘날 비(飛)’자를 써서 아들 만고(萬古)에게 주며 말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쓴 글자이니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여라.”
만고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서 조용한 방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양사언이 안변의 원으로 있을 때 큰 화재가 나 그 책임으로 귀양갔다가 2년 후 형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아쉽게도 병사했다. 바로 그날,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비(飛)’자가 하늘로 날아 올라갔는데 그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비자등천(飛字登天)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글씨를 쓸 때 온 정성을 기울여 썼기 때문에 그 글자에는 혼이 담겨 있어 그와 운명을 같이 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저서 <봉래시집(蓬萊詩集)>에 아래와 같은 시조가 실려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은 자연을 사랑하고 산수를 즐겨 금강산을 자주 왕래했으며 ‘봉래’라는 호도 여기서 연유했다고 한다.
지금도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넓직한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和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가 쓴 글씨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射琴匣(사금갑)
射:쏠 사, 琴:거문고 금, 匣:갑 갑.
어의: 거문고 상자를 쏘라는 말로, 신라 비처왕이 궁중에 숨어 있는 사람을 제거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보름날
오곡밥을 지어먹는 유래가 되었다.
문헌: 삼국유사 권1.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知王) 즉위 10년 (서기 479) 어느 날,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행차 중에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 가보십시오.”
그래서 왕은 기사(騎士)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했었다. 까마귀가 피촌(避村.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이르자 멧돼지 두 마리가 한창 싸우고 있었다.
돼지 싸움에 정신이 팔려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려 근처를 배회하고 있노라니까 한 노인이 물속에서 나와 서찰(書札)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이 서찰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기사가 돌아와 왕에게 드리니 왕이 말했다.
“열어보고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게 하는 편이 낫겠구나.”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바로 폐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왕은 일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서찰을 열어보게 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금갑(琴匣.거문고 상자)을 쏘라.”
왕은 곧 궁으로 돌아가 거문고 상자를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내전(內殿)의 분향수도(焚香修道. 불사를 맡아 하는 일) 중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추궁한 결과 궁주(宮主)와의 불륜 사실이 밝혀져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그때부터 매년 정월의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 까마귀를 기리는 날)이라 하여 오곡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풍속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사색당파(四色黨派)
四:넉 사, 色:빛 색, 黨:무리 당, 派:갈래 파.
어의: 조선 시대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 등의 당파를 가리키는 말.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되는 현상을 이른다.
문헌: 당의통략(黨議通略)
사색당파는 조선시대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사대당파(四大黨派)를 말하며, 제14대 선조(宣祖) 8년(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을 계기로 3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당파가 생긴 것은 16대 인조(仁祖), 17대 효종(孝宗) 때였는데, 서인(西人)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파생되었고, 동인(東人)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갈라졌다. 그 중에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양분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권세를 잡게 되자 대북은 전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소북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니 북인이 바로 그들이다.
당쟁의 원인은 첫째가 유학파(儒學派)의 대립이었으며, 둘째는 왕실 내 외척들의 내홍이었고, 셋째로는 정치적 제도의 미비였다. 구체적 원인은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에 의한 동서 대립을 들 수 있으나 그 뿌리는 유학의 주자학(朱子學)에 있다.
충청도 남포의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와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로 계승되어 조선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어받고 그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의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은연 중 정치적으로 연대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렇게 반목과 숙청이 반복되는 당쟁은 중앙에 집중한 양반 관리들의 치열한 권력 쟁탈 경쟁 때문이었다.
선조가 즉위한 뒤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직위인 이조전랑(吏曹銓郞)에 이해(李澥)가 천거되자 사림파의 구세력인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이를 거부했다. 이해가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으로 신세를 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끝내 전랑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김효원(金孝元)이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사람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파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김효원이 동대문 밖 낙산에 살았다하여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이 서쪽 정동에 집이 있었으므로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전랑(銓郞)이란 이조(吏曹) 정랑과 좌랑을 일컬으며 내외 관원을 천거, 전형하는 정5품 직책이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삼사(三司)인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했다.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요직이다 보니 그 인사권을 두고 치열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게 마련이었다.
