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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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더욱 어깨가 무겁습니다. 앞으로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전문■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처음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한나라당에게 1998년 4월 2일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당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선거였다.
정권이 교체된 상황에서 부산, 대구, 문경 재보궐선거마저 패한다면 한나라당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90퍼센트 이상의 지지도를 얻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어디에서도 이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시점에 문경 예천의 주민들이 나에게 이번 선거에 출마해 달라는 뜻을 전해왔다. 문경 예천은 과거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으셨던 곳으로 나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곳 주민들은 내가 출마 결심만 해준다면 ‘선거운동은 걱정하지 마라, 우리들이 나서서 하겠다’는 고마운 뜻을 전해왔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한번 해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기왕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원내로 들어가 지원유세 중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대구 달성에서 당내 누가 출마해도 여당 후보에게 크게 뒤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당은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대선 패배 후 대구에서도 진다면 한나라당은 정말 붕괴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이때 한나라당의 대구시지부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분은 내게 사정을 설명하며 달성군에 출마해 달라고 했다. 문경 예천과는 달리 내가 달성군에 출마하기 위한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주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위험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며 달성출마를 반대했다. 고민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설령 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왕 한나라당을 돕기로 했다면 가장 힘든 곳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이겨야 당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여당 후보는 달성군 출신으로 지역을 탄탄히 관리해온 사람이었다. 자금과 조직력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정부 여당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분명 내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하는 등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선거에 대비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참모들조차 달성에 어떤 동네가 있는지 파악도 못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사퇴한 전임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개인 사정으로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한나라당 당원 명부조차 인수인계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한나라당 달성군 지구당 사무실이었던 곳이 하루아침에 상대 후보의 선거 사무실로 접수되었다. 우리에게 당원 명부를 주기로 한 사람이 아예 컴퓨터를 들고 사라졌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당장 사용할 사무실조차 없다니 할 말이 없었다. 부랴부랴 사무실부터 구했다. 사무실에 컴퓨터와 복사기를 한 대씩 들여놓고 단 세 사람으로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넥타이를 맨 사람은 다 상대 후보 쪽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동네마다 달력과 카드가 돌고 있다고 합니다. 판문점 공짜 관광을 시켜준다며 부른 관광버스가 줄을 섰답니다. 온 동네의 음식점이 시끌벅적 야단났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큰일인데요. 우리 쪽에서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거대책본부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 식으로 쓸 돈도 없을뿐더러, 부정한 선거를 치른다면 굳이 내가 정치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나라 일을 하겠다고 선거에 나선 사람이 돈으로 표를 사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유권자에 대한 모독입니다. 혼탁한 정치판에 같이 어울려 똑같이 하려고 했다면 제가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돈으로 하는 정치는 안 합니다. 대신 한 사람의 유권자라도 더 찾아뵈려고 성심껏 노력할 테니, 보이는 것만 가지고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하루는 나를 돕던 의원 한 분이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선거 자금이 얼마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없습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의 비용은 있어야지 운동원들 밥은 먹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제 전 재산이라야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몇 천만 원 정도입니다. 현금을 동원하라면 법정 한도액만큼은 모아보겠습니다.”
당에서 최소한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후보 스스로 마련한 돈으로 선거를 치르는 상황에서 그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별다르게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다. 돈으로 표를 사야 한다면 백 번을 해도 지는 싸움이었다.
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후원금을 모았지만 모인 금액은 총 3천여 만 원, 광고비를 빼고 나니 1천5백만 원이 남았다.
“정권이 교체되고 나니 다들 우리 쪽을 지원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아나 봅니다.”
실무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매끼 식사도 실무진들이 직접 해먹어야 했다. 선거운동을 시작하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박근혜 후보 사무실이 맞나요?”
아주머니 몇 분이 떡을 해가지고 사무실을 찾았다. 그 후로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고구마를 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선거자금에 보태라고 돼지를 팔아 마련한 돈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사무실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역 사람들도 처음엔 여당 후보의 눈치를 보느라 돕고 싶어도 선뜻 나서지 못했지만, 언제 그랬나 싶게 사무실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구와 경북의 의원들과 당원들도 동네마다 담당을 맡아 내 선거인 양 열심히 뛰어주었다.
