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한승연저)
정리 김광한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황헌의 문집. 6권 7책. 필사본.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후부터 황헌이 자결할 때까지의 부분은 문인 고용주(高墉柱)가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한말 위정자의 비리·비행, 외세의 침략과정, 특히 일제의 만행,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 등이 실려 있어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저자도 죽을 때, 바깥 사람에게 보이지 말 것을 자손에게 당부했다. 그러다가 부본(副本) 1부가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있던 지우(知友) 김택영(金澤榮)에게 보내져, 김택영이 〈한사계 韓史綮〉에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여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황헌 본가의 원본과 김택영이 교정한 부본을 모아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간행했다. 구성을 보면 1864~93년까지의 기록은 1책 반에 불과하고, 1894~1910년의 기록이 5책 반으로 갑오개혁 이후의 내용이 자세하다. 체재를 살펴보면 1894년 이전은 수문수록(隨聞隨錄)하여 연대순으로 배열했으나, 명확한 연월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사건내용도 연대순이 바뀐 것이 있다. 그러나 그뒤의 기록은 연월일 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1894년 이전에 관한 기록은 주로 대원군의 집정과 안동 김씨의 몰락, 대원군 10년간의 독재정치,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알력, 명성황후와 그 일족의 난정, 일본세력의 침투, 열강과의 관계, 임오군란과 청나라의 간섭, 갑신정변, 청국과 일본의 각축 등 고종 즉위 이후 30년 간의 국내외 관계를 간단하게 기술했다.
대원군의 정치에 대하여는 매우 비판적이나, 명성황후의 척족들이 득세하면서 주구를 일삼아 대원군 시절만도 못하자 백성들은 오히려 대원군의 집정 시대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정박한 것에 대하여는 훈련하기 위해서 놀이차 온 것이지 침략할 의사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라고 논평해 제국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나타나지만, 외국의 싼 인조 상품이 밀어닥쳐 국내의 산업이 무너지고 귀중한 천연 산품이 값싸게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가져온 〈조선책략〉으로 인해 유림들의 반대 여론이 들끓자, 부강하기 위해 먼저 서양의 제도를 배우고 기술을 익혀야 된다고 하여 서구문명의 도입을 환영했다.
1894년 이후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일제의 침략과 갑오개혁, 을미사변, 러시아의 침투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 주권을 강탈하기 위한 일제의 간계, 친일파의 매국 행위, 이에 반대하는 의병운동과 의사들의 활동, 탐관오리의 비행, 친일파 부녀들의 추잡상, 변해가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사실 등에 대해 기술했다. 을사오적의 비행을 고발하고 그들에 대한 국민의 질타를 수록했으며, 일진회의 진상도 폭로했다.
〈매천야록〉에서 특히 중점을 두고 기술한 기사는 의병관계 기록으로, 특히 정미의병 봉기 이후 전국의 의병 현황을 '의보'(義報)로 봉기 일자와 지명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 하얼빈[哈爾濱]에서 사살한 안중근과, 이완용을 죽이려다 실패한 이재명의 의거도 자세히 기록했다.
동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동학교도를 동비(東匪)로 표현하고, 어윤중(魚允中)이 장계에서 동학교도를 가리켜 비도(匪徒)라 하지 않고 민당(民黨)이라 한 것을 비판했다. 이 책은 주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서, 내용 가운데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어 틀린 부분도 있고 과장된 곳도 있다. 그러나 당대에 있었던 각종 사건을 망라하여 간명하게 수록했고, 다른 기록에 없는 사실까지도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귀중한 사료들이 많이 실려 있다.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참고해야 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