또 양반들은 국가로부터 과전(科田)과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는데 그들은 관직을 떠나면 그를 중심으로 동족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는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모자라 과전법(科田法)을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직전법이란 현직에 있는 사람에 한하여 토지를 지급해 주는 제도였다.
그마저 나누어 줄 토지가 없어 신진 관료와 구 관리들 간에 대립이 생겼다.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대립도 이와 갚은 관련이 있다.
서인은 다시 노(老), 소(少) 양당으로 갈라지면서, 노론은 송시열(宋時烈), 김익훈(金益勳)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고, 소론은 조지겸(趙持謙), 윤증(尹拯)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말기까지 정권 쟁탈을 벌였다. 당시 부제학(副提學)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인이면서도 1584년 선조 1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양 파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산해(李山海),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등 동인의 쟁쟁한 인물들이 등용됨으로써 서인의 세력은 기울고, 동인의 세력이 강화되자 내부 분열이 생기어 1591년 선조 24년에는 남인과 북인의 두 갈래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남인은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 등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등이 영수가 되었다.
남인, 북인의 명칭의 유래는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으므로 남인(南人)이라 했고, 이발(李潑)은 북악산 밑에 살았으므로 북인(北人)이라 불렀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그로부터 7년간은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던 관계로 파쟁을 벌일 겨를이 없었으나 전란이 끝나자 곧 남인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실각되었고, 북인(北人)의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북인의 득세로 동인(東人)의 명칭은 없어졌다.
그러나 북인 또한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내분이 일어나 대소양북(大小兩北)으로 다시 나누어지고, 대북은 다시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 피북(皮北), 탁북(濁北) 등의 6파로 분열되었으며, 소북 또한 청(淸), 탁(濁) 양북으로 분파되었다. 대소 양북은 광해군(光海君)의 즉위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이 세력을 잡아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집권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으로써 대북은 몰락했다. 그 후 서인은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분파되었으며, 김유(金瑬)를 중심으로 한 노서(老西)와 이를 반대한 소장파 소서(少西)로 다시 나뉘었다. 그리고 이들은 원당(原黨), 낙당(洛黨), 산당, 한당 등으로 세분되어 대립했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고 있던 동안에도 남인은 이원익(李元翼)의 등용으로 명맥을 이어왔고, 북인 중 대북은 전멸했으나 소북은 남아서 남, 소북의 3파 대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3색이라 일컬었고, 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 양론으로 분파되니 남인, 서인, 노론, 소론을 4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세자 책립문제를 둘러싸고 노소론이 충돌한 결과 소론이 승리하고 노론이 참패했으며, 또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인하여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 수십 명의 서인 지도자들이 숙청을 당하여 노론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경종 다음에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신임사화의 참상을 목도한 왕은 노소 양파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다음 왕인 정조(正祖) 또한 전왕의 시책을 계승하여 탕평에 주력했으므로 이로부터 당쟁은 크게 완화되었으나 권세는 노론이 장악했다. 그러나 영조 때에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의 3대간은 외척의 세력 다툼은 잦았으나 이전과 같은 참극은 없었고, 고종(高宗)의 등극 후는 대원군(大院君)의 파당 타파와 인재등용 시책으로 당파 관념이 점차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당쟁은 백성들로 하여금 상전 앞에 아부해야 살아남는 풍토를 조성하게 해 서로 중상하고 반목하는 불신 풍조가 계속되었다.
이런 붕당(朋黨)은 내정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와 국방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쳐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국란을 초래하여 나라 발전에 엄청난 지장을 가져왔다.
홍경래란(洪景來亂)과 동학혁명(東學革命) 등도 당쟁의 산물이었다.
또 밖으로 청(淸), 일(日), 러(露) 등 인접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된 것도 340여 년간 지속되어온 당쟁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獅熊之鬪(사웅지투)
獅;사자 사, 熊:곰 웅, 之:어조사 지, 鬪:싸움 투.