시골 마을 구석구석까지 안 누비고 다닌 곳이 없던 어느 날, 차를 몰던 보좌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걸 좀 보세요.”
마을 입구에서 주민들이 환호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아주머니가 솥 가득 담긴 호박죽을 보여주며 죽 한 그릇을 듬뿍 담아주었다.
“날이며 날마다 고생일 낀데 이거 좀 들고 하이소. 온다는 소식 듣고 만든 깁니더.”
순간 코끝이 찡했다. 하루 20시간씩 강행군을 하던 때라 제때 끼니를 해결하기 못하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터였다. 나는 아주머니가 내민 그 호박죽을 감사히 받아들었다. 호박죽만큼이나 따스한 손이었다.
시장을 돌 때면 선거에 보태 쓰라고 천 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어주는 시장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중년의 남자분이 검은 보자기를 들고 서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내민 적도 있다. 보자기를 펼쳐보니 우족이었다. 힘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먹고 힘내서 선거 치르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박근혜 캠프는 돈이 없어 고전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뒤 시장에 가면 여러분들이 몰려들어 천 원, 2천 원 지폐가 담긴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약방에 가면 박카스며 피로회복제를 손에 쥐어주었고, 밥집에 가면 한사코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게 말했다.
“선거에 꼭 이겨서 좋은 정치인 돼주이소.”
나는 그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선거를 멋지게 치러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남들이 독하다고 할 정도로 무섭게 강행군을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설 때 허리춤에 만보기를 차고 늦은 밤까지 걸어다녔다. 하루 10만 보가 나올 정도로 걷고 또 걸으며 유세현장 곳곳을 찾아다녔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몇 켤레의 구두축이 닳아 없어졌는지 모른다. 매일 밤 퉁퉁 부은 다리로 잠이 들었다. 그래도 아픈 줄 몰랐다.
선거자금도 없고 체구도 작은 여자가 큰 선거를 어떻게 치르겠냐며 우려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에 대한 비방은 나날이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보좌관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남이 어쩌든 나는 정도를 걷겠다는 다짐이었다.
현장에서 느끼는 희망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조사한 여론은 계속 상대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왔고 당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유세현장을 둘러본 의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의 반응이 열광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승산이 있어 보입니다.”
참모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단 한 사람의 유권자가 있는 곳이면 깊숙한 산골마을까지 마다 않고 달려갔다. 지금 당장 유권자들에게 무엇하나 해줄 수 없는 처지였지만, 훗날 깨끗한 정치를 통해 반드시 후회 없는 선택이었음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어느 후보보다 가난한 선거를 치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선거 당일 저녁, 개표 과정을 지켜보는 사무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당원들은 박빙의 승부를 예상하고 다소 긴장하는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당초의 예상을 깨고 나는 초반부터 상대편 후보를 거의 더블 스코어로 따돌리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개표가 20퍼센트 진행된 밤 8시30분쯤 5천 표 대 2천3백 표로 상대 후보들 따돌리자 급기야 참모들 사이에 박수가 터져나왔다.
당선이 확정된 순간 선거전략본부에 함성이 울려퍼졌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려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스물두 살에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스물일곱 살에 아버지마저 잃은 뒤 겪은 고통의 시간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1998년 4월 8일, 나는 처음으로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 섰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서를 하는 동안 들고 있던 오른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 순간부터 나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더욱 어깨가 무겁습니다. 앞으로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지금도 나는 본회의장 발언대에 섰던 첫날을 떠올리곤 한다. ‘그날 내가 결심했던 것들을 지금 나는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잠시도 느긋할 수가 없다. 아직도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조국과 여전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국민을 생각하면 쉬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지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팍팍한 정치현장에서 지금까지 나 자신을 버티게 해준 동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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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마디 뿐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한 정치인께서
1200일을 훌쩍 넘겨 감옥에 계셔야함애 분노합니다.
하늘님
오늘도 수고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