어의: 사자와 곰의 싸움이라는 말로, 근대 불교계의 거두 만공 스님과 만해 스님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곰과 사
자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다툼을 이른다.
문헌: 만해한용운연구(萬海韓龍雲硏究)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제 백담사(白潭寺)로 가서 연곡(連谷)에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의 계명은 봉완(奉琓)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홍성(洪城)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東學革命)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시베리아 등지로 방랑하다가 돌아와 불교를 개혁하고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불교 대중화와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만해는 일제 때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치욕적으로 생각하여 민적이 없이 살았다. 그로 인하여 받은 대가는 혹독했다.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식량과 의류 등 일체의 생활필수품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런 고초 속에서도 무남독녀 외딸 영숙(英淑)은 왜놈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며 집에서 손수 공부를 가르쳤다.
1937년 봄, 조선총독부에서는 불교를 친일화시키려고 전국 31개 본산의 주지(住持)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자리에서 마곡사(麻谷寺)의 만공(滿空) 송도암(宋道巖. 1871~1946)선사가 총독부를 향해 일성을 토했다.
“옛날에는 시골 승려들이 감히 장안에 들어서지도 못했고, 어쩌다 몰래 들어오면 볼기도 때리고 엄한 법률로 다스렸는데, 이제 총독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볼기 맞던 시절이 그립도다. 우리를 여기에 부른 것은 소위 사찰령을 내려 승려의 조직을 휘어잡으려는 속셈 같은데, 만일 그리한다면 총독부가 무간지옥(無間地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음모를 꾸미는 총독이야말로 진짜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만공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자 장내는 아연 긴장하여 총독 미나미 지로((맘차랑)를 주시했다. 금방 무슨 날벼락이라도 내리지 안겠는가 마음을 졸이며 만공이 무모하다고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헌병이 들이닥쳐 만공 스님을 체포하려 했다. 그런데 총독이 무슨 생각에선지 이를 제지시켰다. 그리고 참석한 스님들을 전부 총독관저로 초대하여 다과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만공의 호통에 스님들의 친일화 계획을 포기했던 것이다.
만공은 한달음에 만해 스님을 찾아갔다. 만공이 총독을 호되게 꾸짖은 서식은 삽시간에 장안에 퍼졌다. 그런데 그 일을 미리 알고 있던 만해는 만공이 찾아오자 매우 반가이 맞았다.
만해가 입을 열었다.
“기왕이면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의 주장자(拄杖子)로 총독의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겼더라면 시원했을 걸…….”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막대기 싸움은 곰(熊.웅)이나 하는 짓이고, 호령은 사자라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까 만공 자신은 사자가 되고, 만해는 곰이라는 이야기였다.
만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령은 새끼 사자가 하고,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법이지.”
그리되면 만공은 새끼 사자이고, 만해는 큰 사자라는 뜻이다.
당대 불교계의 걸출한 두 선사는 서로 자웅을 겨룰 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만해가 떠나자 만공은 ‘이제 한양에 가도 만날 사람이 멊구나.’ 하면서 한양에는 발걸음을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三馬太守(삼마태수)
三:석 삼, 馬:말 마, 太:클 태, 守:지킬 수.
어의: 세 마리의 말만 가진 태수라는 말로, 숙종 때 사람 송흠에게서 유래했다. 청백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헌: 고사성어 대사전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이 임기를 마친 다음 다른 부임지로 떠날 때에는 고을에서 감사의 표시로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중종(中宗) 때 송흠(宋欽.1459~1547)은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있다가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부임해 갈 때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그 세 마리 말 중 한 필은 본인이 탈 말이었고, 나머지 두 필은 어머니와 아내가 탈 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그는 그처럼 청렴하기도 했지만, 연산군(燕山君)의 학정이 심할 때에는 물러나 후진들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며 조용히 지낸 처세가이기도 했다.
이와 흡사한 이야기로 <고려사(高麗史)> 권121 열전34에 최석(崔奭)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최석(崔奭)은 어렸을 때 이름은 최석(崔錫)이라 했는데 청렴한 관리였다. 그때에도 역시 임기가 끝나는 부사에게는 일곱 필의 말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평(昇平. 지금의 순천)부사였던 그는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일곱 필의 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초 그에게 주려던 말이 새끼를 낳아 여덟 필이 되자 그 새끼 말까지도 그곳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의 듯을 기려 비를 세우니 바로 팔마비(八馬碑)다.
지금도 순에서는 ‘팔마의 고장’이라 하여 청백리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蔘復三斤(삼부삼근)
蔘:인삼 삼, 復;돌아올 부, 三:석 삼, 斤:무게 근.
어의; 인삼 세 근을 되찾다. 즉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해 찾지 않았던 물건이 뜻밖에 다시 되돌아 왔음을 의미한
다.
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오리집(梧里集)>
오리정승(梧里政丞)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억재(億載)의 아들이었다. 이원익이 금부사(禁府使)로 있을 때 난리가 날 것이라는 등 시국이 뒤숭숭해서 선조(宣祖)는 인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다. 그러자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들어와 말하였다.
“어명대로 구하긴 했습니다만 그가 워낙 쇠약해 있으니 삼(蔘) 서 근만 하사해주시면 기력을 키워 봉사할 것입니다.”
선조는 어련하랴 싶어 믿고 삼 서 근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데리고 들어온 인물이 석 자 세 치 관복이 끌릴 정도로 작은 체구에 얼굴은 말처럼 길쭉하여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선조는 어이가 없어 내뱉듯이 말했다.
“삼 서 근만 버렸군!”
그 사람이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었다.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진(蒙塵) 길이라 해도 수라가 번번이 늦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라 상궁을 불러 나무라니 그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원익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와서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보고는, 뙤약볕에 한참씩 드러누웠다가 그제야 들여보내기 때문에 이렇게 늦었사옵니다.”
그래서 이원익을 불러 탓하자 그가 말했다.
“이 혼란 중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사옵니까? 그래서 신이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본 것이고, 만약에 독이 들었을 경우 볕에 누워 있으면 빨리 퍼질 것이라 여겨 그렇게 신의 소견껏 하였을 뿐이옵니다.”
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 참, 삼 서 근 다시 찾았군!”
이원익은 1573년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사(黃海道使)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뒤에 원익은 팔십을 넘기고, 원로대신으로서 광해군 때 여주로 귀양가 있다가 인조반정엔 영의정(領議政)에 있었으며, 광해군을 죽이고자 할 때 대비(大妃)에게 간청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세상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보고야 눈을 감았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三寸舌擊退敵(삼촌설격퇴적)
三:석 삼, 寸:치 촌, 舌:혀 설, 擊:칠 격, 退:물러갈 퇴, 敵:원수 적.
어의: 세치 혀로 적을 물리치다.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서희 장군이 이론으
로 따져 물리친 고사에서 유래했다. 웅변의 중요성을 이르는 말이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야기 한국사(韓國史)
거란(契丹) 916년, 고려 건국 2년 전에 중국 북쪽에 생성된 나라로, 발해(渤海)를 멸하여 동단국(東丹國.동쪽 글안)을 세우고, 또 진(晋)나라를 합쳐서 국호를 대요(大遼)라 했다.
고려 태조(太祖)는 거란을 오랑캐로 여겨 거란에서 보낸 사신 30명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보낸 낙타 50필도 굶겨 죽여 버렸다. 그것은 거란이 무도한 나라임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거란에게 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송(宋)나라를 쳐서 중국을 통일하려던 거란은 고려의 제4대 광종(光宗)이 송나라와 국교를 맺자 제6대 성종(成宗)12년에 요동을 지키고 있던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치게 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993년 윤서안(尹庶顔)을 선봉장으로 내세웠으나 청진강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고려는 시종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942~998)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임명해서, 오랑캐를 막도록 조치하였다.
왕은 안북부(安北部)까지 나가 장수들을 독려하는 한편, 예부소경(禮部少卿) 이몽전(李蒙戰)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적진으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적진의 정황을 살피고 온 이몽전이 말했다.
“적장의 말이 고려가 압록강까지 나온 것은 거란 땅을 침범한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왕은 서희 등 장군들과 중신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적장은 누구이고, 병력은 얼마나 되는고?”
왕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적장은 소손녕이고, 80만은 되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저들 거란은 송나라를 쳐서 중원(中原)을 통일하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으니 우리를 먼저 쳐서 송과 손을 끊게 하겠다는 심산이 아니겠소? 따라서 송과 손을 끊으면 물러가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이오?”
박양유(朴良柔)가 나서서 말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발해의 옛 땅 대동강 이북을 떼어 주면서 화평책을 써야 할 줄 압니다.”
이에 서희(徐熙)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태조대왕께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시려는 큰 뜻으로 확장해 놓으신 것을 쉽사리 적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거란이 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싸우지도 않고 국토를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 고려의 수치입니다. 신이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서희의 자신 있고 강경한 태도에 좌중은 잠잠해졌다. 이지백(李知白)이 말했다.
“신도 중군사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싸우지도 않고 국토를 내준다는 것은 태조대왕께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려의 조정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거란군 진영에서는 사신 이몽전이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므로 드디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게 되었다.
거란군은 벌판 싸움엔 능하였으나 험준한 산이 우뚝우뚝 솟은 고려 땅에서는 어떻게 공격을 해야 좋을지 지지부진했다.
적장 소손녕은 당황하여 고려로 사람을 보냈다.
“귀국의 대신을 우리 진으로 보내면 서로 회담을 한 뒤에 적절한 결정을 내리겠소이다.”
그러나 거란군의 진중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서희가 나서며 말했다.
“신이 어리석고 부족하오나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짓겠나이다.”
“장군이 간다면 과인도 안심하겠소. 그러나 중군사의 중책은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폐하! 중군사나 상군사가 없어도 반드시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만약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사오니 만수무강하소서.”
서희는 적진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소손녕의 군막으로 인도된 서희는 소손녕과 미주 앉았다.
소손녕은 점잔을 빼며 위협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장군! 고려국은 신라 땅을 근거로 건국된 나라임에 틀림없소. 그리고 우리 거란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난 나라임이 확실하오. 그런데 귀국이 우리 거란의 영토인 옛날 고구려 땅을 침범했소. 그리고 귀국은 국경이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적대시하고 멀리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있소.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 이유도 여기에 있소. 그러므로 첫째, 귀국에서 즉시 우리 영토인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조공을 바칠 것이며, 둘째 송나라와 단교를 하면 군사를 돌이키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건너 개경을 무찌를 것이니 이에 대한 장군의 의견을 말하시오.”
서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목조목 따지며 설득했다.
“우리 고려가 신라에서 일어났다고 장군은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분명히 고구려의 후신이오. 때문에 국호도 고구려를 줄여 고려라고 하였소. 국경문제를 말한다면 거란의 동경부까지가 모두 우리 고려의 영토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째서 우리나라가 침범하였다고 하시오? 그리고 우리가 귀국에 조공을 못한 것은 압록강 연안의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혀서 그런 것이었소. 이제라도 여진족을 좇아버리고 압록강 이남의 땅을 돌려준다면 조공을 하겠소.”
소손녕이 말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귀국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귀국이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우리나라를 오랑캐처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군사를 움직인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송을 친다면 귀국에서는 어떻게 하겠소?”
“남의 나라를 먼저 쳐들어간 일이 없는 우리가 어찌 다른 나라의 싸움에 끼어들겠소? 우리 민족은 예부터 평화를 즐기는 순박하고 온후한 민족이오.”
이렇게 논리 정연한 서희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회담의 내용을 자기 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그 회답을 서희에게 전하였다.
“우리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려국은 압록강 이남의 땅에 성을 쌓아 공로(貢路: 조공을 바치러 다니는 길)를 개척하여 매년 사신을 보내고 서로 교통하겠다면 군사를 회군시키라고 했소. 그리하겠소?”
“좋소. 그리하겠소.”
이리하여 중군사 서희 장군은 세 치의 짧은 혀 하나로 소손녕이 거느린 80만 대군을 물리쳤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삼촌설 격퇴적(三寸舌 擊退敵)’ 또는 ‘서희담판(徐熙談判)’이라 이르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尙不開箱(상불개상)
尙:아직 상, 不:아니 불, 開:열 개, 箱:상자 상.
어의: 아직 상자를 열지 않았다는 말로, 숙종 때 한 청렴한 선비의 삶에서 유래했다. 곧고 깨끗하며 고고한 사
람을 이른다.
문헌: 금계필담(錦溪筆談)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정월 대보름날 밤에 남산의 가난한 선비들을 생각해서 약밥 한 상자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남산골에 가서 굶주림이 가장 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도록 하라.”
어명을 받은 내관(內官)은 남산골에 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한 집을 살펴보니 집이 반쯤은 헐어지고, 뜰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 사람의 발자국이 없었다. 그래서 희미한 등잔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뒤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아낙네의 힘없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좋으련만…….”
그러자 역시 힘이 없는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구들에 불기가 끊어진 지도 사흘이 지났으니 어디서 따뜻한 물을 구하겠소?”
내관은 이 집이 가장 가난한 집이라 생각하고, 그 약밥 상자를 창문을 열고 밀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정월 대보름날, 숙종은 옛일을 생각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낸 약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홍문관 이서우(李瑞雨.1633~?)가 말했다.
“전하! 소신이 그때 그 약밥을 받았었나이다. 신은 그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아내와 함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창문으로 약밥 한 상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약밥을 물에 말아 아내와 함께 여러 날을 연명하여 주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 있었나이다.”
“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럼 그 약밥 상자 속에 다른 물건은 들어 있지 않았던가?”
“예, 은덩이 하나가 함께 들어 있었나이다.”
“그것이면 한 재산으로 족했을 것인데?”
“네에! 신은 그것이 어디의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까닭으로 지금까지 상자를 열지 않고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나이다.”
숙종은 사경을 헤매는 가난 속에서도 함부로 남의 재산은 추l하지 않은 이서우의 청렴함에 감탄하고, 그를 특별히 공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써 문주사(文珠寺) 풍담대사비(偑潭大師碑)를 썼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床廛之女(상전지녀)
床:책상 상, 廛:가게 전, 之:어조사 지, 女:계집 녀.
어의: 상전에 간 여자라는 말로, 공연히 싱겁게 피식피식 웃는 사람을 이른다.
직접 거론하기 거북할 때 묵시적으로 지칭하는 경우를 비유한다.
문헌: 한국인(韓國人)의 야담(野談)
왕정(王政)시대의 궁중(宮中) 나인(나인)들의 생활은 남녀 관계를 철저하게 통제하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을 주고자 동성끼리 결혼을 시켜 일반가정과 같이 영감. 마누라라고 부르며 살게 하였다. 이때 임금은 그들에게 살림 도구 일체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들은 가구로 자개장을 애용했는데 그 때문에 자개장을 동성결혼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암소 뿔을 깎아 ‘각신(角腎)’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생활의 도구로 썼다. 만드는 법은 암소의 뿔을 두께 한 푼 정도로 얇게 속을 후벼낸 후 그 안을 솜으로 채우고 더운 물에 담가두면 부드럽게 탄력이 생겨 남성 대용품으로 제법 쓸 만했다고 한다.
이 각신은 아녀자들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상전이라는 일용 잡화상에서 팔았다. 그래서 장옷을 쓴 여인이 상전(床廛)에 들어와 말을 하지 않고 씽긋이 웃으며 돈을 내밀면 주인은 눈치로 알아차리고 종이에 싼 그것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하나같이 생존 기간이 짧았는데 남녀관계를 탐닉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중에는 왕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이 다수여서 경희궁(慶熙宮)에 따로 수용하였는데, 일제시대 때 궁의 여러 건물이 이축될 때 그런 물건들이 수십 개나 쏟아져 나와 외국인 수집가에게 고가로 팔렸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